문자주의와 연대주의의 합작품

by fallbaram. posted Jul 21, 2016 Likes 0 Replies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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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이스라엘

즉 육신의 이스라엘에겐 문자 즉 계명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육안으로 구분할 수 있는 성소라고 하는 그림도 주셨다.


교회라고 하는 새 이스라엘에겐

성육신을 보내주셨다.


계명과 율법이 영적 존재로 바뀌고

눈에 보이던 성전도 십자가인 영적 존재로 바뀌었다

그 영적 존재가 누구인지는 다 아실 것이다.


마찬가지로

옛언약속에는 연대가 있다.

첫째날과 일곱째 날이 있고

2300 주야도 있고 사십일 사십년도 거기 있고

십분의 일도 거기 있고

칠분의 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도 거기 있다


그 모든 연대와 정해진 날들이 영적 존재속에서

다 이루었다로 증발하였다.


그 모든 연대들( 소위 크로노스라고 하는)이

하나님의 시간 영적 존재의 시간인 "때-카이로스" 속으로

삼킨바 되었다.


그 분의 존재가 영적으로 영원하고 또 다 이루었다의 기능이라면

이제 믿는 자에게 주신 두개의  "때" 를 믿고 기다릴 일이다.

그분은 그것을 "나의 때" 라고 입만 열면 말씀하셨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교회라고 상징하는 여자의 후손의 어미에게

"여자여 (교회여)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고 하면서

표상의 연대와 십자가의 때가 연관되어 있지만 카이로스와 크로노스가

다름을 말씀하셨다.


한번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때라는 말이다.


또 한번은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즉 재림이다.


그 때는 이 땅의 시간이나 공간이 자리하지 않는다.

모든 연대가 그의 "때" 속으로 삼킨바 되었다.


개인에게 준 연대인

십분의 일은 십분의 십으로 변하고

칠분의 일인 안식일도 칠분의 칠인 날마다로 변하고

너의 모든 것이 이제는 나의 것이라고 선언 하셨다.

우리는 그 후로 우리의 시간과 공간이 그분의 것이고

다만 우리는 그분의 청지기로 변했다.

비록 움켜잡고 살지만...


역사속에 주신 모든 연대들 또한 영적인 시간 즉

"나의 때" 속으로 들어가서 아래와 같이 변했다.


더 이상의 연대가 없는

"모든 날의 마지막" 으로 바뀌었고

"속히 오리라" 고 하는 시간을 초월하는 약속으로

바뀌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신 말씀을 꼭 그렇지 않다해도

내가 초림이요 내가 재림이다로 적용해 보아도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이 된다.


다음에는

그래서 이 땅에서 죽는 자도 딱 한 사람이고

사는 자도 딱 한사람이라고 하는

조사심판 보다 더 어지러운 이야기 하고 싶다.


왜그너와 죤스

데스몬드 포드는 재림교회의 보물들이었다.

요나의 잘못된 생각으로 모두 바다에 던져버린

그 아까운 짐처럼 말이다.


그 짐들이 무슨 죄인가?

선지자 요나의 잘못 깨달은 생각이 죄가 아니면?


또 한개의 짐을 바다에 빠뜨리려 하시는가?


혹시 조사심판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행위의 조사가 아니라

너의 삶에 내가 맡겨놓은 것들을 얼마나 움켜쥐고

있느냐 일 것이다.

하나님은 너의 행위에 관심이 없다.

그 분의 행위 그리고 그분의 소유에만

관심이 있다.


청지기 이야기가 그 이야기이다.

달란트의 이야기

포도원의 이야기

글고

므나의 이야기 모두가 다

그분의 때에 적용해야 할 이야기 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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