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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문 2016.07.24 01:52
    [출처] 이순신장군에 대한 외국의 평가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ylove6247&logNo=40006153432&beginTime=0&jumpingVid=&from=search&redirect=Log&widgetTypeCall=true)


    민족의 태양 성웅이순신

    이순신장군은 외국의 특수한경우 예를들면 해군과 관련된사람 외에는 별로 알려져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국력과 관계있는일 아닐까요?
    그러나 장군의 평가는 우리나라보다도 그런 외국인들이 더욱 평가하는것 같습니다. 러일전쟁의 분수령인 쓰시마해전에서 승리한 일본의 도고 제독같은 사람은 이순신장군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섬긴다고 합니다.


    일본 해군영웅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장군에 대한 평가.
    러일전쟁 당시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괴멸시켜 일약 세계적인 해군 지휘관이 된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자신에 대한 영웅적인 평가가 있을 때마다 이순신 장군을 거론하며 겸손해하곤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영국의 유명한 해군제독 넬슨에 버금가는 군신이라는 말을 듣고는,"영국의 넬슨은 군신이라고 할만한 인물이 못된다. 해군 역사상 군신이라고 할 제독이 있다면 오직 이순신 장군뿐이다. 이순신 장군과 비교한다면 나는 일개 하사관도 못된다.

    "당시 도고 제독의 함대는 정부가 외국에서 빚을 끌어다 전함을 사들이고 해군을 적극 육성하는 등 국가적, 국민적인 차원에서 더할 나위 없는 지원을 받아 상당한 전력을 보유했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조정의 지원도 없이 자신의 힘만으로 수적 열세에 놓여 있던 함대를 이끌고 다수의 일본 수군을 상대로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훗날 조정에 불려가 감옥에 갇히고, 수군을 포기하고 육지에서 싸우라는 조정의 명이 떨어졌지만,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사오니 . . . '란 말을 남기고 분전하여 결국 일본 수군과 23번 싸워 23번을 모두 이기는 세계 해전사에 유례가 없는 전적을 남겼다.아울러 도고 제독은 자신을 이순신 장군과 비교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변론을 펼쳤습니다.
    "나를 조선의 이순신 장군에게 비교한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소리이다. 나는 천황 폐하의 부름을 받고 온 국민의 정성어린 지원으로 단 한번의 싸움을 이겨냈다.

    그러나 조선의 이순신 장군은 조정에서조차 버림받고 국민 누구 하나 도와 주는 사람 없이 스스로 무기를 만들고 스스로 식량을 조달하여 수없이 일본 군대를 쳐부숨으로써 그가 지키는 지역에는 일본 군대가 한 발짝도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했다. 당대의 어떤 과학자가 거북선이라는 우수한 과학 병기를 만들 수 있겠는가 ?

    그 뿐만이 아니다. 군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놓고 볼 때 동서고금을 통해 이순신 장군에 비견될 인물이 그 누가 있겠는가 ? 죄인복을 입으면서까지도 죽음으로써 조국에 최후까지 봉사하지 않았던가 ? 나를 이순신 장군에 비교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엄연한 모독이다." 도고제독은 이런평을 했습니다.

    일본 해군준장 사토-데쯔라로의 이순신장군 논평.
    1926년 "조선지방행정" 제6권 2월호 "절세의 명장 이순신"에서 "장군의 위대한 인격, 뛰어난 전략, 천제적인 창의력, 외교적인 수완등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절세의 명장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해군장군인 나로서는 평생을 두고 경모하는 바다의 장수로 네덜란드의 Ruyter Michiel과 조선의 이순신이 있다. 그 중에서 갑과 을을 정하라 한다면 서슴치 않고 이순신을 갑으로 추천하는 바이다. 영국의 넬슨이 세계적인 명장으로 명성이 높은 것은 누구나 잘 아는 바이지만 그 인격에 있어서나 청의성에 있어서는 도저히 이순신의 짝이 될 수 없다.

    프랑스의 장군 "스후란", 미국의 장군 "아랏카트"와 같은 세계적인 명장들도 존경할 만하다 하지만 넬슨 이하의 인물이다.

    로이테르는 인격과 역량, 경력도 이 장군과 비슷하지만 장군으로서 필요로 하는 창의성에 있어서는 한 수 꺾이는 것같이 보인다.

    이순신 장군은 풍신수길의 목적을 좌절케 하였으며 바다를 제압하는 것이 국방상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사실적으로 증명한 명장이었는데 중도에서 모함을 당하여 백의종군 하였으나 어떠한 원망도 하지 않고 고통을 달게 받았으니 이 한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장군의 인격의 고매함을 알 수 있다. 장군은 군기에 엄하고 위엄이 있으며 부하 사랑하기를 친자식같이 하였으며 기분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매사에 정성으로 임하는 모범적인 장군이었다. 장군은 평소 그의 뜻을 전하기를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서 나라에 쓰이게 되면 죽음으로 충성을 다 할 것이오, 만약 쓰이지 못하면 들에서 밭갈이 하는 것으로 족하다. 사람에게 아부하여 영화를 도모하는 것은 나의 큰 수치다"라고 하였으니 이 한마디로 그의 인격을 알아보기 충분하다.
    그도 이런말로 장군을 평했습니다.

    영국 해군준장 G. A. Ballard 의 논평.
    이순신은 서양 사학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 정신인 불굴의 공격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원칙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의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영국인에게 넬슨과 견줄 수 있는 해군제독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기는 힘든 일이지만 이순신이 동양의 위대한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는 이렇게 넬슨과 비교했지만 이순신장군은 결코 넬슨보다 한수위의 장군이 틀림 없습니다.영국인 특유의 자존심을 내세운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각국의 해군사관학교
    여러 나라의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생도들에게 역사적으로 유명한 세계 4대 해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1) B.C. 480년 그리스의 데미스토클레스제독의 살라미스해전,

    2) 1588년 영국 하워드 제독의 칼레 해전,

    3) 1592년 거북선을 앞세워 승리를 거둔 이순신제독의 한산대첩,

    4) 1805년 영국 넬슨제독의 트라팔가 해전.

    이순신장군은 국가를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한 세계적인 위인으로 존경 받고 있으며, 그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거북선은 미국 워싱톤의 전쟁기념관, 영국 해사박물관, 중국, 독일, 불란서, 캐나다 등 세계 각지의 역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그만큼 이순신장군의 전공은 세계에서 가장빚나는 해전사의 선봉에 서있습니다.원균장군도 국가를위해 목숨을 바친 용맹한 장군이나 역시 능력면이라던가 정신면에서는 이순신장군의 상대는 안된다고 생각 합니다.

    [출처] 이순신장군에 대한 외국의 평가|작성
  • ?
    의문 2016.07.24 02:10
    [출처]이순신 장군님에 대한 외국인과 우리의 평가 2.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JMsU&articleno=7289


    한민족은 항해술에 능했고 조선에는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탁월한 자질을 지닌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계 제작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2차 대전 연합군 사령관 버나드 로 몽고메리
    (Bernard Law Montgomery), [A History of Warfare]

    "영국인들에게 그 공적에 있어 넬슨과 필적할 만한 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항상 힘들다.
    하지만 만약 그런 영예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한 번도 패한 적이 없고 적군 속에서 싸우다 죽은
    이 동방의 해군 사령관일 것이다." - 영국 해전사 전문가이자 해군 중장
    G. A. Ballad,
    [Influence of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

    "이순신은 불행히도 생을 조선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용명도 지명도
    서양에 전하지 않고 있지만, 실로 훌륭한 해군 장군이다…
    넬슨과 같은 사람은 그 인격에 있어서 도저히 어깨를 견줄 수 없다.
    이순신 장군은 장갑함을 창조한 사람이며, 300년 이전에 이미
    훌륭한 해군전술로써 싸운 전쟁 지휘관이었다. - 일본해군준장 사토 데쓰타로, [제국 국방사론]

    "이순신은 그 지휘 통솔력에서나 전술 능력에 있어서, 충성심과
    용기에 있어서도, 실제로 기적과도 같은 이상적인 군인이었다.
    세계 역사상 이순신만한 사람이 없으며,
    이 인물의 존재는 조선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는데 도리어 일본사람의 편에서 그에 대한
    존경심이 계승되었다…" - 일본작가 시바 료타로, [언덕 위의 구름]

    "사실 넬슨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은 아니다.
    정말로 군신(軍神)의 이름에 어울리는 제독이 있다면
    그것은 이순신이다.
    이순신에 비교하면 나는 하사관만큼도 못한 존재이다." - 러시아 발틱 함대를 무찌른 도고 헤이치로 제독,
    [일조중 삼국인민연대의 역사와 이론]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장수 정도
    였을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일 몇날을 먹을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써 나의 직무를 다할수
    있을련지 의문이 갔다 "

    "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좋아하는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싶은 사람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하고싶은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 - 와카자키 야스하루 脇坂安治 [1554~1626 ]-


    "황제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지략이 매우 튀어날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을 고르 지닌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명(明)국의 화근인 저 오랑케(훗날청國)를
    견제할수 있을뿐 아니라, 저 오랑케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明)국으로
    귀속시킬수 있을것이옵니다.

    혹여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신(臣)이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대신들 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하여 수없이 이간질과 모함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않고
    국왕에게 충의 보였으니 이어찌 장수가 지녀야할 가장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수 있겠나이까.
    조선국왕은 원균에게 조선통제사 지위권을 주었으나

    그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여척만이 남았으메
    당황한 조선국왕은 이순신을 다시불러 조선수군통제사에게 봉했으나,
    이순신은 단 한번의 불평없이 충의를 보여
    10여척의 함대로 수백척의 왜선을 통쾌하게도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이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그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것이 뻔하며, 조정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할것입니다.

    황제폐하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해주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통제사 이순신 분명히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황제폐하게 충(忠)을 다할것이옵니다.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저 북쪽의 오랑케(훗날의청국)를 견제케 하소서 " -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황제에게 올린 상소 중 -


    국내에서의 이순신 장군의 평가

    한산도에 진을 치매 적이 감히 엿보지 못하고
    한 바다를 가로막으매 그대 힘만 믿었더니 지난해에
    패전한 것 원통한 말 어이할꼬.
    그대 그냥 두었던들 그럴 리가 있었으랴.
    대장을 잘못 바꿈, 이 나의 허물이라
    누구더러 도와 달란 들 기운 짐 어이하리.
    두 번 다시 부임하여 무너진 뒤를 이어 혼란을 수습하고
    군졸을 불러 모았도다 …
    사랑홉다 그대여, 공로는 사직에 있고
    빛나는 충성 절개 죽어도 영화롭다.
    인생 한 세상에 한번 죽음 못 면하네.
    죽을 데서 죽은 이로 그대 같은 이 드물도다. - 선조,《卒逝後賜祭文》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죽은 순신이 산 왜놈들을 격파하였다.《人皆謂死舜臣破生倭 선조실록 사관(史官)》

    “이순신은 백 번 싸운 장군으로서 한 손으로
    친히 무너지는 하늘을 붙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재질을 가지고도 운수가 없어 백 가지 재능을
    한 가지도 풀어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서애 유성룡》

    무후(제갈량)가 죽은 것은 병 때문이었는데,
    공(이순신)이 죽은 것은 전사였다.
    그러나 무후(제갈량)가 죽은 뒤엔
    한(漢) 나라(촉한)의 종실(宗室)이 위태롭게 되었지만,
    공의 경우엔 비록 죽었지만 남은 공렬(功烈)의 은덕을 입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직(社稷)이 거기에 힘입고 있으니,
    공은 여한(餘恨)이 없을 것이다. - 관음포이충무공전몰유허(李忠武公戰歿遺墟) 《연천 홍석주》


    ■ 우리 역사상의 장수들로서 보통때에 조그만 적을 만나
    공로를 세우고 이름을 날린 이는많았지만
    공과 같은 이는 나라가 고작 쇠약해지고 전쟁을 꺼려하는
    때를 당하여 천하에 더할 수 없이 강한 적을 만나서
    크고 작은 수십 번 싸움에 모조리다 이겨내어 서해를가로막아
    적들이 수륙으로 병진할 수 없도록 하여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근본을 삼은것이니, 저 한 때의 공을 세운
    신하 들로서는 따를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그의 몸을 세우는 절개와 국란에 죽는 충성과 또 행군하고
    용병하는 묘리며 복잡한 사무등을 처리하는 지혜는
    이미 다 보고 아는 일이라
    비록 옛날의 명장이나 어진 장수들로서
    백년에 한 둘 밖에 나지 못하는
    그런 인물로도 이 분을 넘어 설 이는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 인조때 대제학,이식>


    ■ 나는 그대를 버렸건만 그대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
    일등공신으로 뽑았건만 포상이 오히려 부족하다.
    <조선시대 제14대왕, 선조>

    ■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예부터 있지마는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 이분에게서 처음 보네.
    <조선시대 제19대왕, 숙종>

    ■ 내 선조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에 기초가 된 것은 오직
    충무공 한 분의 힘, 바로그것에 의함이라.
    내 이제 충무공에게 특별한 비명을 짖지 않고 누구 비명을 쓴다 하랴.
    당나라 사직을 안정시킨 이성과 한나라 왕실을 회복시킨
    제갈량을 합한 분이 충무공이다.
    <조선시대 제22대왕, 정조>

    ■ 공은 엄하고 진중하여 위풍이 있는 한편 남을 사랑하고
    선비에게 겸손하며 은혜와 신의가 분명하고 식견과 도량이 깊어
    기쁨과 노여움을 잘 나타내지 않았다.

    일찍이 하는 말이“대장부 세상에 나서 쓰이면 죽을 힘을 다해서
    충성할 것이요. 쓰이지 못하면 농사짓고 살면또한 족한 것이니
    권세있는 자에게 아첨하여 뜬 영화를 탐내는 것은
    나의 부끄러워 하는바라” 하였다. <조선시대 인조때의 승지, 최유해>

    ■ 이순신은 수근 한 선비와 같았으며 말과 웃음이 적었다.
    재주는 있으되 명이 없어 그 가진재주의 백에 하나도
    미처 펼치지 못했다. -<이순신의 벗이며 영의정,유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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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문 2016.07.24 03:20
    이순신 장군 3

    한려투데이 2015년 6월 채흥기 기자의 연재기사 '이순신 장군과 진린 도독'중 일부를 발췌, 편집하여 올립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haijen_9207&logNo=220393142624&parentCategoryNo=&categoryNo=&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진린(陳璘, 1543년 ~ 1607년)은 중국 광동 출신의 무관으로 1562년 명나라 관직에 출사했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시 어위도총관 및 전군도독부도독으로 전함 500척과 수군 등 병력 2만 여명을 끌고 조선을 도우러 왔다. 이순신 장군과 합력하여 순천 왜교성 전투, 노량해전, 그리고 임진란 마지막 전투인 남해왜성 함락작전을 했다.

    진린 도독은 처음엔 상국의 위세를 부리는 등 이순신과 불화가 있었지만 이순신이 진린에게 수급을 양보해 공을 세우도록 도움을 주자 점차 이순신에게 감복해 진정으로 이순신을 존경하게 된다. 그는 명나라 황제 신종(만력제)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명나라 장군으로 삼을 것을 청했다.

    “황제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이 본 이순신은 그 지략이 매우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을 고루 지닌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 명국의 화근인 저 오랑캐를 견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저 오랑캐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국으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는 서한문의 앞 부분이다. 이를 본 신종은 명나라 도독으로 삼는 벼슬과 함께 현재 충렬사에 보관(시립박물관에 위탁 보관)돼 있는 보물 440호 팔사품(八賜品, 진린 도독의 도장, 영패, 귀도, 참도, 독전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곡나팔)을 하사했다.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함께 싸운 장수로서 이순신과 진린 도독의 애틋한 정이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순신의 휘하 송희립에 의해 왜군에 포위된 진린 도독의 목숨을 구한 것.

    전란이 끝난 후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사망한 뒤에는 태자소보(太子少保)에 추증됐다. 진린의 태생지인 광동성 소관시 옹원현(翁源縣) 주파진에 있는 문중과 교류가 이어지고 있다. 그는 옹원현에서 태어나 운부시 윈푸(雲浮)시 윈안(雲安)구 육도진 등에서 생활했다.

    이순신 장군과 진린 도독은 전남 완도군 고금도 묘당도에서 첫 대면을 했다. 이전 이순신은 1597년(선조 30년) 8월 백의종군에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 임명돼 13척의 배로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후 군산 선유도에서 다시 팔금도에 잠시 있다가 목포 앞 고하도에 진을 쳤으며, 그 해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1598년(선조 31년) 2월17일 수군 8,000여명을 거느리고 완도 고금도 덕동리로 진을 옮겼다. 당시 나이 53세였다. 충무전서행록에 따르면 고금도는 견고한 요충지로 섬이 크고 기름진 농토가 많아서 식량보급이 용이했다. 이순신은 전함을 건조하고 수군을 늘리는 한편 군사력을 기르기 위해 조수와 수전에 익숙한 완도 등 각 진의 장정들을 모집해 초유의 수군을 편성했다.

    진린은 1597년 10월 500여척을 거느리고 충청도 당진에 도착했다. 다음해 선조와 대신들은 전라도에 가는 진린을 전송했으며, 1598년 7월16일 고금도에 도착했다. 이순신은 그를 융숭하게 영접했으나 술잔을 집어 던지는 등 고압적인 자세를 했다. 초반에는 갈등을 빚었으나 나중에 이순신의 인품됨에 감복하게 된다.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신이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 대신들 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해 수없이 이간질과 모함을 했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해 결국에는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 않고 국왕에게 충의를 보였으니 이 어찌 장수가 지녀야할 가장 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중략)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이 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 것이 뻔하며, 조정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해주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그가 이순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편지에 절절하게 배어있다.

    한번은 명나라 수군들이 우리 민가를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본 이순신은 자기의 짐을 모두 배에 옮겨 싣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진린은 까닭은 물었다. 이에 이순신은, “우리는 귀국을 하늘과 같이 믿었는데, 도리어 약탈을 하므로 모두 여기를 떠나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진린은 이순신을 만류하고 짐도 배에서 내리도록 애걸복걸 했다. 이순신은 “귀국의 군사의 잘못을 내가 막을 수 있는 권한을 내게 주신다면 서로 보전할 수 있겠습니다” 했다. 진린은 두말없이 승낙했다. 그 이후 명나라 수군의 행패는 없었다. 이는 현재 징비록에서 나오는 명나라 장군들과 사뭇 다른 행동이다.

    진린은 이순신과 교류를 통해 당시 상황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 노량해전 전투 중 이순신의 죽음을 직감했으며, 이순신이 죽자 그의 시신을 고금도 묘당도에 83일 동안 안치하고 제문을 직접 지어 장례를 지냈다. 그 기간 동안 몹시 통분하며 슬퍼했다 한다. 진린은 이순신보다 2살이 위였다.

    노량해전이 시작되기 전 명나라 육군제독 유정은 협상을 통해 왜장 소서행장의 청을 받아들여 퇴로를 열어준다. 이에 이순신이 적의 원군이 올 것을 예감하며, 진린에게 같이 행동할 것을 요청했다. 이때 진린은 이순신에게 편지를 보낸다. “내가 밤에 하늘의 형상을 보고 인사를 살피는데 동쪽의 대장별이 빛을 잃어가니 공에게 화가 미치는 것이 멀지 않은 듯 합니다. 공이 어찌 이를 모르겠소이까? 어찌 무후(제갈공명)의 예방법을 쓰지 않습니까?” 하자, 이순신은 “나는 충성이 무후에 미치지 못하고, 덕망도 무후에 미치지 못하고, 재주도 무후에 미치지 못합니다. 이 세 가지가 모두 무후에 미치지 못하니, 비록 무후의 비법을 쓴다 해도 하늘이 어찌 응하겠습니까?” 라고 답했다. 이순신은 왜군을 완전히 소탕하겠다는 의지였다. 진린 역시 이에 공감했다. 이 답장을 받고 진린은 이순신에게 큰 화가 닥칠 것을 예상했다. 이 편지는 중국 청산도에 있는 진린의 비문에 있는 글로 충무공전서 첫머리에 실려 있다.

    한편, 여수 묘도는 광양만의 중앙에 자리 잡은 섬으로 진린에 관련된 지명과 유적이 남아 있다. 도독마을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진린은 1598년(선조 31) 7월 16일 당시 전라 수군 본영이었던 완도 고금도에 도착해 덕동에서 조금 떨어진 묘당도에 진을 쳤으며, 9월 21일, 진린 도독은 수군 5천 명과 전함 5백 척을 거느리고 고금도를 출발해 순천 왜성에 갇혀 있던 왜적을 섬멸하려고 묘도에 진을 쳤다. 이에 앞서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9월18일 사망해 왜군들은 철군을 서두르던 시기다. 진린은 이틀 동안 군장을 수습하고 나서 곧바로 장도에 비축한 적의 군량을 불살랐고 왜성을 공격했다. 11월 11일 다시 묘도에 진을 친 뒤 노량해전에 참전한다. 이로써 진린이 묘도에 진을 친 기간은 27일이 되는데 묘도의 도독마을이 바로 그 흔적의 터이다.

    충무사는 1598년 선조 31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의 본영이 있던 곳. 약산도(약산면)를 잇는 다리 입구 덕동리에는 이순신 장군의 진이 있었다. 이곳에는 전쟁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고금도내 거주 민가가 수만호에 이르러 한산도 시대보다 10배가 되었다고 전한다. 완도군지에 따르면 이곳에서 군량미를 마련하기 위해 싸우면서 일하는 등 군농일치의 정책을 폈으며, 염전을 만들어 군염을 비축하고 바로 앞 해남도는 마름으로 섬을 둘러 마치 군량을 쌓아놓은 노적가리로 보이도록 위장했다. 허수아비를 만들어 군복을 입혀 등불을 달아놓고 복병을 사방에 배치해 왜적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진린은 1548년 12월 나응학 어사의 탄핵을 받아 파직돼 고향 옹원에서 8년간 야인생활을 했으며, 뛰어난 문장가였다. 그가 복권된 건 누루하치(청나라 태조)가 동북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등 내우외환으로 나라가 어지럽기에 병법에 능한 장군이 필요에 의해서였다. 명 황제 신종은 야인생활을 하고 있는 진린을 불러들여 부총병(종2품)에 이어 전군도독부 도독(현 군편제상 대장)에 보임했다.

    그의 두 번째 파직은 남오도 부총병으로 좌천돼 있을 당시 있었다. 정기상납을 거부하고 강직했기에 병부상서 석성의 주청에 의해 이뤄졌다. 1596년 야인으로 있을 때 광동성 남부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총독 진대과의 요청에 의해 가산을 털어 용병을 이끌고 민란을 진압했다. 이를 계기로 다시 복귀, 도독첨사가 됐다. 1597년 12월 제3차 동정군 경리 양호 장군이 울산성 전투에서 실패하자 왜란을 종결하기 위해 장군을 물색하던 중 “임진왜란을 평정할 장군은 병법과 왜구방어와 수전에 경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청렴, 강직한 진린 밖에 없습니다”라는 신하들의 청을 받아들여 ‘흠차총령수병어왜총병 관전도독부도독’으로 임명됐다.

    진린은 본영 수군 5,000명, 전함 500척, 해병 및 보병 1만 3,900명과 포루투갈 해군 등 도합 2만여 명 그리고 각종 포와 군량미 2만석을 싣고 조선에 원정했다. 1598년 6월26일 선조와 만난 후 7월16일 고금도에 도착해 묘당도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사망하는 1598년 11월19일까지 5개월 동안 함께 하게 된다.

    진린 도독의, “당당하다 그리고 용감하도다/그대 없었던들 조선 운명 위태했으리./일곱 번 사로잡던 제갈량 재주/여섯 번 내어놓던 진평의 계책 갖추었네.(중략)/ 큰 절개 천 사람이 우러러 보고/높은 이름 만국이 알아주네./우리 황제 간절히도 찾으시거늘/뛰어가지 어찌 끝내 사양 하는가”라는 시가 전해진다.

    1598년 11월19일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진린은 1599년 1월10일(음력) 고금도 도독부 앞뜰에서 영결식을 가졌다. 그리고 83일 동안 월송대(사진)에 시신을 안치하고 장례기간을 거쳤다.

    진린은 영결식에서 <제이통제문(祭李統制文)> 읽으며 애도했다.

    “아! 통제(이순신을 지칭, 통제사의 줄임말)여! 먼나라 왜구가 내침해 조국이 난을 당함에 위기를 극복할 지혜를 발휘해 피폐한 병졸 1려(500명 미만)를 가지고 몇 현의 좁은 땅에 의지해 왜구의 서쪽(호남) 침략을 막고 아군내부를 정비하면서 창을 베개 삼아 갑옷을 입은 채 잠을 자고 종일 쉬지도 않고 전선을 수선하고 무기를 만들었던 날이 적지 않았도다... 노량해전에서 격전이 벌어졌을 때 선봉장 통제(이순신)의 배선미와 이물(선수)이 거의 함몰될 상황에 처했음을 보고 내가 또 그대를 보위하여 적의 호구에서 벗어났도다...그래서 나는 위험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했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적의 유시(화살)에 맞아 운명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우두커니 바라보며, 지난날 우리들의 정분과 일을 회상하며 감회가 여기에 이르매 흐르는 눈물 어이 막을 수 있으랴. 영령은 알지니 이 땅을 살펴보소서.”

    진린은 전쟁이 끝나고 2개월 동안 한양에 머물 때 선조와 접견하는 자리에서 “이순신은 하늘의 여섯 기운을 날로 하고 땅의 오행을 이용해 작전계획을 세우는 재주가 있고, 찢어진 하늘을 꾀매고 해를 목욕시킨 공이 있다”라고 칭찬했다.

    진린은 순천 왜교성을 공동작전으로 공격하자고 했으나, 명나라 육군제독 이 당초 약속을 어기고 공격을 하지 않자 그날 밤 상륙해 유정의 본영에 들어가 장수기를 찢고 힐책했다. 유정이 왜장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협약을 맺어 후퇴하고, 왜군을 무사히 귀국토록 하자는 통문을 보자, 대노해 연락장교를 크게 꾸짖고 “수군과 육군은 책임이 다르니 각 군은 알아서 할 일”이라며 소서행장의 퇴로를 막았다. 이순신과 등자룡을 좌우 선봉장으로 하고 적의 함대가 해협 중앙에 이르자 진린의 공격신호에 따라 공격이 개시돼 적함 300여척이 침몰되고 2,000여명을 죽였다. 그의 아들 진구경이 적장 이시만꼬를 생포했으나 이순신과 등자룡이 전사했다.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남해왜성을 공격해 소와 말 200필과 쌀 등 곡식 1만여석, 조총 등을 노획했으며, 산속으로 도망가는 왜적 2,000여명을 죽임으로써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났다. . 명 황제는 종군했던 감군과 어사들의 보고를 면밀히 검토해 오직 진린 도독만이 황명을 받들어 명나라의 위엄을 널리 떨쳤다고 판단, 도독동지종 1품을 하사했다. 그는 귀국 후에도 반란을 평정하는 등 활동하다가 1601년 5월 광동도독 재임 중인 64세에 사망했다.

    이광수는 이순신 혼자서도 적을 소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진린이 1만 명에 가까운 수군을 데리고 내려와 순신의 행동을 방해해 적을 놓아 보내 마침내는 순신을 죽게 하는 결과를 낳게 했다고 했고, 김훈의 <칼의 노래>와 김탁환의 소설 <불멸의 이순신>은 진린 장군이 이순신의 공을 가로채고,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의 회유에 휘둘려 왜적의 퇴로를 열어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와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진린 장군이 공적에 욕심을 부리고 정유재란 말기 퇴각하는 왜군을 쫓는데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진린 장군을 연구하는 장경희 교수(한서대, 문화재청 전문위원)는 지금까지 진린의 평가는 가혹할 정도로 왜곡돼 있어 정확한 사료 연구와 조사를 토대로 한 재평가 작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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