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모 사건의 진실(카스다 펌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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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시모' 사건의 진실

2014.10.29 22:41

최환철조회 수:7

한국 재림교회 역사안에 결코 작지 않은 아킬레스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허시모'사건이다.

이것은 1925년에 발생한 사건으로서 그 당시 재림교회 입장에서는 상상하기도 싫은 큰 사건이며

이 사건으로 인하여 한국 내에서 재림교회의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다.

 

지금도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그날의 사건 내용이 그대로 올라와 있는데, 진실을 알고보면

재림교회 입장에서는 매우 운이 없어서 발생한 어쩌면 매우 억울한 사건이 아닐까 싶다.

어떻게 보면 누명에 가깝고, 억지로 사건을 과장하여 당한 부분도 적지 않다.

 

하지만 현재 한국재림교회에 성도들 조차도 그날의 진실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많으며

오늘 그 사건을 다루는 이유는 사건의 내막과 진실에 대해서 우리 성도들이 인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록한다.

 

1. 사건의 전체적인 내용

 1)순안 진료소에 부임한 의사들

   - 로설(Riley Russell, 1908-1922)

  - 스콜즈(H,E.Scoles, 1923-1924): 아내의 질병으로 인하여 다시 귀환함

  - 허시모(Clyde A, Haysmer, 1925-1926): 불미스런 사건으로 인하여 귀국함

  - 류제한(George H.Rue.1929-1941, 1947-1967)

 

 2)그날의 사건 요약

미국에서 허시모 의사는 선교사의 사명을 띄고 1925년 4월에 순안 의명진료소에 왔다.

병원장 사택안에는 능금(사과나무 인듯~!) 나무가 10그루 정도 심어 놓았는데, 9월이 되니 어느 정도

익어갈 때에 12세 되는 김명섭(석천근, 윤열화 사이의 아들) 외에 몇 명의 동네 아이들이

계속 능금을 도둑질 했다.(아마도 김명섭은 의붓아들임)

 

 이것을 계속 경고를 주다가 9월 2일에는 김명섭을 잡아서 끈으로 결박을 하여 묶은 다음에

어머니(윤열화)를 불러서 벌금으로 2원을 요청했으며 또한 얼굴에 초산은액으로 한문으로

<도적>이라는 글씨를 쓸 것을 제안하게 된다.

 

어머니는 돈은 없으니 벌금은 어렵다 치더라도 벌로 얼굴에 쓰는 것이야 (2주정도 있다 지워진다고)

그렇게 하라고 합의를 하고 붓으로 '도적'이라고 쓰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이 거의 1년이 지났는데 어찌하다가 조선일보 기자가 알게 되면서 1926년 6월 28일에

사건을 매우 확대,과장시켜서 악의적으로 보도하게 된다.

 

재림교회 측에서는 사건의 커짐을 우려하여 1)사죄 및 합의했으며  2)완전히 복구,치료를 책임지기로 하고

3)각 신문에 사죄광고를 게재할 것이고 4)중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담당할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조선일보 측에서는 이런 내용을 올리기는 고사하고 동아일보에 기사 원문을 그대로 제공하여

1926.6.30에 한글짜도 틀리지 않고 동아일보에도 그 내용이 올라오게 된다.

 

결국 이 사건이 커 지면서 1926년 8월 5일 황권 판사의 판결은 허시모 원장에게 징역3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언도하게 되었다. 이 판결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1926.11.18에 기각되었으며, 11.24에 그 내용을 전달 받게 되자

허시모 원장은 1926.12.02에 부인을 동반하여 미국으로 돌아갔다.

 

 3)억울한 허시모 원장

가장 큰 문제는 그 당시(1920년대 상황) 문화적인 배경으로 볼 때에 외국인들이 선교/의료 목적으로 국내에 와서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켰다. 즉, 1)1923년 진주에서 선교사가 여학생을 감금한 사건  2)1926.포항에서 선교사의 성추행 미수사건

3)1926.마산에서 명예훼손 고소사건 이 외에도 구타사건도 다양하게 발생하여 외국인 선교사들에 대한 불만과

무시 받은 내용에 대하여 뭔가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허시모 사건이 대서특필 되면서 국민들이 매우 크게 반응하기에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또한 이러한 상황에 재림교회 규모가 크지 않았으며 사회적으로 큰 교단이 아니었으므로

대응하기에 강력하게 하지 못한 면도 있었다.

 

두번째는 한국에 터전을 내리기 시작하는 재림교회에서 선교하는 수단이 대체적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타교파 신자(=성도)들에게 안식일 기별과 성소 기별을 추가시켜서 개종시키는 경우가 많음에 따라서

타교파 목회자 및 성도들에게 원망(원성)이 높았으며, 원한 관계가 남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타교파 사람들은 우리를 '신자도둑'이라는 별명까지 붙이면서 재림교회를 왕따시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허시모 사건은 타 교파 사람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기에 결코 작지 않았다.

재림교회는 규모가 작았지만 감리교, 침례교, 장로교 등은 규모가 컸으니 재림교회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서 언론을 크게 활용한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세번째는 임신일(林信一) 간호사와 허시모 원장의 초등대응에 헛점이 많았다.

허시모 의사는 대총회에서 명령을 받아서 온 훌륭한 의료 선교사이다.

(재림 성도들이 허시모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허시모는 미국 서해안의 포틀랜드 위생병원에서 몇 년동안 근무했던 뛰어난 의사였으며

조선같이 멀고 먼 시골에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하여 달려 온 분이다.

순안으로 올 당시 (자살하기 위해서) 기차 앞에 뛰어든 피투성이를 만나게 되었는데,

모두가 포기하고 갔지만 정성껏 치료하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아서 재림교회에 나오게 된

신자가 생길 정도로 희생정신이 강하다.

 

12세 어린 아이를 묶어서 어머니를 부를 정도면 사실상 임신일 간호사 혼자 감행하기는 쉽지는

않았겠지만 아마 임신일 간호사랑 같이 동조해서 일을 벌였을 수도 있다.

사건의 진실은 매우 복잡하고, 진실을 알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허시모 원장의 입에서 나온 진실을 참고해 볼 때, 사실상 70% 정도는 임신일 간호사가

주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허시모 원장은 한국에 와서 5개월밖에 안 되는 상황에서

사과를 도둑질 한다고 12세 아이들을 그렇게 처벌을 계획한다거나 진행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또한 질산은을 붓에 찍어서 얼굴에 도적이라고 쓴 사람도 임신일 간호사였으며

김명섭 어머니를 모시고 온 것도 임신일 간호사였으며, 허시모는 한국말 자체가 불가능 했기 때문에

모든 진행이나 행사는 임신일 간호사가 진행했다고 판단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임신일 간호사는 한국재림교회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한 임기반 장로의 둘째 딸이다.

원래는 중국쪽에서 간호사 공부를 하다가 중단하고 한국에 와서 순안진료소에서 간호사로

채용이 되어서 근무하고 있었다.

독립군의 기질을 타고 났다고 가정할 때에 김명섭 소년에게 처벌을 진행하기에 무리는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허시모 원장 입장에서 판단해 볼 때에 그 당시 여론과 주변의 분위기가 무서웠는지

임신일 간호사가 주도했다고 하면 납치해서 죽일 것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원장 입장에서 간호사를 보호하기 위해서 혼자 모든 책임을 덮어 쓰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어쩌면 임신일 혼자 덮어 썼다면 역사가 어떻게 쓰여 졌을지??)

 

하여간 임신일 간호사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허시모에게 전가된 채로 판결이 나 버렸다.

그리고 허시모가 미국으로 간 다음에 임신일 역시 병원을 그만두게 된다.

 

4)결 론

허시모나 임신일이나 참으로 운이 없었다고 느껴진다.

조선일보(동아일보)에서는 초은산(염산)이라고 강한 용액으로 나왔지만, 병원에서 그런 약품이 필요하지 않다.

병원에서 사용한 것으로 대부분 질산은(Silver nitrate)이었으며, 이것은 잠시 후끈거리는 현상만 있다가

없어지므로 그냥 겁만 주기 위해서 사용한 것 뿐이다.

 

가난한 김명섭 부모는 (큰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는) 주변의 책동에 크게 호응했으며

교단 차원에서도 800 이상의 거액을 보상금으로 줬지만 잠담하지 않았다.

김명섭 소년은 여러 친구들과 함께 한번도 아닌 수차례 사과 도둑질을 했다.

그중에 한명(대표)만 잡았으니, 대충 생각해도 그 아이는 매우 불량했을 것이다.

 

또한 조선총독부 입장에서는 미국을 배척하는 정신세계를 가졌기 때문에

이 사건을 축소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대충 합의만 보면 간단하게 넘어갈 수도 있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힘없는 사람을 바보 만드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많이 힘든 것은 아니다.

모든 상황이 불리한 상황속에 빠진 역사의 희생양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그렇다할지라도 이 사건으로 인하여 재림교회의 이미지가 크게 실추된 것은 사실이며,

아직까지도 이 사건이 은근히 회자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은 그렇다하더라도 우리 재림교회 성도들만은 좀 더 정확한 사건의 이해가 필요할 듯 싶다. 

허시모 원장은 정말 운이 없는 어쩌면 시대의 희생양이며, 그분 역시 큰 희생의 각오로 한국에 온

선교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된다.

 

* 참고 문헌 : 오만규 / 한국선교 100년사 p.342-

이근화 / 한국재림교회 의료선교 회고 P.32-

이영린 /  한국재림교회사

 

<참고사진: 허시모 원장 모습> 

 사본 -허시모.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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