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바에서 카스다(www.kasda.com)의 내용을 민초스다로
이리도 멋진 사나이가 있었네. 거기 사람이 있었네. 이런 글, 누가 나보다 먼저 이곳에 퍼나르는 사람 없나?^^
예, 맞습니다. 우린 그 원로배우만도 못합니다. 뭐, 그리스도인이라고해서 그 보다 나아야 된다는 법이 있나요? 우리의 그릇이 그것만도 못한 걸. 그러나저러나 님의 삶을 꽃으로라도 책하지 못하겠거늘, 그 아름다운 남은교회의 찬송하는 입들이 무슨 할 일이 없어서 수탉이 시멘트 벽 쪼아 그 뾰족한 부리 갈 듯이 한단 말이오. 음, 그 날카롭게 모난 부리를 갈아 둥글게 하려고 도를 닦는 게 보오. 그렇다면야 뭐, 얼마든지 받아주소. 그게 '예수의 정신' 아니오!^^
허공속에 묻어야할 슬픈 옛 이야기
2014.11.13 07:38
이미 누군가에 의해서 이 누리에
장도경이는
목사를 하다가
변절했다던지
합회로 부터 행정적 제재 (목사직을 박탈당했다는 의미)를 받았다던가
어떤 연유로 던지 목사를 그만 둔 사람에게 목사라고 칭하는것을 할 수 없다는
양심적 선언도 있었던 일이고
그 분에 의해서 필명으로 어디선가 글을 올리던 내 필명 (옷) 까지 볏겨진 마당에
원래도 나는 내 알량한 존재를 감추려고 필명을 쓴 사람이 아니고 그 필명이 하도
문학적이어서 그것을 샤용했으며
글의 내용들이 어떤 전통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 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어서 한 내 나름의 처사였지만
묻어두었던 그 아픔이 바람이 불면 하나씩
변절
돈을 더 사랑한자
성질이 개똥같은 자
라는 소리와 이상한 냄새를 동반하며 묻어지지 않는 무덤에 머물러 있다는 아쉬움과
앞으로 이 누리에 내 나름의 의견들과 문학적 글들을 시험하고자 하는일에
상당한 장애 요소가 될 것이라는 노파심이 내 손가락을 끌고 이누리에 서게 한다
이 누리는 한 개인의 신상변호나 한풀이를 올려놓을만한 사적인 누리가 아닌것을
내 손가락은 모르지 않을 것이고 그냥 담담히 읽어 주시면 우리가 살아가는 동네에서 어떤 마음과
윤리가 필요한지를 가늠하고 지향하는 공부가 될 것이라는 교훈적인 강박관념에 나는 내 마음을
움직여 삼년간에 걸쳐서 미시간의 어느 동네에서 보낸 인고의 한 세월을 되새겨 본다.
일전에 한 존경하는 목사님이 은퇴한 목사가 교회에서 견지 해야 할 지침서 같은 내용을 이 누리에
올려놓았고 나는 그 내용을 목사요람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목사들의 가슴에 새겨놓았으면 하는
생각도 기도처럼 해 보았다.
나는 교회와 합의한 원래의 의도와 목적들이 훼손이 되고 합회가 말하지 않는 것들을 교회의 일부가
오히려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보고 원래 내 스스로 목회를 하겠다고 나선것이 아니라
그 교회가 나를 필요하다고 불러주어서 시작한 목회이니 이쯤에 그만두는것이 좋겠다고
생각이 되었고 그만두고 나니 이미 엎질러진 물처럼 나는 이미 목사라는 칭호를 가지게 되었고
그런 신분으로
나는 아직도 젊은데 남아있게 되면 신임목회자가 온후에 그가 신혼의 단물이 빠질때 쯤 한번 나와의 약속도
지키지 못한 그 기운들이 다시 그 목회자를 남아있는 나를 중심으로 어렵게 하지 않겠는가
싶어서 그만두는 그 날부터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교회는 출석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미시간의 한 작은 그룹으로 부터 장 도경이란 사람은 개척에 상당한 열의가 있어보이니
거기로 와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 영역에서 시무하는 목사에게 그런 요청을 이야기 하고 어떤 형태로던지 그 영역에 실제적인 문제가 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도와달라고 했으나 그분의 감정적 표현이 강력했슴에도 그냥 그 일을 밀어붙인것이 화근이 되고
그 일로 격화된 감정과 내가 그만 둔 교회에서 나를 실어했던 (지금은 서로 화목햇지만) 어떤 교우가 그 교회를
들락거리면서 마치 내가
합회에서 쫏겨난 목회자
성질 하나 더러운 목사
사업쪽에 더 관심이 많은 사이비
로 호도하고
그 근거도 없는 얘기가 끊임없이 생명수 이상으로 흘러남을
보면서 나는 이 사회가 얼마나 한심한가를 생각하며 늘
허공을 응시하고 살았는데
목회를 그만둔 배경에
장도경보다 그 마누라가 더 돈을 밝혀서 그리 된것처럼
이야기가 돌 때는 참 가슴이 아팠다.
오늘은 그
합회에서 쫏겨난 목회자
성질 하나 더러운 목사
사업쪽에 더 관심이 많은 사이비
가 그 미시간의 외지에서 삼년간 했던일을
간단히 소개하고 싶어진다.
그 곳까지 매 안식일 갈려고 하면 왕복이
여덟시간이 걸린다.
그것도 시간당 칠십마일의 속력으로.
본인이 텍사스에 살던시절 그 텍사스의 외지에
영주권을 얻으려고 온 대여섯의 한국인이 있는 곳으로
하루 여덟시간을 운전해서 예배를 드려주거 다닌다는 어느
개신교 목사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고 나는 선교사의 심정으로
그리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우선
친구 (한국에서 목회를 했던) 목사를 불러와서 아파트와
생활비를 보장하고 이 개척을 위해 힘써 달라는 부탁을 드렸고
그것을 유지하기위해서 원하지 않았던 사업도 시작을 했다.
그리고 내심 내 마음으로 하나님께 삼년을 바치겠다고 결심의
기도를 드렸다.
디트로이트 본교회에서 분란을 겪은후에 나간 그룹들이 예배를 드리는
처지여서 본교회의 시선과 불리한 소문들 그리고 비 협조는 생각보다
강하고 끈질겼다.
아침 아홉시에 교회에 도착하려면 새벽 네시에 일어나서 준비를 하고
운전을 해야하고 겨울엔 몇번씩 차가 빙판에 미끄러져 돌면서 죽음이란것이
찰나의 것이라는 것을 배우며 살게 되었다.
생각하면 그때마다 뒷자석에서 들리던 여자들의 비명소리 아직도 귀가에 울리고
있다.
개스값도 장난이 아니다.
한번의 주유로는 왕복이 어렵고 언제나 두번 을 주유해야하는 돈이었다.
가정에서 생기는 어떤 행사외에는 한번도 빠지지 않고 그길을 달려갔었다.
언제나 그곳의 사람들 보다 먼저 교회에 도착하면서...
그러나 본교회의 편견이 하도 커서 발전은 커녕 내 신분뒤지기 같은
불량한 소문들이 무성하게 들리고
나는 내심
내가 그런사람이라면
또 당신들이 비난하는 그 손쉬운 입놀림이
정당하다면
왕복 여덟시간 걸리는 이거리를 딱 한번이라도
나와 동행해 보는 시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한을 품고 살았다.
나는 이따금씩 이런 농담을 하곤한다.
만약에 주의 사업을 위해 운전한
마일리지로 하늘 나라를 간다면 내 말고는 갈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지금은 우리가 뎁혀놓은 그자리에
본교회를 뛰쳐나온 또 다른그룹들이 둥지를 틀고 산다.
아마도 이 누리에 허공속에 묻어둔 그 슬픈 예 이야기를 퍼 나른
그분과 상당한 관계를 유지하는 J 목사님이 그 당시에 디트로이트
본교에서 계시던 분이시다.
성질을 감당하지 못해서
삼년 동안에 육만불 이상의 헛돈을 날릴 사람 이 세상에 없다.
필천마일의 주행을 그것도 차한대를 갖다 바치는 위선을 행사할 사람이
이세상에 흔하지 않다.
집안의 반대
냉랭한 시선
난무하는 소문을 견디고
그 일을 할만한 사람이 세상에 많지 않다.
비록 하나님은 그 개척지를 직접 양적으로 번영하는
결과로 도와주시지 않았지만
내 개인에겐 스스로 한 약속이라도 지키는 인내
또 다른 모습으로 일어서는 근육도 만들어 주셧다.
미시간의 또 다른 전쟁이 이누리에 일어나고 있는 즈음에
나는 나에게 돌을 던지는 그것이 한심해서라기 보다도
우리가 생각없이 행동하는 이런 윤리와 태도는 지향해야 한다는 기도가 마음에 생긴다.
앞으로 꼭 돌을 던져야 할 기구한 운명(?)에 처하신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은
그 사람의 처지를 한번 자세히 살피고
그런 이야기 다 허공속에 묻어두고 두팔벌리고 기다리는
주님의 따뜻한 품속도 생각하고
그래도 꼭 해야 하겠다고 하면
하실 일이다.
나 때문에 시험에 들수 있는 자들에게
고양이 쥐생각하는
마음이겠지만
장도경님이라는 자가 정말 그랬을까를 이미 믿게된
어떤이와 그 일이 궁금하여 아직도 믿음이 생기기전에
있는 어중간한 불신자 (?) 들에게 시험에 빠지지 말라고
여기 긴 시간 할애해서
올리는 다른 이유이고
앞으로 기왕에 하고싶은 글 좀 초연하게
마음대로 쓸 수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이기도 하다.
끝으로
성질이 개똥같지 않았다면
결단코 한푼 생기지 않고
비난만 무성한 가시밭길을
삼년이 넘게
누가 하겠느냐고
묻고싶다?
그리고 성질이 개똥같은 사람이라고
정말 믿어진다면
그 성질가지고 목회를 그만둔 나를
찾아와 막걸리 한잔 따르고 정말 감사합니다 라는
감사의 표시도 할법한데 왜 그런 삐딱한 소리는???
여기에 문제가 된 일들의 내용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신들의 진실에 빠져서 서로간 비난하는 그 태도가
문제다.
바울과 실라가 코피터지는 싸움을 했어도
결국에 화목하던 그 아름다운 신앙이 더 필요한
누리가 아닌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어느 원로 탈렌트의 제목보다도
우리의 신앙이 못해서 되겠는가?
아이고
살풀이
한풀이 같은 시시한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를 참 좋아하고
그만둔다고 하니 그렇게 아쉬워하던
합회의 목회부장의 얼굴이 생각나는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