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의 핵심 주제는 믿음으로의 구원이다.
바울의 신약성경 모두의 글은 자신이 예수를 알기전의 믿음과 예수를 알고 난후 믿음과의 차이를 적었다고 보면 된다.
우선 갈라디아서 4장의 핵심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이루어진 구속사에 아브라람의 역할을 통해 믿음을 조명하고 있다.
창세기 15장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아브라함에게 하갈이 낳은 자손으로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이루는데있어 부적합한것을 보셨다고 볼수 있다.
사라를 통해 낳은 아이가 구속의 끈인 이삭을 탄생시킬것을 보신것이라 판단된다.
예지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성공의 길을 걷는 길로 선택할것이다.
목적이 성공이라면...
성경은 구속사역에 대를 이어 가는데 장자나 서자나 이런것을 따지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이스마엘을 내어 쫒는 일은 지금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현상으로 그런 일로 아브라람의 구속사적 믿음을 평가하는것은 성경의 핵심잃은 이야기다.
성경에서는 사람이 착하게만 사는것을 믿음이라 하지않고 하나님의 구속사에 동참하는 행위의 범주안에 들어 있는냐이다.
정말 따져볼수 있는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하나님이라고 할만한 현상으로)어떤 약속을 한다 한들 믿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이다.
이것은 단순한 믿음이며 믿을수 밖에 없는 현상으로 나타난 믿음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런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셨다고 한다.
이런 단순한 믿음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행위로 완전게 된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바로 이런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는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평생 하나님을 믿고 있던것과 현저하게 다른 믿음을 강조 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신의 현현의 현상이 있다면 믿고 따를것이다.
이러한 잣대가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는 표준 잣대이어야 하나님을 믿을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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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선민의식을 가지다면
우린 하나님께 할 말이 참 많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구세주가 태어날 예정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선택했다면 참 답답합니다
같은 시대 인물인 욥은 훨신 더 의로웠으며
살렘왕 멜기세덱이 더 옳을 겁니다.
유대민족이 하나님게 온전히 순복한 역사는 단 한번도 없습니다
눅 13: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눅 13:7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눅13:8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눅 13:9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아브라함은 실수 투성이요
거짓말하고 아내를 배신하고 자녀를 학대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이라 할찌라도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구원은 그런 행위에서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는 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교회가 또다시 유대인들의 전철을 밟습니다
남은 무리라고요 안식일이 최선인것 처럼요
갈라디아서의 4장을 옳바로 읽게 된다면
좋으련만 비유로 말한 그 내용을
거 봐라 바울도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내어 쫒은 것이 정당하다고 말했다
핵심은 시내산에서 받은 것은
종의 아들로 사는 삶이냐
약속된 자유로의 삶이냐 입니다
바울은 한결 같이 말합니다.
우리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된 선민의식은 아무런 필요가 없다고
그런 율법적 행위는
배설물 처럼 여긴다고
그런 바울이 이삭과 이스마엘의 이야기를 꺼내서
이스마엘을 버린것이 정당하다고 말할리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