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신앙 – 새로운 관점에서

by Windwalker posted Jul 13, 2016 Likes 0 Replies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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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는 재림교회에서도 열린 사람들이 주로 모이는 곳입니다.

그런데 앞뒤, 꽉 막힌 중세 신학 (신앙이 아니고),

아니면 미 서부시대 교회 사조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가끔 보입니다.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마당에 한 귀퉁이가 무너지면 다 무너진다는 불안감 때문인지

새로운 (새롭다기 보다는 사실 예수의 Original) 관점은 무조건 거부하는 모양새입니다.

 

현재 호주 시드니에서 택시 운전을 하는 지성수 목사의 글인데,

요즘은 글 한자락 쓰기도 버겁기도 하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적확하게 짚어내서 여기에 소개를 드립니다.

밑줄은 제가 요점을 강조하기 위해 임의로 친 것입니다.

 

왜 이런 목사를 (교단을 막론하고) 단 위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인지...

물론 어느 교단에서든지 단 위에 서기도 전에 아마 짤렸을 가능성이 크겠지요.

 

포스트모던 영성이란 무었인가?

19 세기 말에 "신은 죽었다!"고 니체가 외쳤을 때 아직 중세 시대의 잠이 덜 깬 사람들은

마치 불이야!’하는 외침에 자다가 깬 사람들처럼 깜짝 놀라서 '무슨 일인가? ‘고 허둥댔다.

그러나 니체 자신은 꿈에도 몰랐겠지만 니체의 이 외침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시대의 문을 열게 되었던 것이다.

니체가 "은 죽었다(Gott ist tot)"고 선언 했을 때 의미하는 "은 기독교적인 하나님과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세계를 통칭"한다.

따라서 이 죽었다는 것은 플라톤 이래의 형이상학적 세계,

특히 기독교적 최고 價値가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가 부정한 것은 자체가 아니라, 偶像神, 곧 기독교의 超越的 有神論이라고 생각한다.

니체는 기독교가 현실을 부정하고 來世를 내세우며,

인간의 본능과 생명력을 억압하고, 노예 의지와 노예 도덕을 주입하여

인간이 주체적으로 가치를 창조할 기회를 박탈한다고 비판한다.

그 때까지의 타락 -구원의 패러다임의 기독교는 인간의 삶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선언이다.

즉 니체는 자연스럽고 즐거워야 될 인간의 본성이 기독교에 의해서

죄스러운 것으로 매장되었다고 본 것이다.

기독교에 의한 죄의식의 강조는 땅 보다 하늘을, 정의보다 감정을,

재능의 발전보다 금욕을, 표현보다 억압에 방점을 두게 된다.

 

기독교 안에 이러한 니체의 비판에 대해서 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역사에는 비주류가 대안을 제시했듯이 기독교에도 대안을 가지고 있는 비주류가 있다.

대표적인 존재가 11 세기 사람인 에카르트였는데 그는 죽은 다음 가톨릭에서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교황청이 그가 무서워서 죽은 다음에 판정을 내린 것이 아니라

심판이 오래 걸려서 판결이 나기 전에 죽은 것이다.

20 세기에 들어와서 에카르트를 신학적으로 부활시킨 사람이 매튜 폭스이다.

현대에 와서는 전통적으로 종교가 담당하고 있던 역할을 심리학이 점점 많이 대신하고 있다.

매튜 폭스의 창조영성은 기독교와 심리학을 포함한 과학과 예술이 연결될 수 있는 다리를 놓는다.

매튜폭스의 창조영성의 시각에서 보면 어떤 학문, 심지어는 뉴에이지까지 갈등 없이 이해가 가능하다.

에카르트의 그리스도론은 전통적인 그리스도론과 차이가 있다.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에서는 예수만이 그리스도일 수 있었다.

예수와 인간 사이에는 질적차이가 있다.

원죄를 안고 태어난 인간은 어떤 노력으로도 그리스도의 분량에는 이를 수 없다.

그러나 에카르트에게서는 예수와 인간 사이에 질적 차이가 없다.

다만 인식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기독교의 전통 안에 갇혀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에카르트의 평등주의적 사랑은 인간 사이의 평등뿐만 아니라 우주로까지 확대된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기독교가 살아남으려면 기독교에서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만

그동안 낯설었던 창조영성을 재 복원하고 보완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러나 만병통치의 매튜 폭스의 창조영성은 추상적 사고를 넘어서

생에 대한 새로운 경외를 일으키고 인간이 살고 있는 집으로서의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생물체와의 관계를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영성을 추구한다.

매튜 폭스가 주장하는 창조영성은 이 세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역사와 시간과 몸과 물질과 사회를 포함한다.

영은 인간의 삶에 본질적인 성분이며 바로 삶 안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창조영성에서는 곧 경제학, 예술, 언어, 정치, 교육, 성이 모두 똑같이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 관한, 세상 사람들에 의한, 세상 사람들을 위한 영성이다. 사람 중심의 영성이다.

 

20 세기 말에 들어서서 인간의 사고 혹은 의식, 감정 등이 인간의 뇌에서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연구하는 뇌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뇌 과학에서는 뇌의 작용을 신경세포와 신경 회로, 신경 전달물질로

중간에 매개된 것으로 보고 그것이 특정한 행동을 가져온다고 본다.

인간의 뇌 속에 엄청난 수의 뉴런이 상호 연결되어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의식이다.

뉴런의 연결과 그것의 활성화, 그리고 활동에 의해 인간의 의식과 사고가 생겨난다는

뇌과학 앞에서 아마 프로이트는 울고 가게 되었지만 기독교는 설 자리가 더욱 좁아졌다.

 

펨블턴이란 미국의 한 대학에서 첨단 뇌과학의 연구의 성과로 뇌에서 아름답다든지,

추하다든지 판단하는 신경회로를 차단하는 기술이 개발되었다고 한다.

'칼리그노시아'라는 이 기술은 시각에는 간섭하지 않고,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을 인식하는 일에 간섭한다고 한다.

, 오뚝한 코와 뭉툭한 코의 차이는 분명히 인식하지만,

이 차이에 대해 예쁘다거나 밉다거나하는 심미적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마치 실어증 마냥 일종의 실미증을 유발시켜 외모를

미추에 대한 판단 없이 그저 외모로만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성경의 예수의 말씀을

과학적으로 실행 할 수 있도록 조처가 되는 것이다. 이 아니 '할렐루야!'가 아닌가?

 

옛날에는 아니 지금도 지구의 어느 후미진 한 모퉁이에서는 도를 닦기 위해서

혹은 수행을 하기 위해서 몇 년씩 동굴에 들어가 개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인간의 의식을 발달시키는 프로그램과 이론이 잘 발달되어 있어 돈과 시간을 투자해서

그 과정을 제대로 밟기만 하면 누구든지 도사나 선사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심리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 양자심리학으로 뇌과학으로 자아초월심리학으로 학문이 발전된 탓이다.

이제 영혼을 전제하지 않아도 생물학적 기저만으로도 의식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재정립되었다.

즉 초월적이며 동시에 내재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신관은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양극성을 포함하는 범재신론(panentheism)이다.

그렇다면 신이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은 알겠는데 신이 내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신이 초월적이며 내재적인 존재라는 것은

"우리 가운데서 우리를 넘어(beyond in our midst) 있다"라는 의미이다.

초월(transcendence)로부터 내재(immanence)로의 轉移이다.

즉 신을 밖에서 찾으려는 노력보다 안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발달되었다.

초월(超越)’포월(匍越)’은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르다.

초월이, 뛰어넘을 자에 넘을 . , ‘뛰어 넘다라면 포월은, (기다) 자에 넘을 .

그러니까 기어 넘다라고 풀이할 수 있겠다.

초월이 이곳을 훌쩍 뛰어넘어 저 곳으로 가는 것이라면, 포월은 이곳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이곳에 있는 것들을 끌어안고 낑낑 기어가는 것이다.

가령 선녀가 나무꾼과 아이들을 버리고 그냥 하늘나라로 승천해 버리면

초월이지만 산골에서 잘 살아서 그 산골을 하늘나라로 만들어 버리면 포월인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하고 절실한 것은 초월이 아니라 포월이다.

군대 훈련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포복훈련이다. 포복을 잘못 하면 무릎과 팔꿈치가 다 까진다.

그러나 포복에도 요령이 있는 것이다. 포복에도 높은 포복과 낮은 포복이 있어서

팔과 다리 전체로 기는 낮은 포복을 해야만 무릎과 팔꿈치가 까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신병 훈련소를 다녀온 대한민국 남성들은 다 안다.

나는 요령 있게 세상을 기어가는 것 그것이 예수 잘 믿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포월을 전도하는 인하대 김진석 교수의 아래의 시는 나의 믿음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우리는 부처도 예수도 아니고, 노자도 공자도 아니다.

고승도 아니고 성자도 아니고 현자도 아니다.

더 이상 그런 사람이 되려고 하지도 않는다.

되려고 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다만 겨우 기고 있는 것 같다.

더 이상 도사가 될 수도 없고 또 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그러나 이 조금씩 기고 있음은 몰락과 퇴락의 제스처가 아니다.

낮은 데서 기는 우리의 몸과 마음은 새로운 차원의 넓이와 깊이와 거리를 가진다.

거의 제자리에서 머무르는 듯 하지만 매우 멀리 간 것과 같고,

너무 느리지만 너무 빠른 것과 같고,

너무 작지만 너무 큰 것과 같고,

너무 얕지만 깊다.

기지만 넘어가기 때문이다.

넘어갔다 다시 오면서 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초월은 안하지만 포월을 하고,

해탈은 안하지만 탈을 한다.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고 할 필요도 없지만,거룩한 포월의 길을 간다.

  

우리의 세상살이는 각자의 처지와 상황에 따라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심지어 가슴에 끌어않고 속박과 번뇌 속에서 사는 것이다.

벗어나 보려고 애를 쓰지만 애초에 그런 길은 없는 것이기 때문에 포월을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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