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의 소회 - ( 3 ) - 변화 그리고 재림교회

by 가시나무새 posted Jul 14, 2016 Likes 0 Replies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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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연일 기승을 부린다.

선풍기 에어컨 바람이 오히려 더운 바람이니 어쪄라

세월이 흐르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겠지

그 기다림으로 하루하루를 ------


사람은 누구나 다 변화되는 지고한 과업이 쉽지 않다.

바꾸어 말하면 고정된 관념이나 사고 생각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재림 교회 역시 변화를 시도하거나 개혁의 종을 울리는

창조적이고 역사적이고 진보적인 일이 쉽지는 않았다.


지난 세월동안 이 교회에서 여러 번의 극적인 시도가 있었지만

기득권의 세력에 의해 여지없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 중 두드러진 것 하나가 - 데스몬드 포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재림 교회 역사에서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절호의 변화의 기회였다.

이 사건은 다음 기회에 다루어 볼까 한다.


변화의 시발점은 자신의 모습에 대한 철저하고도 냉정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모습, 작금의 재림 교회의 모습에서 변화의 단초를 찾아야 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도태되거나 죽음의 길로 가는 것 뿐이다.

나라나 기업이나 가정이나 개인이나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이러한 이치를 이렇게 간단하게 설파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죽고 사는 변화보다 더 극적인 변화는 없다.

나는 날마다 죽고 나는 날마다 산다는 바울의 고백이 우리에게 절절하게 필요하다.

아니 이 재림교회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날마다 죽고 사는 이 변화야말로 가장 성경적인 변화의 기별이다.

죽는 다는 것은 상실이요 잃어버림이요 변화이다.

죽음과 부활의 변화 - 이 하늘의 은총이 날마다 개인과 교회에 임한다면 ---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


과연 재림교회가 그동안 죽고 사는 변화의 흔적이 있었는가 ?

겨우 하나 건졌다.

조사심판의 용어를 재림 전 심판으로 포장하는 것 말이다.

변화라기 보다는 견고하게 콘크리트로 덮었다

두 단어는 전혀 다른데도 ( 내용이나 겉이나 ) 우린 같다고 믿고 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기회는 미네아폴리스 대총회 회의이다.

그 때 믿음의 의를 새롭게 발견하였다고 난리였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오래 지탱하였는가 ?

그 후에 걸출한 젊은이 와그너와 화잇의 족적을 살펴보라

살펴본다면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라게 될 것이다.

대부분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는 알려고도 않는다


변하지 않는 모든 것의 특징은 거의 다 동일하다.

보수적인 기질과 특징을 강하게 지녔다는 것이다.

구태여 이 자리에서 진보와 보수를 논할 마음은 없다.

보수 그것도 꼴통 보수는 그야말로 변화를 적대시한다.

보수적인 집단은 언제나 기득권적인 권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살아간다.

재림교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절대 예외가 아니다.

재림교회가 보수인가 진보인가 ?

답해보라.


재림교회의 두 기둥이라고 말하는

소위 이 교회의 정체성이라고 말하는 두 기둥을

즉 안식일 기별과 성소기별이라고 한다.


안식일은 일요일과 대치 비교되는 것으로

성소기별은 재림교회만의 고유한 기별로

이 두 기둥이 이 교회를 견고하게 날로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두 기둥이 이 교회를 보수적인 이분법으로 좌표를 정하는데 결정적이다.

흑백논리처럼 진리와 비 진리처럼

유대인의 선민사상처럼 재림교회도 역시 그러하다는 말이다


우리만이 안식일을 지키니 ( 준수하니 ) 구별된 백성이다.

우리만이 성소기별을 가졌으니 구별된 백성이다.

우리만이 예신을 가졌으니 구별된 백성이다.


누구와 어느 무리와 구별된 무리인가 ?

상대적인 이분법이기에 구분이 분명하다

이 논리는 엄청난 모순을 지닌다.

하나님을 아주 속 좁은 신으로 추락하게 만들었다.

재림교인만 사랑하고 구원하는 편협한 신으로

급기야 재림교회는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한정한 공간에 계시도록 명을 내리기도 한다.

그것도 우리가 기한을 정하는 기막힌 해석을 곁들이기도 한다.

이러한 지경이니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는 교회는 교인은 - 헛된 믿음이라는 것

성소기별을 가지지 않는 교회는 교인은 진리 교회가 - 아니라는 믿음의 확신이다.

그래서 이분법적인 결과물 - 안식일 기별로 인해 짐승의 표가 대두된다.

짐승의 표 - 하나님의 인 = 분명한 이분법적 구별이다.

결국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결말에 이른다.

하나님의 인을 받지 않는 사람은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지독한 이분법적 결론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자비가 개입될 여지나 공간은 없다.

여기에 십자가의 은총이 스며들 은혜도 없다.


그래서 20 명 중 1 명도 구원 받기가 힘들다는 논리도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구원 얻기가 힘들다 쉽다는 논리는 언어도단이요 어불성설이다.

구원은 십자가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이다.

인간이 개입할 조금의 여지도 없다.

이것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믿음에 매우 중요하다.


결국 구원을 행하시는 하나님도 우리의 눈치를 봐야하는 -----

하나님께서 일요일에 교회가는 어느 신실한 성도를 구원하고 싶은데 어이하랴

이분법적인 사고는 흑백논리는 이렇게도 무서운 결과를 도출해 낸다.


성소기별로 인해 파생된 상품이 조사심판이다.

상징과 비유가 실제와 혼동된 해석의 산물이기도 하다

하늘에도 이 땅의 성소와 같은 공간적인 성소가 존재한다는 해석말이다.

그 근거로 성경을 인용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승천하시어서 1844 년 동안은 성소 봉사를 하셨다

그리고 1844 년 이후에는 지성소에서 봉사하시는 것으로 결론 짓는다.


옥수수 밭을 거닐다가 바라 본 하늘의 광경

주님이 성소에서 지성소로 건너가시는 모습에서

대 실망을 겪으면서 도출된 출구 전략으로 건져낸 산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극적인 과정을 겪으면서 성경을 재해석한다.

그것이 지금까지 재림교회 교리로 집대성된다.


1844 년 - 2016 년

이 사이에 무엇이 변했는가 ?

아직까지 중앙집권제 교회 제도를 고수하지 않는가 ?

아직까지 전 근대적인 대총회 회의를 주기적으로 개최하여

천문학적인 재정을 ( 헌금을 ) 낭비하지 않는가 ?


상부와 하부 기관의 일율적인 통제가 진리교회의 증거인가 ?

수 만 명이 지구 곳곳에서 모여드는 대총회 회의 현상이 진리교회의 증거인가 ?

여러 나라에 재림교회가 많이 포교된 것이 진리교회의 증거인가 ?

아니다 결코 아니다 단언컨대 아니다

이런 것은 이런 현상은 진리 교회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변화를 시도도 꿈도 꾸지 않는 이 집단이 망하지 않는 것이 기적이다.

분명히 망해야 하는데 망하지 않는 기적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는 외부에는 화잇에 대한 견해를 달리 표명한다.

그러나 내부에는 전혀 다른 해석이 존재한다.

그야말로 표리부동이라고 하는 말에 부합되는 ---------

화잇에 대한 두 가지의 견해 - 그 중 하나를 속히 버려야 한다

그래야 진정 진리교회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성경해석은 성경으로 풀어야 하는데

우리는 성경을 예언의 신으로도 풀려고 한다.

아니 그렇게 풀고 있다.


교리는 전적으로 성경으로만 풀어야 하는 것이 정석이다.

그래야 진리교회이다.


예언의 신이 어이하여 화잇의 글로 둔갑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이 지구에서 유일한 우리만의 특허 낸 해석이다.

누가 특허를 내어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


그래서 우리는 변화하지 않으니 더욱 날로 갈수록 곤고해지고 있다

변화된 것이 없다.

변화에 대한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아니 느끼지도 못한다.

변하는 세상에 살지만 변화는 없는 보기 드문 기이한 집단이다


이제는 과감하게 던질 것은 던져야 한다.

이제는 결연하게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한다.

이제는 잘못된 부분을 시인할 것은 시인하고 솔직하게 고백하여야 한다.

그런다고 이 교회 결코 망하지 않는다.

더더욱 부흥되고 성장할 것이다.


이곳이 늘 언제나 변함없이 이 교회의 변화를 이끄는 그 일을 하기를 바란다.

이 교회의 허점과 감추고 싶은 부분도 과감 없이 드러내는 유일한 곳이다.

이곳은 그 누구도 그 어떤 이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기억하여 보라

온 누리가 이곳을 향하여 집창촌이라 하여도 우리는 그냥 우리 갈 길을 걸어왔다.


오직 한 가지만 한 곳을 바라보고 우리는 걸어간다.

오로지

진리만이 빛나고

주님만이 빛나고

십자가만이 빛난다면 말이다.

그 모든 것은 다 소용없다.

다 몽땅 던져도 괜찮다.


오늘도 내일도 내 삶의 변화를 꿈꾸고 시도하고

실패하면 엉금엉금 기어가자 십자가 언덕으로

주님 걸어가신 그 길을 말이다


주님 핏자국 선명한 그 길을 걸어가보자

변화는 성령의 선물이다.

인간의 의지로 힘으로 절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 성령의 능력에 굴복하자

손들고 항복하고 나가자

주님께서 우릴 불쌍히 여겨 변화의 은총을 날마다 억수로 엄청 퍼부어 주실 것을 믿는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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