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의 자의 소회 ( 4 ) - 다 내 탓이오

by 가시나무새 posted Jul 15, 2016 Likes 0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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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태어나서 그 생명의 기한을 다 하는 날 까지

모든 인간의 삶에서 마음먹은 그대로 되지도 않고

인간의 의지대로 이루어지지도 않는

인간의 영역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인간의 영역에 자리 잡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죄라고 하는 흉악한 괴물이다.


인간은 한 평생 죄라는 죄의 결과라는 엄청난 파괴력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인간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 버리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감당이다.


인간은 평생 죄의 결과로 겪는 것이 즉 그 결과물이 인간사이다.

이것을 통칭하여 우리는 단순하게 불행이라고도 말한다.

죄의 결과물을 불행이라는 단어로 한정하기는 애매모호하다.

더 깊은 심연의 경지가 존재하지 않을까 ?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자신이 당하고 겪는 숱한

죄의 결과물 앞에서 남의 탓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아담과 하와도 그랬으니깐 말이다.

부모 탓 , 가족 탓 , 그 탓은 수도 없이 많다

숫자로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인간은 남의 탓에서 내 탓으로 그 방향을 변경한다.

이것은 대단한 발견이다.

콜럼버스의 신 대륙 발견보다 더 값진 것이다.


내 탓이오. 이 한 마디 고백이 발해지면 많은 문제들이 풀려나간다.

밖에서 안으로 방향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비로소 진정한 자기 성찰이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다.


남 탓이라는 결론에 이르면

인간은 누구나 분노의 감정을 당연히 가지게 된다.

타인에 대한 분노의 감정은 대단한 파괴력을 지니기에 정말 두려운 것이다.

분노의 감정은 다른 감정의 영역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분노의 감정은 인체와 정신 영적 모든 인간의 삶에 치명적인 독소로 작용한다.

용서를 멀리하고

이기심의 영역으로 자신을 가두어 놓는다


그러나 인간사 모든 것을 내 탓이라는 결론에 이르면

인간은 비로소 차분하게 정서적인 안정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분노의 감정도 하나 둘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자신의 내면 세계를 새로이 조명하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


내 탓이오

이 위대한 명제아래 서게 되면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지

얼마나 나쁜 악한 죄인인지를 깊이 통렬하게 깨닫게 된다

자신이 흉악한 죄인이오

자신이 용서 받아야 할 죄인이오

자신이 지금도 엄청난 죄인이라는 사실 앞에 서게 되면

아니 자신의 힘으로는 도무지 감당 할 수 없는 죄 라는 존재를 깨닫는다면

죄의 힘을 그 슈퍼 파워를 절감한다면

인간은 무가치함을 느끼고 구원자 앞으로 저절로 나가게 된다.


베드로가 엄청난 고기를 잡았음에도

그는 자신의 죗 됨을 주님께 고백한다

주님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자신의 삶의 유형이 어떠하든지

자신이 당하고 겪는 삶의 아픔이 어떠하든지

자신의 삶이 행복하든지 불행하든지

자신이 죄인이고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불가능함을 절실히 깨달으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죄인은 비로소 십자가 앞으로 그 걸음이 향하게 된다.


한 걸음 한 걸음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목격한다.

올라가는 그 길이 힘들지 않다

왠말인가 나를 위해 주 돌아가셨나

이 찬미를 수도 없이 부르고 또 부른다

이 죄인의 눈에는 뜨거운 감격의 눈물이 줄줄 흐른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여주신 은총에 감격하고

자신이 주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 얻는 길을 열어 주심에 감격하고

자신이 새롭게 발견하는 주님의 사랑에 감격한다.


내 인생 내 삶 - 모두 다 내 탓이오

그 누구의 탓도 잘못도 아니오

이 모든 것은 오로지 골고다 십자가 앞으로 이끄는 도구에 불과하오

주님 은혜 감사합니다.


골고다 언덕 십자가 먼 발치에서 주저 않는다

감히 십자가 앞까지 나아갈 엄두도 용기도 나지 않는다

집 떠난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곧장 달려가지 못하고

동네 어귀에서 머뭇거리듯이 말이다.


그런데 한 음성이 들려온다

어서 오너라 속히 이 앞으로 오너라

널 기다리고 있었다.

너의 죄를 다 이미 용서하여 놓고서 널 기다리고 있었다는 주님의 음성이

고요하게 귓전을 울리며 들려온다.


깨달음에는 빠르고 늦음이 없다.

깨닫는 그 순간이 가장 빠른 것이다.


낭자하게 흐르는 주님의 보혈이 어리석은 내 눈을 강하게 자극한다.

저 보혈이 날 위한 것이라고

주님의 죽음이 오로지 날 위한 죽음이라고

새로운 발견을 또 하기에 이른다

날 위해서 저 참혹한 죽음을


주님이 달려와 주저하는 날 껴안으신다.

주님의 품에 용서하시는 그 품에 안긴다

포근하고 따뜻하다

단 한 마디의 원망도 없다

왜 이제 왔느냐고 따지지도 않는다

아무 말이 없지만 우린 오랜 친구같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하나되는 경험이 뭔지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내 탓이오 라는 깨달음이

골고다까지 이르는 안내 좌표 일 줄은 미쳐 몰랐다


그런데 더 놀라운 발견이 있다.

주님 앞에서 내 탓이오 라는 고백말이다

주님 지난 삶에서 - 다 내 탓입니다.

이해 못할 음성이 들려온다

아니다 너 탓이 아니다

다 내 탓이다

내 탓이 아니고 주님 탓이란다.

이 일을 어이할꼬


갑자기 어릴 적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말썽을 부리고 부모님 애간장 다 녹이고

방탕하여 못된 인간으로 살아갈 때에

하루는 어머님의 눈물의 하소연이 기억난다

그래 다 내 탓이구나

다 어미 탓이다 이 놈아


그렇다 그랴 이것이 진리로구나

주님 탓이라고 날 위로하시는구나

죄는 다 내가 지었는데

내 죄를 용서하시면서도 주님 탓이라고


비로소 주님과 내가 하나 됨을 깨닫는다

비로소 십자가 아래에서 주님의 사랑의 그 깊이를 조금이나마 깨닫는다.


주님 감사합니다.

수 없이 발하며 감격의 눈물이 다시 얼굴을 뒤덮는다.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는 자신의 품으로 안는다

아들의 입을 가슴으로 막는 아버지

아들아 다 내 탓이다

너 탓이 아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싶을 것이다


오늘도 십자가 앞에 나아간다.

때론 버겁고 힘들고 숨도 차지만

날 기다리시는 주님이 그곳에 계시기에 나아간다.

주님과 더불어 안식을 누린다.

쉼을 누린다


내 탓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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