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총은 반드시 거부해야 하고 감옥에 갈망정 기필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그대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피핌 목사가 한국의 군복무 의무상황을 알고 있었다면, 반드시 이와같은 항목을 추가했을 것이다.

 

만약에 전 세계 60억 인구가 안식일 교인이 되었다고 가정하고,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당위성에 따라서 조치를 취한다면,

아마도 각 개인의 시간과 장소, 환경여건에 따른 제약, 신자의 성장환경과 의식수준, 믿음의 심도와 연륜...등등을 고려할 때,

셀 수 없이 많은 경우의 수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에, 각 개인에게 맞추어지는 안식일 준수를 위한 행동강령과 범례를

60억 권 만들어서 각자에게 배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준수수칙 자체가 적용 가능한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피핌목사가 일반 사회적 규범의 윤리수준에도 못 미치는 범실을 저지른 것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절대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도덕적 규범과 범례를 성경(구약과 예신)의 예로 제시하며 설문을 작성했으나,

자신이 그 덫에 걸린다는 사실조차도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 확실한데,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십계명과 레위기11장을 비롯한 광범위한 영역의 율법은 절대로 지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꼭 지켜야 천국에 가고 구원 얻는다면, 단 한 사람도 대상이 없을 것이다.(신이라면 가능하다.)

우선 율법을 준수해야 하는 기본적 규범과 기준과 범례를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 예신에서도 충분한 언급은 없다.^^

60억 인구가 각기 다른 인성과 신앙을 소유하게 될 것이고, 이 세상에 똑 같은 조건의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동일한 형태로 만들어진 사이버 인간이나 전자두뇌를 가진 모형인간으로 만들어졌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경건과 거룩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정립이 심화되면서 얻어지는 결과물로 볼 수 있다.

2,300주야 예언은 하나님을 시간 속으로 폐쇄시켰고, 지성소 교리는 제약된 공간안에 하나님을 감금시켰다.

남은 무리와 14만 4천의 종말론은 하나님 고유 권한인 구원의 비밀을 빼았았고, 구속의 경륜을 망가뜨렸다.

 

일본의 분재문화가 압축, 축소된 미를 추구하고 예술성을 명목으로 내 걸고 분재를 만들어 감상하고 즐기는 것처럼,

하나님의 가시화된 축소된 모형이 인간의 손바닥 위에 얹어지게 되었다.

이미 내 손아귀에 잡혀 있는 하나님, 그 분의 존재 일체가 이미 파악이 되었고 내 의지대로 결론을 내린 하나님에게서

과연 범점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보좌에 대한 신비감과 경외감이 생겨날 수 있겠는가?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심포니는 귀로 감상하고, 극히 훌륭한 걸작의 미술품은 눈으로 보고 느끼면서 

절로 감탄을 발하게 될 것이며 감흥을 유발하게 되는데, 손바닥안에 있는 작은 전자계산기의 숫자로 감상하자는 것과 같다.

이와같은 감동과 감흥이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숭배심이 발생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억지예배가 가관일 것이다.

 

"돼지고기 먹으면 천국에 못 간다. 절대로 먹지 마라."

"하나님과 이웃를 사랑하라고 하더라. 우리도 사랑이라는 것 한번 해보자."

"토요일 안식일을 철저히 지켜라. 그래야 야곱의 환란을 겪고 나서 승리하고 면류관 쓴다."

"우리는 남은 무리, 하나님의 최고의 백성이다. 저 사람들은 바벨론이다. 전부 멸망한다."..........등등등,

 

그래서 억지 춘향식으로 결코 준수가 불가능한 조건과 제약들을 신자들에게 제시하고 강요하게 되었다.

객기를 부추기고 영웅심리을 자극하여 극기와 자제를, 믿는 자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덕목으로 내 세워서 영혼을 파멸시켰다.

개인의 의지와 사고체계와 신앙의 자유를 말살하고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어서 실족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런 다음에는 "거룩해져야 한다.", "성화되어야 한다." 인상쓰면서 억지로 감정을 쥐어 짜고 비틀어서 거룩한 척 해야하고,

"예수의 십자가 대목에서는 심각해야 하고 슬퍼져야 한다더라." 오 주여! 예수님의 사랑 어쩌고 저쩌고,...별로 감흥이 생길리가 없다.

실제는 아니기 때문에 물론 웃자고 쓰고 있지만, 의외로 가증떠는 사람들 주위에 많을 수도 있다.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경배할 수 있는 믿음은 자연 발생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정립에서 비롯되고 심화되는 과정이다,

거룩하고 경건하게 변화되는 경험과 성화과정이 신앙의 행동강령과 지침서를 만들어서 강요한다고 되겠는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