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레와 행위에 대해서 올립니다

by 하주민 posted Oct 20, 2014 Likes 0 Replies 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할례의식에 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이에 대한 증거로서 할례에 대해서 그렇게도 많이 말씀한 편지서가 우리를 위하여 주님께서 보존하셨다는 것과 모든 시대를 위한 복음기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하나의 의식으로서의 할례가 지금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 중 아무도 육신의 할례를 받으려는 사람은 없다, 지금 생각하는 문제는 어떻게 하여 의-죄로부터 구원과 의의 유업을 얻느냐 하는 것이다,

의는 오직믿음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이고 그가 우리 안에서 그의 생애를 살도록 허용하는 것에 의해서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하나님의 의를 얻었으며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사실의 표로서 그에게 할례를 주셨다, 할례는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시험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의 약속을 육신적으로 이루려고 하다가 실패한 것을 계속 생각나게 해주었다, 이것을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도 똑같은 의미가 있다, 그 의미는 “육은 무익하”므로 육신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할례를 받는 사실이 그리스도를 아무 소용이 없게 만들지 않았다, 바울 자신이 할례를 받았으며 편의상의 문제로 디모데를 할례 받게 하였었다,(행16:1-3)

그러나 바울은 그가 받은 할례를 외적으로 어떤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빌3:4-7)

디도에게 할례를 구원에 필요한 것으로 받으려고 했을 때에 허락하지 않았다,(갈2:3-5)

이미 존재하는 사실의 표에 불과했던 것이 후 세대에 의하여 그 사실을 세우는 수단으로 생각 되었다, 그러므로 할례는 본 서신에서는 의를 얻을 목적으로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대표하고 있다,

 

유대교사들이 이방인 가운데서 나온 신자들이게 구원의 큰 수단으로서 부과하려고 했던 육신에 행하는 외적인 할례는 육신의 행위를 대표하며 성령에게는 거스리는 일이다(행15:1)만일 어떤 사람이 육신의 행위로, 그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생각으로 어떤 일을 한다면 그리스도는 그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진리를 말하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를 완전히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코 그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든 것으로 영접하지 않는다면 거절하는 것이다,

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을 목적으로할례를 받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인류의 유일무이한 구세주로 믿는 믿음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표로서 할례를 주셨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왜곡하여 믿음의 대치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므로 어떤 유대인이 그의 할례를 자랑할 때에는 그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것이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갈5:3-6)

이것은 율법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의 능력을 경시하는 것이다, 율법은 거룩하고 그 요구는 아주 크므로 어떠한 사람도 율법의 온전함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율법의 영광이 된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된다, 참된 할례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에게 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뻐하고 육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이 말씀을 이해하면 많은 오류에서 보호함을 받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시대에도 전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음을 전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었으며 그 복음만이 유일한 복음이다,

바울이 전하였던 복음도 똑 같은 복음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울이 전한 복음은 아브라함이 가진 복음과 같은 것이다,

복음은 지금이나 아브라함의 시대에 있었던 것이나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 시대에도 그리스도의 시대였기 때문이다,(요8:56)

 

하나님은 그때에 요구하셨던 똑 같은 일들을 지금도 요구하시며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때에도 복음은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이방인, 이교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교도로서 자라고 교육을 받았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다른 신을 섬겼(수24:2)으며 그러므로 그에게 복음이 전파되기까지는 이교도였다,

그러므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베드로나 바울의 시대에도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다, 유대 백성을 이방인 중에서 취하여 내셨으며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므로서이다,(행15:14-18 롬11:25,26)

 

바로 이스라엘의 백성의 존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언제나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 이방인 중에서 한 백성을 구원하는 것임을 말해주는 불변의 증거가 된다,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것은 이러한 뜻을 성취하려는 데에 있다,



이와 같이하여 사도 바울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이 우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신다는 것을 다시한번 돌이켜 보도록 한 것을 알 수 있다,



어떠한 이방인도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은 복음이 아니고는 달리는 구원받기를 바랄 수가 없다,

 

 


Articles

2 3 4 5 6 7 8 9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