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기브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One more time. (조회수 6 이후 수정)

by 김원일 posted Jul 07, 2016 Likes 0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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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년 전에 옆 동네에 올렸던 글인데 

작금 소돔과 고모라 얘기가 또 대두하는 것을 보고 다시 올린다."


이렇게 시작하면서 이 글을 이 누리에 올렸던 게 사 년 전이니

처음 옆 동네에 올렸던 건 거의 십 년 전이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심정으로

약간 편집하여 다시 올린다.


............


여러 가지 해석이 있고 많은 얘기를 할 수 있겠지만, 
몇 가지만 추려서 하자면,

1.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19:5):

"상관하리라"의 히브리어는 "야다"이다.
"알다"(to know)라는 뜻이지만, 
잘 아시는 대로 성관계를 뜻할 때도 쓰인다. 
그래서 개역 성경은 아예 "동침하다"라는 뜻으로 번역해 버리기도 했다. 
("아담이 그 아내 해와와 동침하매" 등. 창 4:1.  
직역하면 "아담이 그 아내 해와를 알매"가 되겠다.) 

그런데 구약이 동성끼리 하는 성관계를 묘사할 때는
이 단어(야다) 보다는 보통 다른 단어를("샤카브") 더 자주 쓴다.
"눕는다"라는 뜻인데 개역 성경은 "교합하다"라고 번역한다.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레 18:22.
직역하면 "여자와 누움 같이 남자와 눕지말라"가 되겠다.)

창 19장의 “상관하리라”가 
보통 동성 간의 성관계를 뜻할 때 쓰이는 단어 “누우리라”가 아니고 
이성 간의 성관계를 뜻할 때 쓰이는 단어 “알리라”여서
어떤 해석가들은 이 이야기가 동성애에 관한 얘기가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은,
폭도들의 요구에 롯이 자기 두 딸을 내어주려 했다는 것이고,
문맥을 볼 때 두 딸을 성적 희롱의 대상으로 내어주려고 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 말은 롯이 “상관하리라”를 
“성관계하리라,” 더 정확히 말해서 “윤간하리라”로 알아들었다는 뜻이겠다.
폭도들은 남자들이었고 (히브리어: 아나쉼), 
그들이 원하는 대상도 남성이었다 (“천사,” 혹은 “사자”의 히브리어는 남성이다.).
남자 폭도들이 남자 과객을 윤간하려 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이야기와 아주 흡사한 사사기 19장의 이야기도 그렇다.
그런데 여기서는 폭도들이 처음에 원했던 남자 대신 그의 여자를 윤간/살인했다.
단순한 동성애자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양성애자들, 적어도 양성애적 기능이 가능한 사람들이었다고 해야 더 정확할 것 같다.
창세기 19장에서는 폭도들이 롯의 두 딸을 윤간했을지 안 했을지 모르니까
그들의 정확한 성적 성향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롯이 두 딸을 내어주려고 한 것을 보면, 
적어도 롯은 그들을 양성애자, 적어도 위의 경우처럼 양성애적 기능이 가능한 폭도로 본 것 같다.

어찌 되었든, 
창 19장이 동성애에 대한 강한 혐오를 보여준다는 해석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2. 무엇이 이야기의 초점인가.

창 19장이 동성애에 대한 강한 혐오를 보여준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결론이라 해도,
이야기의 초점은 동성애가 아니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창 18장이 보여주는 아브라함의 행보나 창 19장이 보여주는 롯의 행보의 두드러진 모습은
특히 롯의 경우 지나가는 방문객에 대한 (두 딸을 내주면서까지 보호해 줄 정도의)  "친절과 배려"이다.

말도 안 되는, 개 같은 "친절과 배려"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야기의 표면적 서술은 그렇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롯의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폭도들은 지나는 객에게 불친절을 넘어 성적 폭력을 가하려 했다.
이야기의 초점은 성적 성향이나 행위가 아니라
지나는 객에 대한 배려와 친절이다.
아브라함이나 롯의 모습과 폭도들의 모습은
이웃 뿐 아니라 지나는 객에 대한 자세의 양극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동성애는 부수적인 이야기이다.
사사기 19-21장도 마찬가지다.

마태복음 10장이나 누가복음 10장이 보여주는 소돔에 대한 예수의 이해도 그렇다.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했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사람들이 어떻게 취급하는가 하는 것이 초점이고, 
그 맥락에서 예수는 소돔과 고모라를 빗대어 말하고 있다.

이 이야기에 대한 에스겔의 이해도 역시 그렇다.
에스겔이 보는 소돔의 죄악은 어느 한 가지가 아니라
상당히 복합적이고 광범위하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에스겔 16:49-50)


동성애 얘기만 나오면 소돔과 고모라를 들먹이며 입에 거품을 무는 사람들,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에 대한 자본주의의 극악무도한 제도적 핍박에 대해서는 대부분 조용하거나, 적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들이대며 "멸망"을 말하지 않는다. 에스겔 아저씨한테 한 수 배울 일이다.


3.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창 19장이나 사사기 19장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한다고 해서
성경 속 이런저런 구절이나 이야기들이 동성애를 혐오한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소돔과 고모라 얘기를 그 맥락 속에서 좀 더 잘 이해하고,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면 그게 뭘까를 더욱 폭넓게 들여다 보자는 것이다.


그 폭도들이 원했던 대상이 동성이 아니고 이성이었다면 
그 죄가 덜했을 것인가.

물론 아니다.
이 이야기들이 끔찍한 이유는
폭도가 동성을 윤간하려 했기 때문이라기보다
그들이 폭도였다는 것과
누군가를 윤간하려 했다는 것이다.

창세기 19장과 사사기 19장은
동성애(양성애?)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에 대한 횡포와 폭력에 관한 이야기이다.

롯의 두 딸은 롯의 소유였고 그의 보호 아래 있었다.
롯이 허락하면 윤간당할 수도 있지만
그가 허락하지 않으면 당할 수 없는 
보호받는 그 마을 시민의 소유다.



반면에, 
마을에 아무 연고자 없이 그저 지나가는 객은 
보호벽이 없거나 있어도 약했다.
그 점을 폭도들은 알았던 거다.
롯의 허락 없이는 그의 딸들에게 못 할 짓을


지나는 객들에게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짐승 같은 자들이었다.


사사기 19장 기브아의 노인도  

"아무도 영접하지 않는" 거리의 과객과 그 식솔을 거두어 영접했고

폭도들은 창세기 19장처럼 행동했다.


이 두 이야기는 
한 배우자와 로맨틱/에로틱한 사랑 속에 일부일처적 삶을 나누는 동성애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보호받지 못하는 과객에게 폭력을 가하려 했던
불한당들의 이야기다.


한 가지 더 관찰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롯도 본래 그 동네 사람이 아니었고

기브아의 노인도 본래 그 동네 사람이 아니었다.

이는 위에서 말한 맥락 속에서 무엇을 시사하는가.





"우리 안에 거하는" 노동 사각지대 이주 노동자나 서류 미비자들을 이 사회는 어떻게 취급하는가.

커밍아웃하고 집에서 쫓겨난 

보호의 사각지대 십 대 아이들은 

누구에게 어떻게 유린당하다가 

자살, 타살 등으로 죽어가는가.


성서를 읽고,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우리의 온 영혼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썩을 놈의 근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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