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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사상> 2013년 3월호에서

출처: http://clsk.org/gisang/


사모, 직분 아닌 직분

사모의 유래
우리 사회는 직함으로 상대를 부르는 사회다. 나와 너 대신, 이름 대신, 선생님, 과장님, 목사님, 집사님, 실장님, 대표님, 선배님 등, 우리는 상대를 부를 때 그 사람과 나의 사회적 관계에서 적절한 직함을 택해 부른다. 이러한 직함들은 직업에 따라 그리고 나와 상대의 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그 사람 자신이 하는 일이나 사회적 지위와 직접 연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사모’라는 직함만큼은, 그 사람 자체를 일컫기보다 그 사람이 누구의 ‘아내’ 라는 점을 지적한다.(누구의 엄마, 아빠라는 호칭도 자식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호칭이기는 하지만, 주로 가족 내에서 사용되거나 자식을 매개로 관계를 맺게 될 때 사용 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른 모든 직함들은 남편과 상관없이 자기 자신이 하는 일이나 사회적 지위를 말해주지만, ‘사모’는 남편의 존재를 전제로 하며, 그 남편이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가 있음을 암시적으로 말해준다.(그래서 상술적으로 나이가 든 남성 소비자는 다 사장님이 듯, 나이가 든 여성 소비자는 사모님이 된다.) 

남편과의 관계에서만 지칭되는 이 특이한 호칭이 언뜻 보면 여성을 존중하는 표현인 것 같으나, 사실은 남성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 호칭이다. 즉, 어떤 남성이 높은 지위에 있을 때, 그 남성에 대한 존중으로서 그 배우자를 사모님이라고 칭한다. 사람들이 사모님에게 깍듯한 이유는, 그 여성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그 여성의 배우자를 존중해서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 아내에게도 잘하는 것이다. 이렇듯 ‘사모’라는 호칭은, 개인에 대한 호칭인 것 같으나 사실은 개인에 대한 호칭이 아니라 남성중심 질서의 사회에서 여성에게 부과된 호칭으로서,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임을 보여주는 호칭이다. 유교의 삼종지도(三從之道)는 여성이 결코 자기 자신으로 서지 못하고 반드시 아버지든, 남편이든, 아들이든 남자에 의지해 존재함을 말해주는 윤리인데, 우리 사회에서 사용되는 ‘사모’ 라는 호칭은 이런 질서에서 나왔다.

‘사모’라는 호칭과 기독교
기독교 공동체는 출신 가족이나 사회적 배경을 떠나 개인의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모두가 하나님 아래 평등하다는 의미에서 형제자매라는 호칭을 쓰지만, 실제로 우리 사회의 교회 구조는 위로는 담임목사에서부터 아래로는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위계화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분의 아내를 일컫는 호칭은 필요하게 되고, 그래서 언뜻 보아 기독교 신앙이나 교리와 상관없는 것 같은 ‘사모’라는 호칭이 교회 안에도 등장하게 된다. 기독교 교리와 상관없는 것 같다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는 각자 자기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혹은 누구를 대신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의 가르침대로 교회 안에서 은사에 따라 직분을 받아 개인이 섬길 수는 있어도 누구의 아내라는 직분이나 직함으로 섬길 자리는 없다. 따라서 ‘사모’라는 호칭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다.


그러나 문화와 기독교가 따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한국이라는 문화적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가지는 특수한 호칭이다. 만약 한국이라는 문화적 상황을 배려하지 않고 그 호칭을 금지시킨다면, 우리는 목사의 아내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적잖이 당황할 것이다. 물론 서구 사회에서도 목사의 ‘아내’(이기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특수한 경험들이 있지만, 서구 사회에서는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에 목사의 아내가 고유명사처럼 사용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잘 느끼지 못하지만, 사실 누가 나를 늘 부르는 호칭이 나를 지칭하기보다 ‘너는 누구의 아내’라는 것을 일컫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다른 여성들은 ‘누구의 아내’라는 직함으로 불리지 않는데 유독 목사의 아내만 그렇게 불린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모라는 직함을 얻기 전까지는, 교회 안에서 여성이 차별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장로교회의 경우 장로가 상당한 직분이지만 장로의 아내를 장로 사모님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보통 장로의 아내는 권사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권사님으로 불린다. 집사의 아내도 보통 집사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집사 사모님으로 불리지 않고 그냥 집사님으로 불린다. 그런데 목사의 아내는 다른 직분이나 직함이 없다. 그냥 사모다. 남편이 목사라는 지위에 있으니 사모도 그에 준하는 지위일 것 같으나, 사실 사모라는 호칭은 남편이 목사라는 것을 말해줄 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사모가 된 여성은 교회 안에서 공식적인 리더십의 자리가 없다. 리더의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 직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아내로서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욕먹지 않아야 될’ 부담이 더해진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내가 집사로서 발휘하는 리더십은 나 개인의 리더십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평가는 나 개인에 대한 평가이지만, 사모로서 발휘하는 리더십은 목사의 아내로서의 리더십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평가는 나 개인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내가 “목사의 아내라는 자리에 적합하게 행동했는가.”라는 물음까지 포함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내가 누구의 아내인 것은 지극히 사적인 관계이나 그러한 사적인 관계가 공적인 장에까지 확장되어서 사적인 역할을 공적인 장에서 수행하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모들의 피로감이 가중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모로 살아가기
교회 안의 ‘사모’라는 호칭은 그리고 그 자리는 묘한 부조화를 보여준다. 우리는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다. 내가 자라던 시절만 해도 21세기는 공상과학의 세계였다. 그런 숫자를 달고 있는 이 시대에, 여전히 여성이 누군가의 아내로서만 지칭되는 자리가 남아 있다. 바로 ‘목사 사모’다. 사실 전도사 사모의 위치는 더 취약하다. 앞에서 교회 안의 구조가 세밀하게 위계화 되어 있다고 했는데, 전도사는 목회의 위계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서열이다. 그 맨 아래 서열에 있는 남자의 아내가 전도사 사모다. 남자의 위계가 여자의 위계까지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의 남편이 뒤늦게 목회의 길에 들어서면서 내게 붙은 ‘사모’라는 호칭 때문에 적잖은 갈등이 있었지만, 남편이 계속 안수를 미루자 어차피 이 길을 계속 갈 거면 차라리 안수를 빨리 받으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전도사 사모로 살았던 6년이 그 위계를 피부로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하는 게 좋겠다. 앞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나는 사모라는 호칭을 달기 전까지는 교회 안의 여성차별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 사회가 빠르게 남녀 평등의 사회로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도 당연히 그 변화와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처음부터 내가 신학이나 사역에 관심이 있었다면 교회 안에 여성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금방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이 직접 남성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남성의 밥그릇을 건드리지 않는 한 대체로 여성에게 친절한 것이 자비로운 가부장 시대의 남성사회이다. 따라서 그 영역을 건드리지 않는 한 내가 특별히 교회에서 제재를 받을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 모두를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구원의 대열에 남성과 함께 선 제자로서 열심히 살았다. 나는 평등한 결혼을 원했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남자를 택했다고 생각했다. 결혼하고 1년 반 정도 후 직장을 그만 둔 남편은 진로를 모색하며 4년간 백수생활을 했는데, 그때도 나의 파트너 의식은 견고했다. 우리는 함께 ‘라브리’에서 협동간사를 했고, 교회에서도 같이 봉사했다. 그런데 4년간의 진로 모색 후 목회를 택한 남편이 신학교 입학과 함께 교회 사역을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우리는 더 이상 대등한 파트너가 아니었다. 남편은 전도사, 나는 전도사 사모였다. 남편이 백수생활을 하는 동안 내 번역 수입이 우리의 생활비였는데, 내가 그러한 생계 활동을 마다하지 않은 이유도 파트너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 그것은 남편 뒷바라지에 불과했고, 이제 남편이 신학교에 들어갔으니 나는 자녀 출산이라는 임무만 수행하면 될 뿐이었다.

혹자는 남편이 사역자가 된다고 왜 파트너 의식이 깨지냐고 물을 것이다. 맞다. 남녀가 내외하며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것도 파트너 의식이라고 한다면, 남편이 사역자가 되었다고 해서 파트너십이 깨질 이유가 없다. 여기에서 각자의 역할이란, 가족의 생계부양자로서 남편의 역할과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는 여성의 역할, 곧 성역할을 뜻한다. 사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이러한 성역할을 기초로 하는 파트너 의식을 가지고 사셨다. 우리 부모님 시대의 부부애는 이러한 성역할에 충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파트너 의식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정말로 모든 의미에서 대등한 파트너 의식을 뜻한다. 성역할의 테두리를 넘어서, 개인 대 개인으로서 권리와 책임과 자유를 대등하게 누리는 파트너 의식을 뜻한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다르지만 평등하다고 배웠다. 맞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그러나 다르기 때문에 평등하지 않다. 남자와 여자의 다름은 생물학적 다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물학적 다름에서 출발해서 그 생물학 때문에 남자는 이러하고 여자는 저러하며, 남자는 이런 일을 하고 여자는 저런 일을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나아가서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다스려야 하고 여자는 복종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이러한 주장들이 생물학과 전혀 상관없는 것인데도 그렇게 결론이 내려지고 이것은 하나의 큰 규범이 된다. 흔히 성역할은 생물학적 다름에서도 나오는 평등한 역할 분담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평등하지 않다. 만약에 그것이 정말로 평등하다면, 여성은 사회에 나가 일을 하지 않아도 오직 가사노동만으로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혼해도 경제적인 타격을 전혀 받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 역할이 정말 생물학에 기반한 것이라면, 돈을 못 벌어 오는 남편이 없어야 하며 밖에 나가 임금노동을 하는 여성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지 않은 사회에 산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다르지만 평등하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성역할에 기반한 파트너십은 대등한 파트너십이 아니다.

어쨌든, 그러한 파트너 의식을 가지고 있던 내가, 나 자신이 신학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남편이 신학교에 갔다는 이유로 경험하게 된 현실은 적잖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사모가 된 순간 나는 교회에서 또 다른 종족으로 존재했다. 끊임없이 누군가의 아내로만 일컬어지는 교회라는 공간은 더 이상 내게 구원의 공간이 아니라 억압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남편이 신학교에 들어간 그해 가을에 나는 여성학과에 들어갔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였다. 앞에서도 길게 설명한 부분은 공부를 통해서 내가 얻은 분석이다. 그러나 해결책은 아직 얻지 못했다. 흔히 목회자 사모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 자리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정말 특별한 부르심이 필요한 자리다. 그런데 그게 자기 사역으로서 특별한 부르심이 아니라, 그런 남편을 만났기 때문에 필요한 특별한 부르심이다. (사모가 소명이라는 말이 아니다. 사모는 소명이 아니다. 다만 그 자리가 특수하기 때문에 각오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그러한 파생적 자리이건만, 사모는 여성으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모범을 보일 것을 요구받는다. 목사에게 기대하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모범이 사모에게도 적용되면서 동시에 이상적인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모델도 요구받는다. 어떤 면에서 사모는 존경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힘들고 제약이 많은 자리지만 그 자리를 잘 지킨 사모들은 존경을 받기도 한다. 현실의 많은 사모들이 그러한 자리에서 소중한 일들을 감당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들에 대한 존중 없이 앞의 분석을 들이대며 변화를 요구할 수는 없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몫을 감당한 그리고 감당하는 사모들을 존중하고 존경해야 한다. 가톨릭처럼 성직이 있고 성직자는 다 싱글이어야 한다는 원칙이 없는 개신교에서는 목사들이 결혼을 하며 -오히려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다- 목사가 결혼을 하는 한 사모는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모로 살 수밖에 없는 분들에 대한 현실적 도움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변화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사모의 자리찾기
오늘날 사모가 되는 젊은 세대들은 사모 자리를 특별히 좋게 보아서 혹은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어쩌다 보니 신학생을 사랑해서 혹은 목사를 사랑해서 사모가 된다. 여성들이 직접 사역의 현장에서 활동할 기회가 많을수록 사역을 원하는 여성들은 직접 사역자의 길을 가지 사모의 길을 택하지 않을 것이다. 양가집 규수가 되는 것이 여성에게 최고의 출세였던 시대에는 사모가 되는 것이 신앙의 여정에서 최고의 길이었을지 모르나, 이제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보다 더 평등의식으로 무장하고 실력도 있는 여성들이, 오직 교회에서만 사모라고 하는 전근대적인 역할을 기꺼이 수행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앙 때문에, 사역자 남편을 둔 여성들은 어느 정도 사모의 자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아무에게서도 목양 받지 못하고 이해 받지 못하는 외로운 영혼이 있다. 그들에게 사모 자리는 결혼의 파생물일 뿐인데, 교회 안에서 생각지 못한 역할을 요구받으니 당황스럽지 않겠는가.

사모 자리가 여성 신앙인으로서 특별히 흠모할 자리가 아니라 결혼에 의해서 생기는 어색하고 불편한 자리가 되어버린 것은 어떤 면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다. ‘ 사모’라는 직함이 사실은 무엇인지, 그 실체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것은 누구의 아내라는 것을 말해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내 남편이 목회자일 뿐인데, 나에게 이러저러한 역할을 요구하는 게 부당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나는 이 사람과 결혼한 사람일뿐이지, 교회 안에서 어떤 직분을 맡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사모에 대한 인식이 바뀌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여성들은 겉으로는 어쩔 수 없이 주어지는 일들을 한다 해도 속으로는 깊은 소외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어쩌다 보니 사랑한 사람이 목회자라고는 하지만, 사실 어느 정도 본인의 신앙이 돈독하지 않고서야 목사를 사랑하는 건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여성들이 느끼는 소외감은 깊을 수밖에 없다. 사모 자리와 역할에 대한 갈등과 불만이 신앙 안에서 소화가 안 되면 불필요한 자책감까지 생기기 때문이다. 문제는 신앙이 아니라 불의한 사회구조인데 말이다. 이러한 여성들은 단순히 복지적 차원이나 물리적 차원의 도움이 아니라 새로운 가르침이 필요하다. 자신들이 경험하는 분열과 괴리를 설명해줄 새로운 신학이 필요하다. 이들은 이전 세대의 사모들과 달리 교회에서 주는 쥐꼬리만한 사례비 아껴가며 생활하는 걸 미덕으로 알지 않고, 나가서 직접 돈을 벌어 생계를 꾸리는 여성들이다. 물론 그 벌이가 대단하지 않은 경우가 많지만, 이들에게는 단순히 사모의 고충을 들어주고 위로하는 정도의 도움이 아니라 자기 현실을 설명해주는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젊은 사모들을 만나면서 많이 느꼈다.

사모의 재발견, 재인식, 재정의
이제 우리는 사모도 개인으로 보아야 한다. 사모라는 호칭을 없애기는 쉽지 않을테니 그 호칭은 유지한다 해도, 사모 개인을 볼 때 이 사람도 자신의 생각과 기호와 감정과 욕망을 가진 인간임을 기억해야 한다. 사실은 사모라는 호칭을 없앴으면 제일 좋겠다. 왜냐하면 이미 그 단어에는 그동안의 사모에 대한 모든 이미지와 상징들이 기억으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호칭을 쓰는 한 우리는 그 기억에 의지해 그 여성에게 많은 것을 투사할 것이다. 그 호칭을 쓸 때마다 지금까지의 사모 역할이 환기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 호칭을 없앤다는 일은 쉽지 않다. 언어는 문화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화는 일어나고 있으니 문화가 바뀌고 그래서 언어까지 바뀔 날을 기대하며 사모라는 호칭은 쓰더라도 의식적으로 그 의미를 바꾸어가야 한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이야기하다가 남편이 목사라는 것을 알면 갑자기 “그럼 사모님이시네요.”하면서 태도를 바꾸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면 남편이 목사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혹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 반응이 나오면 나는 웃으면서 “제가 사모가 아니라 남편이 목사지요.”라고 말한다. 물론 그냥 말장난처럼 들릴 수 있지만, 내가 의도하는 바는, 사모라는 호칭을 무슨 특수한 직분인 것처럼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결혼 관계에 의해서 발생하는 순전히 개인적인 영역으로 보고 거기에 공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남편이 목사라고 하면 그것은 나에 대한 여러 정보 중 하나가 된다. 그러나 사모라고 하면 나는 누군가의 아내로만 존재하게 된다. 사모라는 말이 나오는 맥락에서 이렇게 남편이 목사라는 표현을 계속 부연한다면 사모라는 말도 재정의가 되지 않을까. 불필요한 문화적 덧칠들은 빼고, 그냥 단순하게 결혼에 의해 발생하는 관계임을 일컫는 용어로 말이다. 여성 목사들이 많이 나와 그들의 남편을 부를 용어를 고민하게 된다면, 사모라는 호칭도 새롭게 조명이 될지 모르겠다. 그것 또한 기대해볼만한 변화이다. 

양혜원 l 님은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여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했다. 라브리 협동간사로 섬겼으며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교회 언니, 여성을 말하다 - 엄마 사모 번역가로 사는 마흔 살 여성의 자기 이름찾기』(포이에마, 2012)를 출간했다. 

글쓴이 / 양혜원
  • ?
    아침이슬 2013.04.08 03:23

    참으로 흥미스러운 기사입니다.

    저는 자라나면서 단 한번도 여성들이

    차별받아서 억울하다는  감정을 가져본적이

    없습니다.


    교회안에서도 남성들이 지도자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지도자 역활과 책임지는 일들을

    꺼려하는 저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현상이었지요.


    그러나 여성도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과 탈란트을

    받았으면 지도자 역할을 평등하게 활동하고 헌신할

    기회가 부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한 모습의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두들 특유한개성을

    지닌 귀중한 피조물이며,  평등한 대우와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
    아기자기 2013.04.10 01:10

    아침이슬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배우고 보고 들어서 많은 차별에도 불구하고 님의 표현대로 

    “자라나면서 단 한 번도 여성들이 차별을 받아서 억울하다는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을 정도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지도자 역할과 책임지는 일”의 남성 우월적 독점과 여성 차별에도 “더없이 고마운 현상”로 보여 지게 되지 않았나 합니다.


    이는 창세기의 태초부터 시작해서 요즘의 교과 주제인 호세아서가 그 대표적인 예 인 것 같습니다. 

    여성은 에덴에서부터 사단의 유혹에 먼저 넘어가 남자인 아담을 죄로 빠트린 원죄로 인한 당연한 죄책감을 가져야하고 

    또한 타락한 백성으로 비유되는 음란한 여인 고멜로서, 

    하나님으로 비유되는 남성 호세아의 용서와 자비를 받고도 속 못 차리는 구제불능의 신세가 됩니다. 

    그래서 제사장도 못하고 거룩한 성전에도 못 들어갑니다. 

    신약에 와서도 위대한 바울 사도조차도 ‘여인은 교회에서 수건을 쓰고 질문 있으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어보라’한다고 배워 왔습니다.


    이러한 구약(유대교)와 신약(그리스도교)의 여성차별은 과연 하나님의 진정한 섭리일까요?


    사실 예전에는 이런 생각과 질문조차 불경스러운 선악과로 치부되어 금기시 했습니다. 

    무조건 순종하라고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해야지, 

    남성 성직자들의 성경 해석(잘못되었을 수도 있는)에 순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요! 


    이러한 생각들은 하나님에 대한 불만조장이 아니라, 

    혹 잘못 인식되고 해석 되었을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잡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계속되어지는 종교개혁(깨달음)이 필요하다는 거지요. 


    성경은 그 시대 그 상황에 맞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독자는 항상 자기 시대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고 판단하고 적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수 천년동안 이어져온 가부장적 남성 중심 강자 중심의 억압적이고 폭력적 배타적 신관에서 

    약자와 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본 따뜻하고 평등하며 포용적 신관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님이 표현하신대로 

    “어떠한 모습의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두들 특유한 개성을 지닌 귀중한 피조물이며, 평등한 대우와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 공감하며 아멘입니다. 

    감사합니다! 아침이슬님!

  • ?
    justbecause 2013.04.09 17:19

    아기님 자기님

    올려주신 글  감사드립니다.

    우리 교회에 이렇게 여성입장을 파고 연구하시는 분(사모님 ㅎ ㅎ)이 계신다는 것

    정말 귀하고 반갑습니다.

    이름없이 살아온 한국 여성들, 성경의 여성들

    그리고 한국목사 남편 뒤에 숨겨진 아기님 자기님의 뼈아푼 이야기  공감하고도 남습니다.

    저도 Ex-사모로, 그 영광스런? 사모님에서 집사로 전락? 되는 이야기등등

    교회 안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성차별....

    그런 것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 들이는 여성동지들

    큰 숙제지요?

    그래도 아기자기님이 이렇게 발을 내딛으신게 어디예요.

    용기 내세요.

    그리고 앞으로 종종 뵈어요.

    어쩌면 목사님 사모님보다는 누구누구집사님이라는게 더한 대우인지 모르겠네요.

    우리 한참 많이 변해야 할 것같애요.

     같은 방향의 생각을 가지신 분을 만나서 아주 반갑고 많이 감사 드려요. .

  • ?
    아기자기 2013.04.10 01:25

    justbecause 님 감사합니다! 

    위의 본문은 제 글이 아니라 표기한대로 양혜원님의 글입니다. 

    그러나 물론 공감하는 글입니다. 

    저는 여성도 아닙니다!(왠 컴잉아웃?!) 

    그러나 여성의 입장에서 잘못 인식된 신앙관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사랍입니다. 

    그러니 저도 ‘여성동지‘인 것은 맞습니다^^ 


    저를 ‘아기님 자기님’으로 불러 주시니 생각나서 

    왜 새삼 ‘아기자기‘를 닉으로 택했는지 얘기해 보겠습니다. 

    저와 아내가 몇 개월 전에 처음으로 그 똑똑하다는 스마트폰으로 바꾸었는데요, 

    아내의 전화기에 전화번호 리스트를 제가 입력해 주면서 제 이름을 "자기“라고 입력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물론 내 폰에는 아내를 “아기”라고 입력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기자기’입니다. 

    그 다음부터 제 닉을 ’나비‘에서 “아기자기”라 바꾸었습니다. 

    ’아기자기’에는 그 절반인 ’아기’ 즉 여성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여성의 관점에서 글을 올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모’에는 존중의 의미도 있지만 차별의 의미도 있습니다. (오용의 의미도 있고요!)

    특히 한인 교회에서만 특별히 불려지는 호칭이기도 하구요. 

    혹 시간 있으시면 제가 요전에 올린 <성서의 성,...>1,2 를 읽어 보시면 

    ‘여성의 입장에서 성경 다시 읽기‘에 조금은 도움이 될 듯합니다. 

    "우리(남성포함) 한참 많이 변해야 할 것같애요."에 공감합니다!


    "같은 방향의 생각을 가지신"justbecause 님!

    좋은 글들 자주 올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반갑구요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 ?
    김원일 2013.04.11 19: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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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게시물 올리실 때 유의사항 admin 2013.04.06 36649
공지 스팸 글과 스팸 회원 등록 차단 admin 2013.04.06 53664
공지 필명에 관한 안내 admin 2010.12.05 85451
15175 한국연합회 목회부 이 바보들아! 4 포도주 2015.04.17 371
15174 한국연합회 35회 회기를 이끌어 갈 신임 임.부장 1 배달부 2015.12.09 298
15173 한국에서는 꿈도 못 꿀일 1. 1 새해 2015.01.02 790
15172 한국에서 특히 인기있는 외래소비문화 7 file passer-by 2011.07.10 1895
15171 한국에서 채식주의자로 산다는 것① 초식이 2015.09.25 201
15170 한국에서 줄기차게 꾸준한 라이브 콘서트 1위 가수 박효신의 야생화 Wild Flower 2015.02.11 276
15169 한국에서 제일 똑똑한 닭대가리 8 김균 2015.10.09 294
15168 한국에서 빨갱이가 되는 법, 교회에서 쫓겨나는 법 13 아기자기 2013.12.01 1612
» 한국에서 그리스도인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5 아기자기 2013.04.06 3026
15166 한국에 재림교회가 들어온 이후-1 12 김균 2016.03.22 661
15165 한국에 성령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예언 2015.01.05 886
15164 한국식 정의 tears 2012.07.02 2438
15163 한국스따여, 교회문턱 더 낮추지 않으면 망한다. 탄식 2011.09.03 1446
15162 한국선급, 조직적 증거 인멸..CCTV에 들통 국정원 대통령이나 한국선급이나 똑같네 오호라! 2014.05.23 1447
15161 한국사람들, 정신 차려야 한다. 2 반고 2011.04.26 5346
15160 한국사 국정화 뒤에 '총선 그림자' 적그리스도 2015.10.15 122
15159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시도 무엇이 문제인가? 심판 2016.04.13 22
15158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추진의 배경 - 비뚤어진 효심과 아집 진실한근혜씨 2015.12.28 60
15157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추진의 배경 - 비뚤어진 효심과 아집 아버지 2016.06.13 38
15156 한국사 9개월 가르친 교사 “내가 국정교과서 집필진” 세상읽기 2015.12.10 81
15155 한국사 file 장도리팬 2015.11.02 83
15154 한국도 더 이상 아동 성 매매와 마약으로부터 안전한 나라가 아니다 진실 2015.07.21 242
15153 한국뉴스,,,점점 다가오는 '현금 없는 사회'.. 모바일 결제 급성장 예언 2015.09.07 185
15152 한국교회의 카다피, 길자연 목사. 재림교회의 카다피, ○○○ 목사 한기총 2011.03.19 5052
15151 한국교회의 개들. 2 전도왕 2012.07.15 2829
15150 한국교회 십일금 제도 바뀌어야 한다. 6 似而非敎主 2011.10.20 2421
15149 한국 청소년 에이즈 환자,10년 동안 10배↑...수년 후 한국의 에이즈 환자는 10만을 돌파할 것. 3 눈뜬장님 2016.04.30 93
15148 한국 천주교회가 심상치 않다 4 꼴통 2013.09.09 2027
15147 한국 지성사( 知性史)의 일대 전환-지금 역사가 움직인다! 1 전통矢 2012.12.08 1285
15146 한국 종교계, 발달장애에 빠진 건 아닌지 … 1 돌베개 2012.10.29 1015
15145 한국 재림교회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2015년...연합회장 김대성. 3 권두언 2015.01.18 583
15144 한국 재림교회도 한 20년만 지나면 천지개벽할거다. 4 폭풍전야 2012.04.18 2303
15143 한국 재림교회는 노아방주 (박 명호)를 낳고 미국 재림교회는 David Koresh (다윗왕과 고레스왕의 합성) 를 낳고 16 fallbaram 2014.01.16 2329
15142 한국 재림교회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기별 (오디오) 김운혁 2016.05.09 54
15141 한국 재림교회 목사님들에게 보낸 이메일 내용 전문. 1 김운혁 2014.07.20 700
15140 한국 일보 2월 광고 내용에 대한 설명 김운혁 2014.03.11 1480
15139 한국 외교를 지배하는 선조의 망령 부재 2015.05.27 200
15138 한국 영광스러운 2014 해/ 박GH님 아래 친북좌파 김동섭(가명)씨 정치글은 지우라 안하시나, 편파적 청춘 2014.12.26 558
15137 한국 연합회장님과 한국 교회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호소 영상 김운혁 2014.08.18 664
15136 한국 연합회장 김대성 연합회장의 성명 발표가 있었나요? 아니면 한국연합회 명이로? 8 휘경동 2014.09.27 854
15135 한국 연합회와 대총회 성경 연구소가 저지른 실수 2 김운혁 2014.11.28 497
15134 한국 연합회 산하 "이단 이설 위원회"에 요청한 "소명" 에 대한 기각 조치 김운혁 2014.10.06 528
15133 한국 시 모음 ( 무지무지 많습니다) ------------------와 ---------------------------------------------------우---------------------- 3 잠 수 2011.03.09 13498
15132 한국 세계에서 유일하게 1위 대단한 한국 1등했다 한국 2014.06.12 956
15131 한국 민주정치와 기 싸움. 1 김재흠 2013.05.15 2203
15130 한국 떠나렵니다. 탈출구 2015.06.23 314
15129 한국 뒤집을 충격적인 동영상이 공개됐다 1 대한민국 2012.10.11 1420
15128 한국 대통령의 안타까운 사연 바이블 2011.03.13 2882
15127 한국 대중탕에서 겪은 봉변. 김재흠 2013.06.04 1828
15126 한국 뉴스: 천안함 충돌론 (실시간 검색어 1위) / 안식교는 이단인가 논쟁과 유사. 보수 기독교 언론들 대부분 안식교를 이단으로 인정하고 있어. 보수 기독교 언론은 천안함 침몰의 다른 가능성에 대해 의문 갖지 않아. 안식교회의 정통성 인정 않는 것과 똑같아 6 세례 2014.12.01 534
15125 한국 기독교 세상과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한국교회 2015.03.29 87
15124 한국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은 누구인가 ? 1 여론 2015.03.12 293
15123 한국 국민들이 . . 사람을 알아보는 두 눈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석좌 교수) 3 반달 2012.07.23 2998
15122 한국 국가경쟁력 로산 2011.09.06 1579
15121 한국 교회의 고질병 글쎄 2012.10.27 1187
15120 한국 개신교 보수 근본주의의 4가지 프레임 1 아기자기 2014.08.06 667
15119 한국 PC방 위엄. 1 PC 2015.08.04 180
15118 한국 안식일교회 목사 자리 를 탐하는 여성들 에게 보내는 편지 11 박성술 2013.07.10 1543
15117 한계령 - 양희은 serendipity 2015.03.05 237
15116 한계령 / 양희은 - "한계령, 역사의 흐름 속에 얼마나 많은 민초들의 한을 담고 있는고~ 구슬프면서 힘이 느껴지는구나...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serendipity 2012.11.10 2049
15115 한겨레신문 뭐하자는 건가? 김원일 2014.08.04 778
15114 한강의 기적은 없었다. 희대의 기회주의자 역사의 깡패가 있었을 뿐이다. 3 김원일 2015.07.13 287
15113 한강에 가서 분풀이하기-마쯔다께, 크라이슬러, 박금하님 2 로산 2012.04.19 2648
15112 한강 녹조라떼, 신곡수중보 철거가 답 1 묵시록 2015.08.15 181
15111 한강 "'채식주의자'는 5.18에서 비롯" 포커스 2016.05.23 58
15110 한, 미중일 사이 눈치보기 외교… "反中동맹 덫은 피하라" 美日 신밀월 시대 신세계 2015.04.28 287
15109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며 -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5 김주영 2011.12.23 1274
15108 한 포수의 푸념-카스다에서 보라매 2012.11.10 1138
15107 한 평생 사기치고 다니는 한명의 미주 안식일 목사를 소개합니다 2 사기치는 목사 2015.12.05 402
15106 한 잔하고 선거 필승 건배할 때 좋았지? 시사인 2014.04.19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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