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그리스도인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by 아기자기 posted Apr 06, 2013 Likes 0 Replies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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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사상> 2013년 3월호에서

출처: http://clsk.org/gisang/


사모, 직분 아닌 직분

사모의 유래
우리 사회는 직함으로 상대를 부르는 사회다. 나와 너 대신, 이름 대신, 선생님, 과장님, 목사님, 집사님, 실장님, 대표님, 선배님 등, 우리는 상대를 부를 때 그 사람과 나의 사회적 관계에서 적절한 직함을 택해 부른다. 이러한 직함들은 직업에 따라 그리고 나와 상대의 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그 사람 자신이 하는 일이나 사회적 지위와 직접 연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사모’라는 직함만큼은, 그 사람 자체를 일컫기보다 그 사람이 누구의 ‘아내’ 라는 점을 지적한다.(누구의 엄마, 아빠라는 호칭도 자식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호칭이기는 하지만, 주로 가족 내에서 사용되거나 자식을 매개로 관계를 맺게 될 때 사용 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른 모든 직함들은 남편과 상관없이 자기 자신이 하는 일이나 사회적 지위를 말해주지만, ‘사모’는 남편의 존재를 전제로 하며, 그 남편이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가 있음을 암시적으로 말해준다.(그래서 상술적으로 나이가 든 남성 소비자는 다 사장님이 듯, 나이가 든 여성 소비자는 사모님이 된다.) 

남편과의 관계에서만 지칭되는 이 특이한 호칭이 언뜻 보면 여성을 존중하는 표현인 것 같으나, 사실은 남성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 호칭이다. 즉, 어떤 남성이 높은 지위에 있을 때, 그 남성에 대한 존중으로서 그 배우자를 사모님이라고 칭한다. 사람들이 사모님에게 깍듯한 이유는, 그 여성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그 여성의 배우자를 존중해서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 아내에게도 잘하는 것이다. 이렇듯 ‘사모’라는 호칭은, 개인에 대한 호칭인 것 같으나 사실은 개인에 대한 호칭이 아니라 남성중심 질서의 사회에서 여성에게 부과된 호칭으로서,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임을 보여주는 호칭이다. 유교의 삼종지도(三從之道)는 여성이 결코 자기 자신으로 서지 못하고 반드시 아버지든, 남편이든, 아들이든 남자에 의지해 존재함을 말해주는 윤리인데, 우리 사회에서 사용되는 ‘사모’ 라는 호칭은 이런 질서에서 나왔다.

‘사모’라는 호칭과 기독교
기독교 공동체는 출신 가족이나 사회적 배경을 떠나 개인의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모두가 하나님 아래 평등하다는 의미에서 형제자매라는 호칭을 쓰지만, 실제로 우리 사회의 교회 구조는 위로는 담임목사에서부터 아래로는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위계화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분의 아내를 일컫는 호칭은 필요하게 되고, 그래서 언뜻 보아 기독교 신앙이나 교리와 상관없는 것 같은 ‘사모’라는 호칭이 교회 안에도 등장하게 된다. 기독교 교리와 상관없는 것 같다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는 각자 자기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혹은 누구를 대신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의 가르침대로 교회 안에서 은사에 따라 직분을 받아 개인이 섬길 수는 있어도 누구의 아내라는 직분이나 직함으로 섬길 자리는 없다. 따라서 ‘사모’라는 호칭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다.


그러나 문화와 기독교가 따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한국이라는 문화적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가지는 특수한 호칭이다. 만약 한국이라는 문화적 상황을 배려하지 않고 그 호칭을 금지시킨다면, 우리는 목사의 아내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적잖이 당황할 것이다. 물론 서구 사회에서도 목사의 ‘아내’(이기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특수한 경험들이 있지만, 서구 사회에서는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에 목사의 아내가 고유명사처럼 사용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잘 느끼지 못하지만, 사실 누가 나를 늘 부르는 호칭이 나를 지칭하기보다 ‘너는 누구의 아내’라는 것을 일컫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다른 여성들은 ‘누구의 아내’라는 직함으로 불리지 않는데 유독 목사의 아내만 그렇게 불린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모라는 직함을 얻기 전까지는, 교회 안에서 여성이 차별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장로교회의 경우 장로가 상당한 직분이지만 장로의 아내를 장로 사모님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보통 장로의 아내는 권사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권사님으로 불린다. 집사의 아내도 보통 집사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집사 사모님으로 불리지 않고 그냥 집사님으로 불린다. 그런데 목사의 아내는 다른 직분이나 직함이 없다. 그냥 사모다. 남편이 목사라는 지위에 있으니 사모도 그에 준하는 지위일 것 같으나, 사실 사모라는 호칭은 남편이 목사라는 것을 말해줄 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사모가 된 여성은 교회 안에서 공식적인 리더십의 자리가 없다. 리더의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 직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아내로서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욕먹지 않아야 될’ 부담이 더해진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내가 집사로서 발휘하는 리더십은 나 개인의 리더십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평가는 나 개인에 대한 평가이지만, 사모로서 발휘하는 리더십은 목사의 아내로서의 리더십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평가는 나 개인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내가 “목사의 아내라는 자리에 적합하게 행동했는가.”라는 물음까지 포함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내가 누구의 아내인 것은 지극히 사적인 관계이나 그러한 사적인 관계가 공적인 장에까지 확장되어서 사적인 역할을 공적인 장에서 수행하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모들의 피로감이 가중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모로 살아가기
교회 안의 ‘사모’라는 호칭은 그리고 그 자리는 묘한 부조화를 보여준다. 우리는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다. 내가 자라던 시절만 해도 21세기는 공상과학의 세계였다. 그런 숫자를 달고 있는 이 시대에, 여전히 여성이 누군가의 아내로서만 지칭되는 자리가 남아 있다. 바로 ‘목사 사모’다. 사실 전도사 사모의 위치는 더 취약하다. 앞에서 교회 안의 구조가 세밀하게 위계화 되어 있다고 했는데, 전도사는 목회의 위계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서열이다. 그 맨 아래 서열에 있는 남자의 아내가 전도사 사모다. 남자의 위계가 여자의 위계까지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의 남편이 뒤늦게 목회의 길에 들어서면서 내게 붙은 ‘사모’라는 호칭 때문에 적잖은 갈등이 있었지만, 남편이 계속 안수를 미루자 어차피 이 길을 계속 갈 거면 차라리 안수를 빨리 받으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전도사 사모로 살았던 6년이 그 위계를 피부로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하는 게 좋겠다. 앞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나는 사모라는 호칭을 달기 전까지는 교회 안의 여성차별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 사회가 빠르게 남녀 평등의 사회로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도 당연히 그 변화와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처음부터 내가 신학이나 사역에 관심이 있었다면 교회 안에 여성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금방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이 직접 남성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남성의 밥그릇을 건드리지 않는 한 대체로 여성에게 친절한 것이 자비로운 가부장 시대의 남성사회이다. 따라서 그 영역을 건드리지 않는 한 내가 특별히 교회에서 제재를 받을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 모두를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구원의 대열에 남성과 함께 선 제자로서 열심히 살았다. 나는 평등한 결혼을 원했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남자를 택했다고 생각했다. 결혼하고 1년 반 정도 후 직장을 그만 둔 남편은 진로를 모색하며 4년간 백수생활을 했는데, 그때도 나의 파트너 의식은 견고했다. 우리는 함께 ‘라브리’에서 협동간사를 했고, 교회에서도 같이 봉사했다. 그런데 4년간의 진로 모색 후 목회를 택한 남편이 신학교 입학과 함께 교회 사역을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우리는 더 이상 대등한 파트너가 아니었다. 남편은 전도사, 나는 전도사 사모였다. 남편이 백수생활을 하는 동안 내 번역 수입이 우리의 생활비였는데, 내가 그러한 생계 활동을 마다하지 않은 이유도 파트너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 그것은 남편 뒷바라지에 불과했고, 이제 남편이 신학교에 들어갔으니 나는 자녀 출산이라는 임무만 수행하면 될 뿐이었다.

혹자는 남편이 사역자가 된다고 왜 파트너 의식이 깨지냐고 물을 것이다. 맞다. 남녀가 내외하며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것도 파트너 의식이라고 한다면, 남편이 사역자가 되었다고 해서 파트너십이 깨질 이유가 없다. 여기에서 각자의 역할이란, 가족의 생계부양자로서 남편의 역할과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는 여성의 역할, 곧 성역할을 뜻한다. 사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이러한 성역할을 기초로 하는 파트너 의식을 가지고 사셨다. 우리 부모님 시대의 부부애는 이러한 성역할에 충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파트너 의식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정말로 모든 의미에서 대등한 파트너 의식을 뜻한다. 성역할의 테두리를 넘어서, 개인 대 개인으로서 권리와 책임과 자유를 대등하게 누리는 파트너 의식을 뜻한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다르지만 평등하다고 배웠다. 맞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그러나 다르기 때문에 평등하지 않다. 남자와 여자의 다름은 생물학적 다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물학적 다름에서 출발해서 그 생물학 때문에 남자는 이러하고 여자는 저러하며, 남자는 이런 일을 하고 여자는 저런 일을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나아가서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다스려야 하고 여자는 복종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이러한 주장들이 생물학과 전혀 상관없는 것인데도 그렇게 결론이 내려지고 이것은 하나의 큰 규범이 된다. 흔히 성역할은 생물학적 다름에서도 나오는 평등한 역할 분담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평등하지 않다. 만약에 그것이 정말로 평등하다면, 여성은 사회에 나가 일을 하지 않아도 오직 가사노동만으로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혼해도 경제적인 타격을 전혀 받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 역할이 정말 생물학에 기반한 것이라면, 돈을 못 벌어 오는 남편이 없어야 하며 밖에 나가 임금노동을 하는 여성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지 않은 사회에 산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다르지만 평등하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성역할에 기반한 파트너십은 대등한 파트너십이 아니다.

어쨌든, 그러한 파트너 의식을 가지고 있던 내가, 나 자신이 신학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남편이 신학교에 갔다는 이유로 경험하게 된 현실은 적잖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사모가 된 순간 나는 교회에서 또 다른 종족으로 존재했다. 끊임없이 누군가의 아내로만 일컬어지는 교회라는 공간은 더 이상 내게 구원의 공간이 아니라 억압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남편이 신학교에 들어간 그해 가을에 나는 여성학과에 들어갔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였다. 앞에서도 길게 설명한 부분은 공부를 통해서 내가 얻은 분석이다. 그러나 해결책은 아직 얻지 못했다. 흔히 목회자 사모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 자리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정말 특별한 부르심이 필요한 자리다. 그런데 그게 자기 사역으로서 특별한 부르심이 아니라, 그런 남편을 만났기 때문에 필요한 특별한 부르심이다. (사모가 소명이라는 말이 아니다. 사모는 소명이 아니다. 다만 그 자리가 특수하기 때문에 각오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그러한 파생적 자리이건만, 사모는 여성으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모범을 보일 것을 요구받는다. 목사에게 기대하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모범이 사모에게도 적용되면서 동시에 이상적인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모델도 요구받는다. 어떤 면에서 사모는 존경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힘들고 제약이 많은 자리지만 그 자리를 잘 지킨 사모들은 존경을 받기도 한다. 현실의 많은 사모들이 그러한 자리에서 소중한 일들을 감당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들에 대한 존중 없이 앞의 분석을 들이대며 변화를 요구할 수는 없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몫을 감당한 그리고 감당하는 사모들을 존중하고 존경해야 한다. 가톨릭처럼 성직이 있고 성직자는 다 싱글이어야 한다는 원칙이 없는 개신교에서는 목사들이 결혼을 하며 -오히려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다- 목사가 결혼을 하는 한 사모는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모로 살 수밖에 없는 분들에 대한 현실적 도움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변화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사모의 자리찾기
오늘날 사모가 되는 젊은 세대들은 사모 자리를 특별히 좋게 보아서 혹은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어쩌다 보니 신학생을 사랑해서 혹은 목사를 사랑해서 사모가 된다. 여성들이 직접 사역의 현장에서 활동할 기회가 많을수록 사역을 원하는 여성들은 직접 사역자의 길을 가지 사모의 길을 택하지 않을 것이다. 양가집 규수가 되는 것이 여성에게 최고의 출세였던 시대에는 사모가 되는 것이 신앙의 여정에서 최고의 길이었을지 모르나, 이제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보다 더 평등의식으로 무장하고 실력도 있는 여성들이, 오직 교회에서만 사모라고 하는 전근대적인 역할을 기꺼이 수행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앙 때문에, 사역자 남편을 둔 여성들은 어느 정도 사모의 자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아무에게서도 목양 받지 못하고 이해 받지 못하는 외로운 영혼이 있다. 그들에게 사모 자리는 결혼의 파생물일 뿐인데, 교회 안에서 생각지 못한 역할을 요구받으니 당황스럽지 않겠는가.

사모 자리가 여성 신앙인으로서 특별히 흠모할 자리가 아니라 결혼에 의해서 생기는 어색하고 불편한 자리가 되어버린 것은 어떤 면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다. ‘ 사모’라는 직함이 사실은 무엇인지, 그 실체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것은 누구의 아내라는 것을 말해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내 남편이 목회자일 뿐인데, 나에게 이러저러한 역할을 요구하는 게 부당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나는 이 사람과 결혼한 사람일뿐이지, 교회 안에서 어떤 직분을 맡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사모에 대한 인식이 바뀌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여성들은 겉으로는 어쩔 수 없이 주어지는 일들을 한다 해도 속으로는 깊은 소외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어쩌다 보니 사랑한 사람이 목회자라고는 하지만, 사실 어느 정도 본인의 신앙이 돈독하지 않고서야 목사를 사랑하는 건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여성들이 느끼는 소외감은 깊을 수밖에 없다. 사모 자리와 역할에 대한 갈등과 불만이 신앙 안에서 소화가 안 되면 불필요한 자책감까지 생기기 때문이다. 문제는 신앙이 아니라 불의한 사회구조인데 말이다. 이러한 여성들은 단순히 복지적 차원이나 물리적 차원의 도움이 아니라 새로운 가르침이 필요하다. 자신들이 경험하는 분열과 괴리를 설명해줄 새로운 신학이 필요하다. 이들은 이전 세대의 사모들과 달리 교회에서 주는 쥐꼬리만한 사례비 아껴가며 생활하는 걸 미덕으로 알지 않고, 나가서 직접 돈을 벌어 생계를 꾸리는 여성들이다. 물론 그 벌이가 대단하지 않은 경우가 많지만, 이들에게는 단순히 사모의 고충을 들어주고 위로하는 정도의 도움이 아니라 자기 현실을 설명해주는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젊은 사모들을 만나면서 많이 느꼈다.

사모의 재발견, 재인식, 재정의
이제 우리는 사모도 개인으로 보아야 한다. 사모라는 호칭을 없애기는 쉽지 않을테니 그 호칭은 유지한다 해도, 사모 개인을 볼 때 이 사람도 자신의 생각과 기호와 감정과 욕망을 가진 인간임을 기억해야 한다. 사실은 사모라는 호칭을 없앴으면 제일 좋겠다. 왜냐하면 이미 그 단어에는 그동안의 사모에 대한 모든 이미지와 상징들이 기억으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호칭을 쓰는 한 우리는 그 기억에 의지해 그 여성에게 많은 것을 투사할 것이다. 그 호칭을 쓸 때마다 지금까지의 사모 역할이 환기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 호칭을 없앤다는 일은 쉽지 않다. 언어는 문화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화는 일어나고 있으니 문화가 바뀌고 그래서 언어까지 바뀔 날을 기대하며 사모라는 호칭은 쓰더라도 의식적으로 그 의미를 바꾸어가야 한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이야기하다가 남편이 목사라는 것을 알면 갑자기 “그럼 사모님이시네요.”하면서 태도를 바꾸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면 남편이 목사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혹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 반응이 나오면 나는 웃으면서 “제가 사모가 아니라 남편이 목사지요.”라고 말한다. 물론 그냥 말장난처럼 들릴 수 있지만, 내가 의도하는 바는, 사모라는 호칭을 무슨 특수한 직분인 것처럼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결혼 관계에 의해서 발생하는 순전히 개인적인 영역으로 보고 거기에 공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남편이 목사라고 하면 그것은 나에 대한 여러 정보 중 하나가 된다. 그러나 사모라고 하면 나는 누군가의 아내로만 존재하게 된다. 사모라는 말이 나오는 맥락에서 이렇게 남편이 목사라는 표현을 계속 부연한다면 사모라는 말도 재정의가 되지 않을까. 불필요한 문화적 덧칠들은 빼고, 그냥 단순하게 결혼에 의해 발생하는 관계임을 일컫는 용어로 말이다. 여성 목사들이 많이 나와 그들의 남편을 부를 용어를 고민하게 된다면, 사모라는 호칭도 새롭게 조명이 될지 모르겠다. 그것 또한 기대해볼만한 변화이다. 

양혜원 l 님은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여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했다. 라브리 협동간사로 섬겼으며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교회 언니, 여성을 말하다 - 엄마 사모 번역가로 사는 마흔 살 여성의 자기 이름찾기』(포이에마, 2012)를 출간했다. 

글쓴이 / 양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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