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시위에서 디씨팀은 어떤 피켓을 준비해야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잘 표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 중에 앤님이 희생자들의 영정사진을 준비하자는 제안을 했다.
아니 그 많은 희생자들의 사진 파일은 어디서 어떻게 다 구하고, 작업 시간 많이 걸리고,
액자도 무거울텐데 그 방대한 작업을 누가 다 어떻게...?
아이디어는 좋은데 아무래도 우리의 역량이 부족할 것 같아서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러나 미씨디씨맘 리더 숙님을 비롯한 몇몇분들이 해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져
D-4day부터 전격적으로 작업에 돌입하였다.
한국에서 사진 파일을 전송받았는데 깨져서 온 파일이 많아서 밤새 수정작업을 하신 희님은
계속 흐르는 눈물 때문에 작업에 어려움이 있었다한다.
희님이 수정한 사진파일들을 메릴랜드에서 하루 종일 출력해서 두차례에 걸쳐
사람편에 보내주신 사사세 씰님도 하루종일 컴과 프린터 만 오가셨을 것이다.
아이들 사진을 접하고 또 밤새 꺼이꺼이 울었다는 미님은 18일 아침에
피곤한 모습으로 한 다발의 영정사진 액자를 사가지고 작업을 하기로한 윌리엄 평화센터로 왔다.
페렴으로 병원에 입원해 계신 응태장로님께서도 이 소식을 들으시고 액자사는데 쓰라며 돈을 보태 주셨다.
여기저기서 검은 리본을 구입해서 숨찬 발걸음에 달려오신 오신 재님,
아이가 딸려 있어도 작업은 돕겠다며 오신 수님,
몸으로 하는일이라면 언제든지 꼭 돕고 싶다고 오신 솜시좋은 소님, 경님...
이러한 미씨님들의 적극적인 도우심으로 액자의 유리를 모두 띄어내고 리본을 붙여가며
12시부터 5시까지의 1차 작업은 일단 완료될 수 있었다.
이 방대한 양의 작업을 하루에 완성하는 것은 쉽지 않아보였다. 리본도 모자르고, 사진도 모자르고...
그러나 그때 홀연히 나타난 사사세의 미남총각이 오늘 다 끝내보자며,
집과 킹코를 오가며 사진을 출력하는대로 배달해 주었다.
나도 사방팔방으로 뛰니 모자라는 리본을 더구할 수가 있었다.
멀리 엘리콧에서 달려 온 또다른 총각과 노님, 앤님이 2차 작업의 4인 1조가 되어
밤 11시까지 작업한 끝에 희생학생 영정사진 만들기 프로젝트를 거의 마칠 수가 있었다.
사진을 구하지 못해 못한 15명이 더 있다 15장은 집에서 숙제로 해오겠다는 동바(동네바보)님 덕분에
우리는 보람있는 시간을 마감하였다.
사진들을 하나하나 대면하는 사람다마 다들 잠시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이것은 글자로 대하던 세월호와 뉴스로 접하던 세월호 사건과는 다른 또 하나의 충격이였다.
"아이들아, 우리가 밝혀줄께 너희들의 억울한 죽음을!!"
우리는 계속 계속 이렇게 되세기면서, 숭고한 마음으로...
모든것이 합하여 선을 이루며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9월 21일 뉴욕 행진시위를 위해 디씨미씨맘과 사사세워싱턴이 마음을 합하여 제작한
이 영정사진이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는데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