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태어난 어떠한 생명이든 끝을 맺는다
결국엔 생명을 다하고 죽는다는 얘기다.
<인생 수업>은 마지막까지 행복을 추구하는 삶의 자세를 배우는 책이었다면
<상실 수업>은 나의 일부분인 가족의 죽음으로 인해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삶의 큰 위로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위로가 될 수 있는 책. 그게 바로 상실 수업이다.
- 상실이 주는 것
누구든 살아가면서 많은 상실을 경험하지만 사랑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공허감과 깊은 슬픔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다. 당신의 세계는 그대로 멈춰버린다. 사랑한 이가 죽은 정확한 시각을 또는 그 소식을 접한 순간을 그대로 기억한다. 그것은 마음 깊이 새겨진다. 당신의 세계는 무력함과 환상으로 점령당한다. 마음의 시계는 이미 멈춰 있는데 세상의 시계는 여전히 앞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낯설게만 느껴진다. 삶은 계속되지만 정작 왜 그렇게 흘러가야만 하는지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다. 사랑한 이가 더 이상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낯선 삶이 펼쳐진다. 누구의 말도 당신의 기분을 좋게 만들 수 없다. 어떻게 살아갈지 또는 스스로가 삶을 원하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단지 숨만 쉬며 살아가는 것이다. - <상실 수업> 54페이지 중 |
상실이란 이렇다.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처럼(본문의 내용과는 반대의 입장이지만) 큰 변화 앞에서 세상과 나 자신간의 이질감이 덮쳐오는 것. 이것이 상실과의 첫 대면일 것이다. 무엇을 해도 즐겁지 못하며 오롯이 잃어버린 것에 대한 슬픔에 젖어드는 일이 상실을 맞는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그만큼 상실감이 크면 클수록 이러한 슬픔은 더욱 커질 것이고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과 셀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아쉬움의 파도 속에 잠기게 될 것이다.
- 상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라
슬픔에 잠긴 당신을 위로하고 지켜주는 것은 무엇이든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그 경험을 의심하면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주요 핵심을 놓친 것이며 선물을 놓친 것과 같다. - <상실 수업> 91 페이지 중 |
저자는 크게 슬퍼해도 되고, 떠나간 사람이 나 혹은 가족을 위해서 했던 일들을 안하거나,부적합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이유로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구를 부정하는 일은 옳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슬픔을 위로하고 지켜줄 수 있는, 상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좋다는 것이다. 사진이나 기억에 남는 물건을 통해서 그 사람과의 추억을 되살려보기도 하고, 생전에 가장 하고 싶었던 것 혹은 희망사항이었던 것들을 대신해준다거나 앨범이나 글을 통해서 떠나간 사람의 모습을 정리하기도 하는 그런 시간을 갖음으로서 자신을 혹은 떠나간 사람을 향한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는 과정을 겪어보라는 것이다.
- 누가 뭐라든 상실된 마음을 억제하려 하지 마라
지금의 우리는 죽음을 부인하고, 슬픔을 사라지게 하는 낯선 세계에 살고 있다. 미국에서 우리는 더 이상 잘 죽을 수 도 없고 잘 애도할 수도 없다. 이제 우리들은 낯선 사람들 틈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다만 한꺼번에 몰려온 몇 명의 방문자에게만 병실 출입이 허락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좀처럼 가족들이 함께 모이지 않는다. 만약 가족이 모인다면 병원에서는 교대로 방문하기를 강요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의사나 간호사에게서 듣는다. 심지어는 비상전화를 통해서이기도 해서 이따금은 주문배달 통보를 받았을 때 느끼는 감정과 다를 바 없다. (중략) 우리 사회는 생산성만을 중시하는 사회이다. 대부분 회사에서는 경조 휴가로 사흘에서 닷새를 준다. "필요한 만큼 시간을 쓰세요. 매우 힘든 시기죠"라고 말하는 곳은 거의 드물다. 직장에서는 보통 일 년에 한 번의 죽음만을 허락한다. 경조 휴가가 끝나면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 몸은 일터로 돌아왔을지라도 마음은 그럴 수 없다. 끝을 맺고 빨리 회복되길 강요받는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같은 기간 슬퍼하길 기대한다. - <상실 수업> 291-292페이지 중 |
근대 이전의 사회, 콕집어서 굳이 말하면 조선시대에는 부모가 죽으면 3년상을 치른다고 한다. 그 슬픔과 공허함을 이겨내는 데 긴 시간이 걸린다 하여 그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근현대의 세상은 슬픔을 애도하고 떠나보내는데 3일이라는 시간을 준다. 시간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생산성'만을 중시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3일만에 떠나보내는 일을 끝마치라는 것이다. 물론 지금 사회에서야 그것이 관례처럼 되어있기 때문에 뒤엎을 수도 없는 부분이지만, 과연 3일만에 모든 것이 정리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슬픔을 못잊는다고 다시 우리는 그 빌어먹을 '생산성'을 위해서 상실의 슬픔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린 사건을 기억에서 평생토록 지울 수 있을까?
내가 상실을 겪어보면서 느끼게 된 사고사 유족들에 대한 마음의 맥락을 아주 조금, 손톱의 때만큼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3일로 퉁쳐버리자는 사회의 관례에 휘둘리지는 말아야 한다.
이 사회에 살고 있는 한 '생산'을 하는 데에 있어서는 내려놔야할 시간도 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상실을 무시하거나 피하는 것은 안된다.
상실 그 자체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계속 이 삶을 살아갈 수 있기에...
상실을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상실을 대할 준비가 필요하다.
상실을 받아들이고 살아갈 준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