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강남 교수의 강의를 듣고 어떤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by 김원일 posted Aug 02, 2012 Likes 0 Replies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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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29 / 성령강림절 열 번째 주일

 

다시/위로부터 나야 한다니까!

요한 3:1-8

 

곽건용 목사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분

 

지난 주 사흘 동안 오강남 교수님을 모시고 새길교회와 함께 가진 신앙강좌는 매우 유익했습니다. 전에는 몰랐다가 이번에 새로 알게 된 내용도 많았고 확실치 않았는데 이번에 확실해진 내용도 많았으며 잘못 알고 있었다가 제대로 알게 된 내용도 많았습니다. 바쁜 이민생활을 하면서 사흘 동안 꾸준히 참석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여러분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한 만큼 보람도 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설교에서는 신앙강좌를 마치고 나서 종교에 대해서 정리해본 생각을 여러분과 나눠보겠습니다.

 

중동지역 한 구석에서 주전 4년경에 요셉과 마리아 부부의 아들로 예수라는 분이 태어났습니다. 예수의 고향 갈릴리는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는가?”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지역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의미 없는 변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변방에서 가난한 목수 집안에서 태어난 예수란 분이 인류 역사에 이토록 지속적이고도 강렬한 영향을 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를 추종한 제자들과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 자신도 그렇게 될 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됐습니다. 좋든 싫든 그분은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이 됐습니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없는 복잡한 얘기들이 많습니다. 주후 1-2세기의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통일된 교리나 신앙고백으로 묶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다양한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다양한 개성과 색깔을 가진 ‘모자이크’와도 같았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뭘 그렸는지 잘 보이지 않지만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면 뭘 그렸는지 알 수 있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 있는 모자이크 말입니다. 커다란 모자이크를 감상하면서 이 부분이 아름답다거나 저 부분이 맘에 든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이 부분은 빼야 한다거나 저 부분 때문에 그림 망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각 부분이 모두 모여서 아름다운 그림이 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도 그랬습니다. 거기에는 평생 어부로 살다가 예수의 제자가 된 일자무식인 베드로 같은 사람도 있었고 어려서부터 고급교육을 받아 히브리사상과 희랍사상에 능통한 바울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귀족 부인도 있었던 반면 창녀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이렇듯 다양한 배경과 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를 중심으로 모여서 공동체를 이뤘고 그 공동체가 급속도로 로마제국 판도에 퍼져나간 모습 말입니다. 저는 이를 ‘모자이크’라는 말로 표현했지만 당시 한 권력자는 똑같은 현상을 ‘전염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전염병이 퍼지듯 온 세상에 퍼지고 있다고 말입니다. 로마제국은 그리스도교의 급속한 확산을 저지할 수 없었습니다. 박해도 해봤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박해할수록 오히려 더 급속히 퍼져나갔으니 말입니다.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자살골

 

그런데 로마 권력자들 입장에서 보면 다행스런 일이 그리스도교 안에서 벌어졌습니다. 자기들끼리 다툼이 벌어진 것입니다. 서로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주장하며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은 나사렛 예수를 주님을 받아들인다는 점 외에는 지역과 문화의 차이 때문에 많은 점에서 서로 달랐는데 그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름’을 ‘그름’이 됐습니다. 여기서 소위 ‘정통신앙’(orthodox)과 ‘이단’(heretic)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가 이른바 정통신앙의 주장이었고 ‘왜 너만 옳고 나는 그르냐?’가 소위 이단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정통은 많은 경우에 옳기 때문이 아니라 힘이 있었기 때문에 정통이 됐고 이단은 그르기 때문이 아니라 힘이 없기 때문에 이단이 됐습니다. 그리스도교를 골칫거리로 여겼던 로마제국이 이 사태를 그냥 보고 있었을 리 없습니다. 이들은 한 편을 편듦으로써 의도적으로 분열을 가중시켰고 결국에는 그리스도교를 자기들 수중에 넣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공인을 받았고 국교가 되었습니다.

 

이때 이단으로 몰려 퇴출된 교인들 중에는 신앙에서 ‘깨달음’을 강조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 되겠지만 초대교회 신앙 그룹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고백과 신뢰를 강조했던 그룹이었고 둘째는 행위를 강조한 그룹이었으며 셋째는 ‘깨달음’을 강조한 그룹이었습니다. 첫째 그룹이 주류의 자리를 차지해서 정통이 됐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약성서 27권은 대부분 고백과 신뢰를 강조하는 책들입니다. 행위를 강조한 둘째 그룹은 비주류로 밀려나서 겨우 야고보서 정도만 살아남았습니다. 야고보서는 살아남긴 했지만 이후의 운명도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부르며 성경에서 빼버리고 싶어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깨달음을 강조하는 셋째 그룹은 완전히 퇴출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그룹의 사상과 신앙에 대해서 우리는 거의 알지 못했습니다. 1945년에 이집트 북부 ‘나그 하마디’(Nag Hammadi)라는 곳에서 초대 그리스도교 문서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지만 않았더라면 우리는 셋째 그룹이 존재했었는지조차 모를 뻔했습니다.

 

 

영을 통해 얻는 깨달음

 

이 정도의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본문 요한복음 3장을 읽어보겠습니다. 바리새인이며 산헤드린 의회원인 니고데모가 하루는 밤중에 예수께 와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같이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하시는 그런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마지막 문장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한글번역 성경이 예외 없이 ‘다시 나지 않으면’ 또는 ‘새로 나지 않으면’이라고 번역한 희랍어 ‘아노쎈’에는 ‘다시’라는 뜻과 함께 ‘위로부터’라는 뜻도 있습니다. 문법적으로는 둘 다 가능하므로 문맥에 따라서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한글성경은 모두 ‘다시’를 택해서 ‘다시 나지 않으면’ 또는 ‘새로 나지 않으면’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이른바 ‘거듭난 그리스도인’(born again Christian)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영어성경은 ‘위로부터’(from above)를 채택하여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성경 중에서 학문적으로 가장 권위 있다는 평가를 받는 NRSV(New Revised Standard Version)이 그 중 하나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난다’를 말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다시 난다’는 말을 반드시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온다.’는 뜻으로만 듣지는 않아도 되는데 그는 그렇게 듣고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했습니다. ‘다시’라는 말도 얼마든지 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너희는 다시(또는 ‘위로부터’ 아노쎈)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예수께서 마지막에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아노쎈’은 ‘다시’라고 번역하는 것보다는 ‘위로부터’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문제는 어떻게 ‘번역’하는가 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달려있지만 말입니다.

 

니고데모는 확실히 예수님 말씀을 잘못 알아들었습니다. 니고데모가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가겠냐고 말한 데 대해서 예수님이 “육으로 난 것을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라고 동문서답을 하신 데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가는 일은 일어날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육에 관한 얘기일 뿐, 영의 일과는 무관하다는 말씀이지요. 여기서 ‘위로부터 난다’라는 말은 곧 ‘영으로 난다’라는 뜻이고 이를 현대어로 번역하면 곧 깨달음에 이른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곧 깨달음에 이른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를 본다는 말씀입니다.

 

 

개인적인 깨달음과 사회적인 깨달음

 

‘깨달음’ 하면 불교, 특히 선불교가 떠오릅니다. 깨달음이 선불교의 전유물이 아닌데도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깨달음은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순간적으로 전광석화처럼 얻어지는 것이며 그래서 설명할 수 없이 신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극소수의 사람만이 깨달음에 이른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저는 깨달음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깨달음이란 것을 그렇게 신비화해서 소수만이 얻는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은 극소수의 사람들만 도달할 수 있는 높은 경지도 아니고 한 순간에 전광석화처럼 벌어지는 ‘사건’도 아닙니다. 오히려 평생을 두고 추구해야 할 지속적인 ‘과정’이지요. 종교의 길은 결국 깨달음의 길입니다. 큰 깨달음을 향한 길이면서 동시에 여러 작은 깨달음을 얻는 과정입니다.

 

저는 깨달음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하나이지만 편의상 둘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개인적인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홀로 명상하고 기도하고 수련하고 실천함으로써 얻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 깨달음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생명을 향해 자비심을 느끼고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깨달음입니다. 편의상 나눠서 말했지만 사실 이 둘을 뗄 수 없는 하나의 깨달음입니다.

 

제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저는 40여 년 동안 신앙생활하면서 때로는 앞으로 나아가기도 했고 뒤로 물러서기도 했습니다. 위로 올라간 적도 있고 아래로 추락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시간 안에서의 모든 경험이 크고 작은 깨달음이었다고 생각하고 감사합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그리스도교에서 깨달음은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영의 인도를 받아 깨달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물론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영이 모든 것을 대신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나 혼자서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성령이 인도해주신다고 믿습니다. 물론 모든 것을 성령에 의존하지는 않지만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성령께서 인도해주신다고 믿지요.

 

과거에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고 믿고 ‘이젠 죽어도 좋다!’고까지 생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체험도 했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경험들이, 전진했다 후퇴했다 하는 경험들이 저를 지금 정도의 깨달음으로 이끌어줬습니다. 물론 아직 멀었습니다. 당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서도 가슴이 터지지 않고 멀쩡한 것을 보면 아직 개인적인 깨달음에 있어서도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아직까지 인생의 절반 정도를 살았을 뿐이니 앞으로 절반을 사는 동안 더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겠지 하는 기대를 갖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다시(또는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은 ‘다시’로 이해하든 ‘위로부터’라고 이해하든 좌우간 ‘깨달음’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개인적인 차원과 사회적인 차원을 모두 아우르는 깊은 신앙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개인적인 깨달음이 깊어질수록 사회적인 눈이 열린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깨달음을 커질수록 개인적인 깨달음의 깊이도 깊어질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신앙은 깨달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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