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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현필의 스승 이세종 선생(호세아를 닮은 성자 이세종)

이세종은 예수 믿기 전, 나이 40세 되기까지 남의 집 머슴살이로 살면서 푼푼이 모은 재산으로 논밭을 사서 부자가 되었다. 나이 40세에 예수를 믿게 되면서 너무도 기뻐서 매일 밤낮으로 성경연구와 암송으로 세월을 보내고 집집에 전도하는 일을 힘썼다. 그가 성경을 공부하고 있을 때에는 아무리 반가운 손님이 찾아와도 인사도 받지 않았다. 성경 공부를 다 마친 뒤에야 인사를 했고, 식사도 공부가 다 끝난 뒤에야 들었다. 예수를 믿고는 모든 일을 성경 말씀대로 실천했다. 자기에게 빛을 진 마을 사람들을 다 불러다 모조리 탕감해 주고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빚 문서를 불 질러 버렸다. 또 자기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조리 나눠주고 부부는 깊은 산중에 들어가 쑥을 뜯어 밀가루에 반죽해 먹으면서 여생을 보냈다.

 

이세종의 자비심은 금수. 곤충. 초목까지 아꼈다. 자기 발밑에 개미가 밟혀 죽는 것을 보고는 서서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이세종의 말년에는 산중에 움막집을 지었다. 겨우 사람 하나 누울 정도의 것이었다. 방문은 성경대로 아주 기어 들어갈 정도로 작았고, 세상 떠날 때는 제자들에게 사다리를 만들게 하여 그 위에 누워 그대로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 곁에서 울고 있는 아내 보고는 “울음을 그치시오. 내가 예수님을 따라 가는데 울어서야 되겠소!” 하면서 “올라간다. 올라간다. 올라간다.” 세 마디소리를 크게 질렀다.

 

이현필이 신앙생활에 나선 시기는 8.15해방 10년 전이 되는 22세 때로 잡는데 그가 예수는 믿었지만 그의 생애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전남 화순군 도암의 성자로 불리는 이세종을 만난 뒤 부터였다. 그가 예수를 믿고 다도면에 유일한 방산교회에 다니고 있던 때, 인접 이웃 도암면 등광리 뒷산인 천태산 기슭에 산당을 짓고 도를 닦으면서, 가끔 방산교회를 드나드는 이세종을 만나게 되었다. 이세종은 도인이어서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신앙이 되어선 못쓴다.” 고 늘 가르쳤다. 그는 기도하는 중에 “도인은 화려해선 안 된다.”는 영음을 세 번이나 들었다고 한다.

 

이세종을 보통 이공(李空)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빈 껍질이라는 의미의 이공(李空) 이라는 말이다. 사실 그는 세상을 완전히 버리고 재산은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아무것도 없는 빈 털털이였다. 밥도 땅바닥에다 놓고 먹고 살았다. 또 살생을 하지 않고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부르며 부부가 남매같이 살았고 일본 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깊은 산중에 숨어 살았다. 그는 성경 외에 다른 책을 절대 읽지 않았다. 남의 집에서 명절 음식이나 제사지낸 것을 보내오면 먹지 않았고 육식을 금하고 남의 집에서 자지 않았다.

 

그의 산당은 등광리 마을에서 가까운 곳인데 사방에서 모여온 젊은 처녀 총각들이 그의 제자가 되어 날마다 이공을 찾아가 성경을 배우고 있었는데 이현필도 그 무렵 이속에 끼었다. 이공의 성경공부는 영해 방법이었고 한 구절 한 구절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담화식 이었다. 이때에 모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성경을 토론한 사람들은 광주에서 찾아오는 최흥종, 강순명, 목사들과 홍종우 장로, 백영흠 전도사들과 임완식 오복희 전도사 이현필 등이 있었다.

 

이공과 이현필의 연령 차이는 30년 차이다. 이현필이 이 세종을 만나 처음 대립한 논쟁 중심 문제는 이공의 순결 사상이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육신으로도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고, 결혼생활까지도 금해야 한다는 사상이었다. 이공의 순결사상은 그대로 이현필에게도 전수되었다. 이런 영향으로 광주 ymca 안에는 강순명 목사를 중심으로 10여명이 주요멤버가 되어 ‘독신 전도단’ 이란 것이 조직되기도 했는데, 그 멤버들은 강순명, 이준묵, 차 남진, 운 남하, 고영노, 박철웅 등이었다. 이와 같은 독신 전도단은 원래 전주 배은희 목사가 시작했고 강순명 목사는 그 연줄로 광주에서 이 운동을 일으켰을 뿐이다.

 

이현필이 예수를 믿고 등광리 이공(李空, 이 세종)을 찾아다니며 성경을 배울 때 부친은 아들을 보고 미치광이를 찾아다닌다고 꾸짖었다. 이현필이 차차 나이가 들어 성년이 되어가면서 다도면 면서기 시험에 그 형님과 함께 합격을 했으나 이현필은 그만 두고 형은 다도면 면장까지 지냈다. 21세 때 이현필은 광주재매교회 전도사 일을 보기도 했고, 틈틈이 영어공부를 하다가 한때는 서울에 상경하여 ymca에서 영어공부를 하기는 했다. 그때 서울에서 만난 원경선하고 평생 친구로 사귀었다. 그가 서울에 있는 동안 아현동 굴레방 다리 근처에서 특이한 목회를 하던 소위 기둥교회 누더기 교회(아현교회)의 김현봉 목사를 만났다.

 

이현필은 스승 이세종을 배신하듯 23세 때 결혼 하고야 말았다. 아내는 황종원 씨로 광주의 좋은 가문의 딸이었다. 그러나 아내와의 동거 2년도 채 못 되어 자기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싸우다가 아내를 보고 부부로 말고 남매로 살자고 요구했다. 그 다음 부터 아내를 보고 매씨라 불렀다. 그런데 그의 스승 이세종 역시 그런 전력을 가지고 있다. 이세종은 어린 아내가 두 번이나 자기를 버리고 딴 남자에게 시집을 갈 때 아내의 살림 도구를 지게에 지고 따라가 날라다 준 분이다. 그 아내가 다시 돌아오니 곧 받아 주고 남매 사이로 살았다.

 

그러나 이현필의 부인은 남편을 놓지 않으려고 몹시도 애를 많이 썼으나 끝내는 한동안 여순경 노릇을 하다가 다른데로 개가해 소생 없이 살았고, 비록 개가는 했으나 이현필의 인격만은 존경하고 그를 변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순결 사상은 본래 이공(이 세종)의 사상이었다.

 

이세종의 문하생인 이현필 나이 30세 전후 주로 산에 은거 하면서 금식. 명상생활을 일삼았다. 그러던 중에 남원에서 몇 십리 들어가 있는 서리내골 이라는 산중에서 십여 명의 소년 소녀들을 모아놓고 성경을 가르치며 훈련 시켰다. 일종의 수도생활이다. 이곳 서리내란 선인래(仙人來)에서 나온 듯하다. 지금도 이곳에는 화전민들이 여러 세대 살고 있지만 이곳은 이현필 운동의 발상지이다.

 

해방 이듬해(1946년 이현필의 나이 33세) 그때부터 이현필은 특별한 소명을 느껴 아직 10대의 나이 어린 소년 소녀들을 거느리고 서리내로 데리고 들어와 수도를 시켰다. 이들은 대부분 이현필에 감동되어 부모님들의 집을 나온 젊은이들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현필을 따라 다닌다고 집에서 쫏겨난 자 들이다. 그들은 성경을 배우고 찬송을 부르면서 훈련을 받았다. 한번 훈련기간은 15일 이었다. 보름 훈련하고 쉬었다가 또 보름을 훈련했다. 그들은 숙식을 하기 위해 이곳에 움막을 지었다. 이곳에서의 음식은 쌀가루에다가 물을 타서 생식을 했다. 그것조차도 며칠씩 굶고 지냈다. 소녀들도 하루에 한 끼씩 먹었고 주로 풀뿌리와 쑥이 주식이었고, 신발은 짚신을 삼아 신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생활을 하며 초기 수도를 했던 사람은 소녀 7명이었다.

 

서리내 앞산을 타고 남원읍 쪽으로 20리나 내려 오노라면 갈보리라고 불리는 동산이 있다. 이 갈보리는 본래 이현필을 따라나선 김금남양 모녀의 숙부 되는 분의 농장이었다. 숙부는 초등학교 교장이면서 이곳에 농장을 장만하고 그 안에 저수지를 파고, 밤나무, 감나무, 대나무 등을 울창하게 심고 논을 만들고 아늑한 한편 구석에 농막 한 채를 지어 놓았다.

 

김금남 모친이 먼저 이현필을 따라 나서고 그 후에 김금남 양이 반대를 무릅쓰고 이곳에 와 있으면서 100일 기도를 하고 지내던 집이다. 이런 연고로 이현필이 이곳을 드나들면서부터 이곳은 서리내와 함께 이현필 운동의 발상지였다. 이현필 운동의 초기에는 김금남 양 일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김금남 양의 모친인 강남순 씨를 ‘갈보리 어머니’라고 불렀다.

 

이현필의 타고난 성격에는 남보다 독특한 점이 많았다. 제자들은 그의 눈물을 잘 볼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타고난 천재보다 꾸준하고 피나는 노력이 그의 인격을 이루었다. 자기완성은 그의 일생의 목표였다. 옳다는 일에는 지체 않고 곧 실천하는 불타는 사나이, 신앙적인 정열의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인격의 진동력이 있었다. 말이 적은 분이었으나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놀라운 감화력이 있었다. 그의 감화력 때문에 그를 한두 번 대한 남녀는 주저 없이 부모도 남편도 아내도 재산도 착착 버리고 그의 운동에 뛰어 들었다. 그는 선풍적인 존재였다. 그가 성경을 가르칠 때에는 앉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어도 그 말 한마디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고 깊은 감동을 일으키는 신비스런 힘이 있었다. 성경을 강의할 때에는 숨소리도 죽여야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낮은 소리로 말을 하다가도 힘이 나면 벌떡 일어서서 정열적으로 간곡하게 말했다. 누구나 그의 이야기를 한번 들은 이는 그를 못 잊었다.

 

한동안 기성교회에서는 이현필 운동자들을 ‘산중파’라고 불렀고, ‘이단’ 이라고 선전했다. “그들은 결혼하지 않고 가정을 파괴하고 재산을 거의다 바치고 이나 빈대를 잡아서는 죽이지 않고 성냥갑에 담아 물에 떠내려 보낸다. 길을 가다가 아이들이 도랑에서 물고기 잡는 것을 보면 돈을 주어 그 고기를 사서는 도로 물에 방생한다. 빌어먹고 다니고 그들은 찬송도 부르지 않고 기성교회 예배에 참석하지도 않는다.” 고 악평을 했다.

 

이현필의 일행이 해남에 처음으로 전도대로 나갔을 때는 머리를 삭발하고 헌 바지저고리에 배낭을 짊어지고 손에 깡통을 들고 맨발벗고 갔었다. 그래도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과 믿는 군수 부인 등이 나와 천사처럼 그들을 영접했다. 그는 멸시와 존경을 아울러 받았다. 이현필은 늘 하는 대로 거리 가운데로 지날 때는 신을 신고 그 거리 밖을 벗어나서는 신을 아끼느라고 벗어들고 맨발로 걸었다. 스승의 뒤를 따르는 두 자매들도 스승이 하는 대로 추운 겨울날 이지만 신을 벗어 들고 걸었다.

 

벽제 수녀원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준비해둔 관 한 개가 있어 이현필이 운명하면 사용하려고 했었는데 이현필은 유언하면서 자기 시신에 관을 쓰지 말라 하고 자기는 죄인이니까 거적때기에 싸서 내다 파묻으라고 했다. 무덤은 평토장으로 하라면서 죄인의 시체니까 아무도 모르게 하고 아무나 함부로 밟고 다니게 하라고 했다.

 

필경은 임종이 왔다. 안타까이 지켜보고 있는 제자들 보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제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시오!”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때가 1964년 3월17일 새벽 3시 정각이었다. 그 전날 예고한 바로 그 시간이었다. 그 때 이현필의 나이 53세였다.

 

- 이세종이 자기 후계자 격으로 두 사람을 지목했는데 하나는 남자로 이현필이요 또 하나는 여자로 수레기 어머니였다. 그의 본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가 살던 고향 이름을 따라서 수레기라 불렀다. 그는 이 세종 의 교훈을 몹시사모했고, 부지런하기로 유명했으며, 그의 신앙은 아주 개방적인 것 같으면서도 고지식한데 가 있다.

 

6. 25때 피난 다니다가 실수하여 다리가 부러졌지만 헝겊으로 그냥 되는대로 잡아매고 다녔기 때문에 그대로 뼈가 굳어 버렸다. 이세종이 세상을 떠나고 이현필을 그대로 따랐는데 정한나 집사와 정귀주씨와 함께 동광원의 3 여걸이다.

 

남의 본이 되고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던 수레기 어머니는 나주시 방산 뒤로 흐르는 강물에 빠져 죽었다. 강을 건너는 돌 징검다리를 장마 뒤에 건너다가 급한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이때 찾은 시체는 상처가 없었으나 1970년 아들 사무엘에 의해 동광원 농장 옆에 매장됐다.

 

- 서울 종로 ymca 의 총무로 활약하던 현동완 선생은, 유영모 선생을 몹시 존경하며 서로 손잡고 마치 다정한 애인들처럼 서로 따라 다녔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의견차이로 격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현총무는 유영모 선생에게 공자 맹자 소리보다 성경을 더 읽으라고 하며 성경을 연구해서 강해하라고 우정 있는 솔직한 충고를 했다.

 

현동완 총무와 같은 그룹의 사람으로 전남 장성군 소록리에 사는 신공이란 분은 자기가 살아온 날수를 매일 계수해 가는 습관이 있었는데 유영모 선생도 어느 해 어느달 며칟날을 쓰지 않고 자기가 살아온 총달수만을 총 계산해 갔다. 현동환도 그러했다. 시편 90편 12절에 “우리에게 우리 날수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하신대로였다. 현동완 총무가 유영모와 함께 광주에 와서 처음으로 이현필을 만나 그 소감을 말하기를 “한국에 인물이 없는 줄 알았더니 광주에 와서 보니 반쪽이 있었구나!” 고 독특한 풍자로 말했다. 유영모를 처음으로 동광원에 소개한 분은 현동완 총무였다.

 

- 유영모 와 이현필 그리고 동광원과의 관계는 꾸준히 계속된 오랜 관계였다. 유영모는 정주 오산학교 교장이었고 유명한 한학자요, 많은 제자를 가지고 있고 그의 사상을 본받은 사람들이 많다. 함석헌도 유영모의 제자다. 유영모는 16세때 입교하여 그때 산 성경책을 70년 가까이 종이 한 장 떨어지지 않은 채 간직하고 있다.

 

본래는 하루 두 번 식사하다가 1952년 2월 14일부터 하루 한끼씩을 먹었다. 일식주의자로 수십년간 하루 한끼씩 먹되 저녁때에 먹고 어디를 가나 두발로 걸어 다녔는데 고집이 대단하여 삼각산 자택에서 서울 종로까지 늘 걸어 다녔다.

 

동광원이 해마다 총회로 모일 때면 유영모가 와서 강의를 했는데 그 강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공자 석가를 높이는 일이나, 기성교인들 처럼 기도하지 않는다는 점 등으로 그는 전통적 기독교 신앙이 못된다고 평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사상이 깊어 이해가 어려워서 “선생들이나 모아 놓고 할 강의다” 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이현필은 유영모를 평하기를 “한마디 피투성이다.” 고 했다. 유영모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이현필 이였다. 동정 사상(童貞. 純潔)에 있어서도 유영모의 주장은 이현필에게 만족했다. 이현필이 존경한 사람은 현동완. 김상돈. 등 여러분이 있으나 그중에서도 유영모를 가장 존경했다. 나이 80이 넘은 몸으로 유영모는 이현필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광주에서의 동광원 모임에 내려와 청년같이 유쾌하며 씩씩하게 종일 꿋꿋이 앉아 가르쳤다

- 강순명 목사가 광주 ymca 안에서 『독신 전도단』이란 것을 조직하고 특별한 이상 밑에 청년들을 지도할 때 그 단원으로 강 목사의 지도를 받던 분들 중에는 이준묵, 차남진, 윤남하, 고영노, 박철웅, 이현필도 끼어 있었다. 강순명 목사와 이현필 선생 사이는 “하라! 그랬네!” 하는 사제지간의 사이였다. 이현필은 강 목사에게 성경을 공부했다. 강순명 목사는 마음이 착하고 자비한 분이었고 바로 살아보려는 이상주의자였다. 성자 타입의 인물이다.

 

1939년에서 1942년까지 일제 말에는 강순명, 정진철(후에 목사) 여자 두명등 5, 6명이 소위 「칼갈이 대」를 조직해 가지고 전국으로 전도를 다니며 집집으로 “면도칼 갈으시오” 라고 소리치고 다녀 칼을 갈아서 번 돈으로 구제사업을 했다. 이뿐 아니라 거리 청소, 남의 집 변소 청소 등을 하였다. 임종할 때 머리맡에 우는 딸을 보고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를 위해 울라”고 타이르면서 숨을 거두었다.

 

- 정인세가 이현필을 알게 된 것은 8.15 해방 전부터이다. 정 선생의 나이 23세 때 한 체조 지도교사로 초청되어 광주 y에서 실수학교의 사감노릇을 하였을 때 독신전도단에서 만난 것이 처음이다. 정인세 총무는 신학교에도 다녔으나 정식으로 목사 안수는 받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한때 이곳 저곳 여러 교회를 목회하기도 하였으나 당시 목포에 있던 윤치호에 의해서 광주에 세워진 동광원이라는 고아원 원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부임전 정인세는 양복에 새파란 넥타이 매고 다니던 그가 넥타이도 양복도 벗어 버리고 삭발하고 과거의 모든 사진과 책까지도 모조리 태워 버렸다.

 

그는 내 자식이라 해서 남보다 더 특전을 베풀지 않았다. 더 뒷바라지 해주는 일도 없었고 더 공부시켜 주는 일도 없었다. 똑같이 다루었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원장님’ 이라고 불렀다

 

이현필 운동이 한창 불타던 때 광주 지산동 집회소에서는 40일 동안이나 십자가의 사랑과 겸손에 대하여 성경을 들고 목이 쉬도록 가르쳤는데 그때 福音三德을 가르쳤다. 삼덕이란 순결, 청빈, 순명이다. 순결은 생명과 같다고 가르치고 나 하나의 인격 완성이 가장 귀한 것이요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순결, 청빈, 순명의 수도가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이현필의 고신극기(苦身克己), 그의 기도등 특이한 생활은 남들이 도저히 다를 수 없었고 그분의 말씀은 하루 종일 한 이야기를 녹음 한다 해도 모조리 성경 중심 설교요, 사람들의 영혼을 끄는 힘이 있었다. 그래도 그는 누구를 명령해서 무슨 일을 시키는 일이 없었다. 혹시 책망하는 일은 있어도 대개 겸손하게 대했다. 그러나 그가 제자들에게 정신을 넣어 주려고 교육과 훈련을 시킬 때에는 엄격하고 철저했다. 자주독립정신, 청빈과 검소한 생활을 훈련 시킬 때에는 “비누를 쓰지 말고 아궁이 잿물로 빨래하고 털옷을 입지말자. 자기 입을 옷은 자기가 손수 베를 짜 입자.” 하며 그는 일생동안 모직물은 입지 않고 살았으며 홈스펀 짜는 기계를 사서 굵은 무명베를 짜게 하기도 했다.

 

이현필 자신은 일식주의 이었다. 여러 해를 하루 한 끼만 먹되 꼭 저녁때만 먹었다. 주로 금식으로 지내는 때가 많고, 며칠에 한번씩 미숫가루로 때우는 때가 많았으며, 생식으로 오이, 살 가루, 물로 끼니를 때웠다. 이현필의 유언이라고도 말하는 ‘한 숟갈 덜 먹기 운동’은 ① 밥 한 끼에 1원 모아서 불쌍한 형제들을 도웁시다(이것을 한달 계산하여 회비로 월 60원에서 최하 월 30원 모으는 운동). ② 내 몸이 세상 떠날 때 장례비로 1원도 들이지 말고 속옷 내복 한 벌만 입혀서 조용히 묻어 주시오 이것은 그의 유언이었고 그가 계명 산에서 세상 떠날 때 그렇게 했다.)

 

고아들을 위한 동광 원을 시작한지 1년쯤 지났을 무렵 한번은 y총무로 있으면서 동광은 운영을 맡고 있는 정인세 총무가 벙어리 도를 닦고 있는 이현필의 산막을 찾았다. 고요한 호롱불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종이에 필담을 나누었다. 이현필은 금식기도 중에 무슨 생각이 있었던지 종이에다 귀일원(歸一院)이라고 썼다. 그리고 정인세에게 필담으로 권하기를 “곧 나가셔서 광주 역전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따뜻하게 대접하여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을 하시오 이 운동은 동광원 운동이 아닙니다. 귀일원입니다. 동광원 사람만 말고 누구나 역에 나가 비참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보고는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입니다. 그리고 곧 시행 하십시오.” 이렇게 해서 귀일원 운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여순 반란의 피는 이미 이 땅의 남단을 붉게 물들이고 앞으로 곧 얼마 뒤에 6.25 난리가 또 북녘으로부터 터지려고 하던 그 역사적인 순간을 이현필은 벙어리 수도를 하면서 구일원에 대한 구상이 태동하고 있었다. 환난이 온다. 올데 갈데없는 사람들 단 하룻밤도 함께 지내줄 이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하겠다. 의지 없는 그들을 구원하라는 신의 계시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것이 ‘하룻밤 재워 보내기 운동’ 이었고, 후에 이현필 만년에 일으킨 일작(一勺)운동의 구상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일작 운동」은 이현필이 1964년에 세상 떠나던 해에 마지막 길로 서울 계명 산으로 가면서 그의 제자들과 마지막 총회 때에 제안한 운동이다. 그것은 모두가 매일 밥 지을 때 자기 먹을 몫에서 한 숟가락씩 떠서 모으자는 운동이다. 이렇게 실시해서 30명이 밥 한상이 되고 300명, 3천명으로 늘어나면 학교도 되고 병원도 되고 비행기가 된다. 그렇게만 되면 자주 국가가 되고 세계는 평화가 온다. 누구나 마음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간단한 선행, 소자에게 물 한잔 떠주는 일 같은 선행. “일작씩 거둬 귀일원에 !” “의지 없는 이 하룻밤씩 재워 보내자!” 돈으로 「십 원 운동」 누구나 돈쓸때 십 원 덜 쓰고 그것을 모아 불행한 겨레들을 재워 보내고 돕자고 했다.

 

동광원이 생긴 것은 6.25 반년전 여순사건 직후 광주에서 생겼다. 여순 사건은 쇼크가 컸고 피해가 심해서 부모 잃은 고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때 목포에서 고아원을 크게 하고 있던 윤치호씨가 광주 ymca로 정인세 총무를 찾아와서 “정총무 이러고 있을 때요? 지금 고아들이 자꾸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 ” 그래서 윤치호 씨와 정인세 총무의 주동으로 광주를 중심해서 저명인사 70명이나 회집하여 대책을 의논하고 발기 위원회를 조직하여 고아원 운동을 벌였는데 이름을 동광원이라 지었다.

 

한편 이현필이 화학산 소반바위 밑에서 벙어리 수도를 하면서 기도 중에 받은 그의 새 운동의 이름은 『귀일원(歸一院)』이었다. 『동광원』과 『구일원』은 한 단체 이면서 두 가지 이름이다. 지금도 공식 이름은 『구일원』이다. 정인세 총무가 원장이된 고아사업 『동광원』 운동을 이현필과 손잡고 했고 실제 『동광원』 안의 모든 책임이나 실무 활동은 이현필을 따르는 그의 제자들이 나서서 해왔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동광원』 이라면 곧 이현필의 운동 단체로 알고 있다. 정인세와 이현필은 절친한 런닝 메이트로서 좋은 콤비였다. 그러니 『귀일원』이 곧『동광원』이고 『동광원』이 『귀일원』이다.

 

『동광원』은 처음에는 고아사업을 위해 시작된 단체이었지만 이렇게 어느새 수도 단체로 변해 버렸고 지금은 고아사업은 그만두고 순수 수도단체로 나간다. 현재(1990년) 동광원에서 수도하는 식구들은 전국에 이백명 가량이 된다. 광주 방림에 본원을 두고 분원은 전남의 곡성, 함평, 진도, 도암, 전북에 남원, 전주, 광주자매, 무등산 등지에 크고 작은 그 단체가 있고 경기도 능곡과 벽제 계명 산, 갈월에도 있다. 혹은 십여 명, 혹은 수십 명씩 모여 살며 관상수도 보다도 노동 수도를 주력하며 자급자족하는 농사에 힘쓰고 있다. 그들은 누구의 원조도 받지 않는다. 자활 생계를 철저히 세우고 있다.

 

이현필 운동이 확대되면서 기성 기독교 안에서는 이해나 동정보다 냉대를 받았다. 그들은 기성교회 예배에는 출석하지 않고 금욕주의적 이어서 엄격한 독신생활로 동정을 지키며 가정생활을 죄악시 하여 동광원으로 들어가는 이들은 가정생활이 파괴되며 거지같이 옷을 허술히 입고 맨발 벗고 걸식 탁발도 하고 산중에 살기가 일쑤이고 해서 이 운동 초기에는 ‘산 중파’, ‘금욕주의자’, ‘이현필 파’ 라 불러 지방교회나 노회목사들은 이단자들 같이 여겼다.

 

이현필을 따르던 여자들 중에는 훌륭한 분들이 여럿이 있었다. 정한나 같은 분은 이현필이 세상을 떠난 뒤 이현필의 정신을 따라 수녀들을 지도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젊어서 지금까지 일생을 운동에 바친 정한나. 정규주 등은 보래 기성교회에서 열심히 다니던 교인들이었으나 이공(이 세종)의 제자 박 모 씨를 따르다가 이현필을 비난하는 말을 듣고 불만스러워 이현필을 찾아 만나 보고 그만 감화를 받아 그 제자가 된 사람들이다.

 

정한나 집사는 그 후 경기도 능곡에 가 있다가 1957년 서울 y의 현동완 총무의 이야기와 이현필의 암시를 받고 혼자 경기도 벽제군 계명 산 앵무봉 밑에 있는 현총무 수양관이 있는 산중으로 분원을 개척하러 들어갔다. 이것이 후에 벽제 수녀의 마을이다. 이현필은 제자들을 훈련시킬 때 말보다 실천을 통해 진리를 배우게 했다. 정한나를 비롯해서 현재도 이 단체를 이끌어 가는 유능한 지도자들은 몸소 실천하는 데서 그 경험을 통해서 자신을 얻었다.

 

전남 함평에도 만여 평의 농장이 있고, 진도 섬에도 만여 평 넓은 논밭이 있고 그밖에 경기도 벽제 계명 산, 나주시 다도면 중촌 등지에 동광원 수녀들은 흩어져 살며 묵묵히 땅을 판다. 지금도 그들은 효소법 개량농사를 실시하여 농약을 안 쓰고 수확을 올리고 있다.

 

경기도 벽제군 계명산 분원에는 홈스펀 짜는 베틀을 여러 대 두고 수녀중 일부는 지계를 지고 뒷산에 올라가 나무하고 더러는 베를 짜서 굵은 무명베를 서울에 가져다가 팔았다. 이 베를 사서 옷을 해 입은 이들은 서울에서도 검소하기로 소문난 김현봉 목사의 아현교회 교인들이었다. 그 교인들은 모두 굵은 무명에 검은 물을 들여 옷을 해 입고 고무신을 신고 살았다. 동광원의 특색은 수녀들이 농사를 짓느라고 아주 힘든 노동을 하는 것이었다.

 

이현필은 말년에 후두결핵 병으로 무척 고생했다. 기침과 가래가 심하고 목이 아파서 말을 못했다. 과거에는 죽어도 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절대로 살생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위대한 점은 금욕 고행이나 뛰어난 선행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자기주장을 끝까지 고집하지 아니하고 대오 각성하고 솔직하게 자기 잘못을 고발한 점이다.

 

“제가 오늘 이대로 죽으면 저는 천국에서 예수님께는 역적 같은 놈이 되리라고 느낍니다. 그동안 제가 절대선행을 강조해 왔던 고로, 저를 따르는 이들을 온통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나는 위선자 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구원 얻을 사람이지 선행이나 금욕 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말은 이현필이 지금 신촌 거지굴 속에서 죽음을 앞에 놓고 누운 채 엄숙히 자기를 반성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부질없는 이현필관(觀)을 뒤집어엎는 것이었다.

사경을 헤매는 이현필은 기운이 극도로 쇠약해 있었다. 제자가 쓰레기통을 뒤져 굴비를 가져다가 머리맡에 놓았더니 그 국물을 입에 떠 넣어 달라고 했다. 그는 젊어서 지금까지 멸치 꼬랑지 한 마리도 입에 대어본 일이 없는 철저한 채식주의자, 금욕주의자요 옷에 이가 굴러도 d.d.t 약을 단 한번 사준 적이 있을 뿐이다. 수도사가 동정을 버리는 일과 고기를 먹는 일은 죄라고 까지 생각했던 그가 지금 고기를 먹으려고 하고 있다. 그는 지금 일부러 파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김한나라는 수녀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다가 이현필이 고기 국물을 마시는 것을 보고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는 조심스레 김준호 옆에 와서 “선생님이 지금 시험에 들었는지 모르니 고기국물을 절대로 넣어드려선 안 된다.”고 심각한 태도로 제지 시키려 했다. 그때 이현필은 “당신이 하나님이오?” 하며 책망을 했다. 정인세 총무가 오자 필담으로 “이 개 같은 것을 보려고 왔습니까? 원장님, 제가 고기를 먹었습니다. 동광원에서 나를 책벌해 주십시오.” 그는 자기 스스로 파계하고는 스스로 자기를 자조했다.

 

이와 같은 이현필의 파계를 두고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평했다. 어떤 이는 이현필이 이런 파계로 지금까지 쌓아온 자기의 공든 탑을 혁명 하노라 한 일은 그가 걸어온 반생의 주의 주장이 미완성극이라 평했다. 김준호는 “동광원의 타락은 악쓰고 고기 먹게 된 일이다.” 고 했다.

 

저녁 무렵, 해는 서산마루에 뉘엿거리는데 석양이 쓸쓸히 비추는 한그루 밤 나무 밑에 펴놓은 거적때기 위에 다죽은 송장같이 뻣뻣이 누운 이현필의 모습은 참혹한 모습이었다.

 

이제 와서는 스스로 그 자신이 평생 소중히 다듬고 지켜온 길마저 파게 한자,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부인하고 자기 자신 주의 주장마저 부인하고 이제는 제자들에게 마저 멸시받고 죽어가는 이현필이었다.

 

“나는 고기를 먹고 약을 썼으나 그러나 나는 고기 안 먹고 약을 쓰지 않는 사람을 존경한다. 그런 분들의 그런 신앙도 존경한다. 그러나 구원 얻는 것은 그런 것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얻는다. 약도 안 먹고 살생도 않는 사람들도 자기주의대로 그대로 안 먹어도 좋으나 먹는 사람도 안 먹는 사람도 서로 남의 인격과 신앙을 존경하라.”

 

고아들을 위한 동광이 시작한지 1년쯤 지났을 무렵, 한번은 y총무로 있으면서 동광은 운영을 맡고 있는 정인세 총무가 벙어리 도를 닦고 있는 이현필의 산막을 찾았다. 고요한 호롱불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종이에 필담을 나누었다. 이현필은 금식기도 중에 무슨 생각이 있었던지 종이에다 귀일원(歸一院)이라고 썼다. 그리고 정인세에게 필담으로 권하기를 “곧 나가셔서 광주 역전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따뜻하게 대접하여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을 하시오 이 운동은 동광원 운동이 아닙니다. 귀일원입니다. 동광원 사람만 말고 눅나 역에 나가 비참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보고는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입니다. 그리고 곧 시행 하십시오”이렇게 해서 귀일원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상에서 주목받는 유영모에 이어 이현필이 어떤 분인가를 살펴보았다. 그에게서 기성교회로 부터 비난받는 요소가 무엇인지도 다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 교역자들이 성공적인 목회를 통해서 대형교회를 꿈꾸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목적을 이루려는 태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도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꼭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마음자세 만은 우러러 봐야할 마음자세라고 여겨진다. 우리는 한번 생각해 보자! 만일 우리 자신이 죽는다면 위에 열거한 주목받는 인물들처럼 우리를 존경하고 유업을 기리며 따라줄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를 …

 

“오 기쁘다! 기쁘다! 오 기뻐! 오매 못 참겠네. 아이고 기뻐!”숨이 가라앉는 듯 하다가도 다시 돌아올 때마다 “이이고 기뻐! 오 기쁘다. 못 참겠네. 이 기쁨을 종로 네거리에라도 나가서 전하고 싶다.”고 외쳤다.환희의 물결이 터져 나온 것이다. 성령의 기쁨이.... 임종 수일 전부터 기쁨이 밀려와서 어쩔 줄 모르더니 이제 절정에 이른 것이다.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던 제자들에게 “먼저 갑니다. 다들 다음에 오시오!” 하며 고요히 눈을 감았다.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얼굴은 하늘을 향해 바라보면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때는 1964년 3월 18일 새벽 3시였다. 53세로 생을 마감한 성인 이현필선생의 임종시의 모습이었다. 마치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을 그린 성화의 모습이나 같았다고 한다.

 

맨발의 성자로 알려진 이현필은 1913년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권동리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3세 때 읍내에 있는 일본인 목사 관파(官波)에게 전도되어 복음을 접한 후, 1928년 광주농업실습학교 학생 때 강순명 목사를 통해 알게 된 도암의 ‘이세종’을 만나게 된다. 이현필은 남다르게 거룩한 삶을 동경하며 실천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그의 수제자가 되었고 이세종은 생전에 “내가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해봤지만 내말을 가장 빨리 이해하는 사람은 이현필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세종과 달리 이현필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수도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동고동락하며 제자들을 훈련했다. 이현필 선생을 가장 초기부터 따랐던 분으로 당시 남원 읍내에서 목공소를 하고 있던 오북환 집사였다. 오북환집사는 이현필을 만나 그 감화력에 동화되어 목공소를 내놓고 집회장소로 삼았다. 그는 일생 이현필을 본받아 하나님의 충직한 종으로서 동광원을 가꾸며 헌신했다.

 

이현필은 나이 30세 전후 홀로 산에 은거하면서 금식과 명상생활을 하였다. 화순의 화학산과 남원의 지리산에서 수년씩 홀로 기도생활을 했다. 산에 파묻혀 기도하였고, 특별히 소명을 받아 거룩한 삶을 사모하는 10여명의 소년 소녀들을 제자로 삼아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하였다. 남원에서 몇 십리 들어가는 서리내(仙人來)라는 곳과 그 앞산을 타고 내려오면 갈보리라는 동산이 있는데 이곳에서 제자들과 생활하면서 기도 및 경건생활과 노동 그리고 성경공부 등을 통해 제자훈련을 시켰다. 남원 지방의 독신 기독교인들 중에서 그를 존경하고 따르고자 산으로 모여든 것인데 이것이 동광원의 모체가 되었다. 어머니 강남순과 딸 김금남 두 모녀는 그때부터 이현필을 스승으로 모시고 따랐다. 그때 김금남은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진로문제를 놓고 날마다 고민했다. 그래서 교회에 들어가 열심히 기도하던 중에 “네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하는 신비한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진로문제를 놓고 갈보리에서 백일기도를 했는데 이 기도를 통해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수도생활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자나 깨나 산 제사를 드리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하던 중에 마음에 응답되기를 일생 동정을 지켜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길이라는 깨달음이 왔다는 것이다. 그때 교육은 보통 보름씩 산중에서 행해졌다. 그는 제자들에게 예수의 정신을 본받는 경건훈련을 진행할 때 매우 엄격하고 철저했다. 그는 또한 제자들에게 자주독립정신, 청빈과 검소 생활을 배우게 했다. 성경을 배워주고 겸손과 사랑의 실천, 그리고 양심훈련을 시켰다. 먹을 것이 없던 때라 주로 풀뿌리와 쑥을 먹었다고 한다. 그 자신 스스로가 짚신을 신었고 산중 길을 걸을 때는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으며, 단벌옷과 불을 때지 않는 차가운 방에서 지냈다. 청빈하고 가난하게 사셨던 예수의 삶을 본받고자 몸소 모범을 보인 것이다.

 

서래내는 남원 수지면에서 지리산을 등산하는 도중에 있는 경치가 뛰어난 곳인데 이현필은 그곳의 우거진 솔밭이나 갈대밭 속에 한 번 엎드리면 꿈적도 않고 일어날 줄 몰랐다고 한다. 산에 사는 까마귀가 송장인줄 알고 곁에 와서 ‘까악, 까악’ 하고 울다가 그래도 움직이지 않으니 부리로 쿡쿡 찔렀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화학산 기도 3년, 지리산 기도 4년을 통해 겸손과 자비와 청빈의 수도자인 성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닮아갔다.

 

이현필은 1948년에 훈련시킨 제자들과 함께 광주 YMCA로 가서 봉사했는데 이때 이들의 모습을 본 당시 YMCA 총무 정인세는 깊은 감동을 받아 바로 이현필을 따르게 되었다. 정인세는 말하기를 그가 만난 인물 중에서 이현필선생 만큼 그릇이 크고 깊은 인물은 없었으며 이현필선생의 그 깊은 속은 자기로서 도저히 측량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현필의 전기를 쓴 엄두섭 목사는 “보통 생각하기를 이현필 선생은 예수를 본받으려고 하신 분이고 하나님만 사모한 분이니 그것밖에는 다른 일은 관심이 없는 분인 줄 짐작하지만 그의 포부는 세계적으로 넓었고 애국심에 불탔으며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분”이라고 전한다.

 

이현필은 식사생활에 있어서 일식주의자였고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다. 하루 한 끼만 식사를 했는데 꼭 저녁에만 했다. 주로 금식으로 지내는 때도 많았다. 또한 그는 많은 신비적인 체험에 대해서는 일체 침묵하였고 꿈 이야기도 하지 않았으며 다만 성경을 가르쳤으며 하루 종일 하는 대화가 그대로 설교였다. 그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아끼는 자비심으로 빈대나 벼룩마저도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간혹 누가 아프다고 그이의 기도를 받고자 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신이 아니오.”하고 거절했다. 그리고 아프다는 이에게는 “아프게, 더 아프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오.” 하였다.

 

이세종으로부터 전수된 순결사상과 남녀유별에 대해서는 무서울 만큼 엄격했다. 이현필도 27세에 결혼을 했으나 그의 스승인 이세종 선생처럼 남매지간으로 지낼 것을 권유하고 실천했다. 후일 이현필 선생의 부인은 개가했다. 이러한 순결사상은 그를 따르는 결혼한 제자들에게는 참 견디기 힘든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현필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결단하여 순결생활을 지켰으며, 때로는 많은 사람이 남편과 집을 놔두고 아이들을 데리고 동광원에 들어와 산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이현필 선생이 한 번 지나가면 온 동내, 도시가 난리가 났다. 자신의 부인과 생이별하는 일이 벌어지거나 잠자리를 거부하는 일이 생기자 여러 곳에서 비난이 잦아졌다. 특히 전라남도 교회 목사들은 교인들이 대부분 빠져 나가 이현필을 따라 다니자 그를 ‘산중파’ ‘금욕주의자’라 비난하고 그를 이단시하였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그를 찾아와 대면한 목사들은 “이 길이다!”하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이분은 참 믿음의 사람이다. 참 사랑의 사람이다. 성경말씀대로 살면 이렇게 된다. 이런 것이 믿는 것이요 사랑이다.” 하고 감격했다.

 

여순반란사건 이전에는 주로 경기도 능곡을 중심으로 농사와 탁발훈련과 전도활동을 했다. 그리고 복음전도대로서 그들은 또한 남원 순천 여수 강진 해남 광주 등 남부지방을 돌며 탁발하고 전도활동을 펼쳤다. 해남교회에서 당시 청년 김준호는 의사를 지망하며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현필 선생을 만나 평생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 김준호는 당시 교회 내에서 살면서 손수 교회청소를 담당하고 혼자 기도하고 성경 보면서 공부하던 학생이었다. 하루는 그 교회 집사가 “우리 교회에 참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올 것이오. 그는 광주에 사는데 목수 일을 하고 시래기죽만 먹으면서 성경을 공부하고 사는데 항상 기쁨이 충만하여 종일 하나님만 찬양하는 사람이라오.”하고 말해주었다. 그때가 1946년 가을이었다. 강단의 책상 위에 국화를 꺾어다 화병에 놓고 예배를 준비했다. 트럭을 타고 두 분이 내려왔는데 모두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었고 한 분은 톱 망치 등 목수연장을 담은 걸망을 지고 내렸다. 이현필 선생과 오북환 집사라 했는데 맨발에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청년 김준호는 속으로 ‘저런 분이 어떻게 믿기에 잘 믿는 사람일까’ 하고 있었는데 이현필선생이 설교하러 책상 앞으로 나와 앉았다. 그런데 그가 책상 위 화병에 놓여있는 국화를 보고는 깜짝 놀라서 아주 슬프고 안타까운 음성으로 “어찌하여 이 꽃을 꺾었습니까? 꽃은 꺾지 마시고 피어있는 그대로 두고 보셔야 되는데...”하시며 한참을 말없이 슬픈 표정으로 그 꽃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 순간에 김준호는 이현필선생의 그 말씀과 그 모습을 통해 온 몸을 울리는 한없는 감동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애틋함과 온 우주를 껴안는 깊은 사랑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는 이현필을 스승으로 모시고 평생을 따르면서 스승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이현필은 제자를 사랑하여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라면 맨발로 30리 50리 산길을 달려갔다. 6.25때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미국인 유화례 선교사를 살리기 위해서 갖은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버스를 타거나 차를 탈 때면 언제나 제자들에게 가장 나중에 타자며 다른 사람들이 다 탄 후에야 차에 올랐다. 다른 사람들이 다 먼저 구원을 받은 후에 자기는 맨 마지막으로 구원의 방주에 올라타겠다는 철저한 이웃사랑이요 보살정신이었다.

 

이현필은 말년에 후두결핵으로 고생하였는데 생을 마감하기 전에 뜻하는 바가 있어 제자들에게 고깃국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평생 채식주의자였으며, 자신들에게도 채식주의를 가르친 스승의 말에 놀라면서도 임종이 가까운지라 말씀대로 생선국을 끓여 들였더니 겨우 두 숟갈을 넘겼다고 한다. 이것이 유명한 ‘파계’이다. 이현필은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참 믿음은 사라지고 이현필 자신이 걸어 왔던 삶을 율법적으로 좇지나 않을까 염려하였고 또 결핵을 앓고 있는 제자의 건강을 염려했던 것이다. 그는 또 제자들에게 선행위주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으로 가르쳤다.

 

이현필은 복음의 삼덕을 순결, 청빈, 순명으로 보았고 이를 위해 수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청빈’ 곧 가난에 대해 이해함에 있어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는 자족의 방법과 나눔을 통한 삶을 말했다. 그 실천적 장이 되었던 것이 바로 ‘동광원’이다. 동광원은 수도 공동체로서 본원은 남원에 있고 분원으로서 진도분원, 지지리 분원, 함평 분원, 도암 분원, 광주 귀일원 분원, 소화자매원, 전북 진달래의 집, 경기도 능곡과 벽제 계명산, 갈원 등지에서 그 제자들이 수도하고 있다.

 

한국 교회사에서 주목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이리 주현교회 이 모 씨의 나체춤 사건을 기억하리 라고 본다. 그의 존경하는 인물은 늘 흰 고무신에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다닌다는 아현동의 김현봉이라는 목사였다. 그런데 이 김현봉이라는 목사가 존경하는 인물은 바로 맨발의 성자라는 이현필 이고, 한국에서 종교 다원주의의 시조라고 불리는 유영모와 어울리는 사람도 이현필 이였으며, 이들에게 커다란 감화력을 끼쳐 본을 남긴 사람은 이세종이라는 분이었다. 이에 이들의 발자취를 두루 살피고 간추려 소개해 보고자 하는 가운데 유영모에 이어 두 번재로 이현필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이현필의 생애

1) 청소년 시절

1) 이현필은 1913년 1월 28일 전라남도 화순군 도양면 권동(용하리)에서 아버지 이승노 어머니 김오산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위로 아들과 딸을 낳았는데 27세때 막동이로 이현필을 낳았다. 이현필은 막동이어서 일곱 살이 되기까지 어머니 젖에 매달려 귀찮게 굴었는데 어렸을 때의 이름은 ‘싹뿌리’ 이었다고 한다. 그는 열 살이 되기까지 권동집에서 자라면서 천태보통학교를 다녔다. 그 학교는 본래 서당이었던 것을 후에 보통학교로 승격한 것인데 이현필은 4년 동안 언제나 1등으로 졸업했다.

 

이곳에 천태산 혹은 개천산 이라고 하는 명산이 있는데 한국 교계에 특이한 두 인물이 나왔다. 한분은 이현필의 스승이던 이 세종 이고, 또 하나는 이세종의 제자 이현필 이다. 이 두 사람은 나주군 방산에 있는 자그마한 방산장로교회와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

 

2) 이 세종을 만나다.

2) 이 세종은 예수 믿기 전, 나이 40세 되기까지 남의 집 머슴살이로 살면서 푼푼이 모은 재산으로 논밭을 사서 부자가 되었다. 나이 40세에 예수를 믿게 되면서 너무도 기뻐서 매일 밤낮으로 성경연구와 암송으로 세월을 보내고 집집에 전도하는 일을 힘썼다. 그가 성경을 공부하고 있을 때에는 아무리 반가운 손님이 찾아와도 인사도 받지 않았다. 성경 공부를 다 마친 뒤에야 인사를 했고, 식사도 공부가 다 끝난 뒤에야 들었다. 예수를 믿고는 모든 일을 성경 말씀대로 실천했다. 자기에게 빛을 진 마을 사람들을 다 불러다 모조리 탕감해 주고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빚 문서를 불 질러 버렸다. 또 자기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조리 나눠주고 부부는 깊은 산중에 들어가 쑥을 뜯어 밀가루에 반죽해 먹으면서 여생을 보냈다.

 

3) 이세종의 자비심은 금수. 곤충. 초목까지 아꼈다. 자기 발밑에 개미가 밟혀 죽는 것을 보고는 서서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이세종의 말년에는 산중에 움막집을 지었다. 겨우 사람 하나 누울 정도의 것이었다. 방문은 성경대로 아주 기어 들어갈 정도로 작았고, 세상 떠날 때는 제자들에게 사다리를 만들게 하여 그 위에 누워 그대로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 곁에서 울고 있는 아내 보고는 “울음을 그치시오. 내가 예수님을 따라 가는데 울어서야 되겠소!” 하면서 “올라간다. 올라간다. 올라간다.” 세 마디소리를 크게 질렀다.(『좁은 길로 간 사람들』엄두섭 저.

 

4) 이현필이 신생활에 나선 시기는 8.15해방 10년 전이 되는 22세 때로 잡는데 그가 예수를 믿더라도 그 생애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전남 화순군 도암의 성자로 불리는 이 세종을 만난 뒤 부터였다. 그가 예수를 믿고 다도면에 유일한 방산교회에 다니고 있던 때 인접 이웃 도암면 등광리 뒷산인 천태산 기슭에 산당을 짓고 도를 닦으면서 가끔 방산교회를 드나드는 이 세종을 만나게 되었다. 이 세종은 도인이어서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신앙이 되어선 못쓴다” 고 늘 가르쳤다. 그는 기도 중에 “도인은 화려해선 안 된다.”는 영음을 세 번이나 들었다고 한다.

 

이세종을 보통 이공(李空)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빈 껍질이라는 의미의 이공(李空) 이라는 말이다. 사실 그는 세상을 완전히 버리고 재산은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아무것도 없는 빈 털털이였다. 밥도 땅바닥에다 놓고 먹고 살았다. 또 살생을 하지 않고 자기 아내(문순희 라고도 부름)를 누이라고 부르며 부부가 남매같이 살았고 일본 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깊은 산중에 숨어 살았다. 그는 성경 외에 다른 책을 절대 읽지 않았다. 남의 집에서 명절 음식이나 제사지낸 것을 보내오면 먹지 않았고 육식을 금하고 남의 집에서 자지 않았다.

 

그의 산당은 등광리 마을에서 가까운 곳인데 사방에서 모여온 젊은 처녀 총각들이 그의 제자가 되어 날마다 이공을 찾아가 성경을 배우고 있었는데 이현필도 그 무렵 이속에 끼었다. 이공의 성경공부는 영해 방법이었고 한 구절 한 구절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담화식 이었다. 이때에 모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성경을 토론한 사람들은 광주에서 찾아오는 최흥종, 강순명, 목사들과 홍종우 장로, 백영흠 전도사들과 임완식 오복희 전도사 이현필 등이 있었다. (이 세종에 대해서는 현대종교 1992/2월 3월호 <거룩한 혈맥을 찾아서 - 윤남하 글> 참조)

 

5) 이공과 이현필의 연령차이는 30년 차이다. 이현필이 이 세종을 만나 처음 대립한 논쟁 중심 문제는 이공의 순결 사상이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육신으로도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고, 결혼생활까지도 금해야 한다는 사상이었다. 이공의 순결사상은 그대로 이현필에게도 전수되었다. 이런 영향으로 광주 ymca 안에는 강순명 목사를 중심으로 10여명이 주요멤버가 되어 ‘독신 전도단’ 이란 것이 조직되기도 했는데, 그 멤버들은 강순명, 이준묵, 차 남진, 운 남하, 고영노, 박철웅 등이었다. 이와 같은 독신 전도단은 원래 전주 배은희 목사가 시작했고 강순명 목사는 그 연줄로 광주에서 이 운동을 일으켰을 뿐이다.

 

3) 성년이 되어

6) 이현필이 예수를 믿고 등광리 이공(李空, 이 세종)을 찾아다니며 성경을 배울 때 부친은 아들을 보고 미치광이를 찾아다닌다고 꾸짖었다. 이현필이 차차 나이가 들어 성년이 되어가면서 다도면 면서기 시험에 그 형님과 함께 합격을 했으나 이현필은 그만 두고 형은 다도면 면장까지 지냈다. 21세 때 이현필은 광주재매교회 전도사 일을 보기도 했고, 틈틈이 영어공부를 하다가 한때는 서울에 상경하여 ymca에서 영어공부를 하기는 했다. 그때 서울에서 만난 원경선하고 평생 친구로 사귀었다. 그가 서울에 있는 동안 아현동 굴레방 다리 근처에서 특이한 목회를 하던 소위 기둥교회 누더기 교회(아현교회)의 김현봉 목사를 만났다.

 

7) 이현필은 스승 이세종을 배신하듯 23세 때 결혼 하고야 말았다. 아내는 황종원 씨로 광주의 좋은 가문의 딸이었다. 그러나 아내와의 동거 2년도 채 못 되어 자기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싸우다가 아내를 보고 부부로 말고 남매로 살자고 요구했다. 그 다음 부터 아내를 보고 매씨라 불렀다. 그런데 그의 스승 이 세종 역시 그런 전력을 가지고 있다. 이세중은 어린 아내가 두 번이나 자기를 버리고 딴 남자에게 시집을 갈 때 아내의 살림 도구를 지게에 지고 따라가 날라다 준 분이다. 그 아내가 다시 돌아오니 곧 받아 주고 남매 사이로 살았다.

 

그러나 이현필의 부인은 남편을 놓지 않으려고 몹시도 애를 많이 썼으나 끝내는 한동안 여순경 노릇을 하다가 다른데로 개가해 소생 없이 살았고, 비록 개가는 했으나 이현필의 인격만은 존경하고 그를 변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순결 사상은 본래 이공(이 세종)의 사상이었다.(『맨발의 성자』엄두섭 저.

 

4) 이현필의 특이한 생활

8) 이세종의 문하생인 이현필 나이 30세 전후 주로 산에 은거 하면서 금식. 명상생활을 일삼았다. 그러던 중에 남원에서 몇 십리 들어가 있는 서리내골 이라는 산중에서 십여 명의 소년 소녀들을 모아놓고 성경을 가르치며 훈련 시켰다. 일종의 수도생활이다. 이곳 서리내란 선인래(仙人來)에서 나온 듯 하다. 지금도 이곳에는 화전민들이 여러 세대 살고 있지만 이곳은 이현필 운동의 발상지이다.

 

해방 이듬해(1946년 이현필의 나이 33세) 그때부터 이현필은 특별한 소명을 느껴 아직 10대의 나이 어린 소년 소녀들을 거느리고 서리내로 데리고 들어와 수도를 시켰다. 이들은 대부분 이현필에 감동되어 부모님들의 집을 나온 젊은이들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현필을 따라 다닌다고 집에서 쫏겨난자 들이다. 그들은 성경을 배우고 찬송을 부르면서 훈련을 받았다. 한번 훈련기간은 15일 이었다. 보름 훈련하고 쉬었다가 또 보름을 훈련했다. 그들은 숙식을 하기 위해 이곳에 움막을 지었다. 이곳에서의 음식은 쌀가루 에다가 물을 타서 생식을 했다. 그것 조차도 며칠씩 굶고 지냈다. 소녀들도 하루에 한 끼씩 먹었고 주로 풀뿌리와 쑥이 주식이었고, 신발은 짚신을 삼아 신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생활을 하며 초기 수도를 했던 사람은 소녀 7명이었다.

 

서리내 앞산을 타고 남원읍 쪽으로 20리나 내려 오노라면 갈보리라고 불리는 동산이 있다. 이 갈보리는 본래 이현필을 따라나선 김금남양 모녀의 숙부 되는 분의 농장이었다. 숙부는 초등학교 교장이면서 이곳에 농장을 장만하고 그 안에 저수지를 파고, 밤나무, 감나무, 대나무 등을 울창하게 심고 논을 만들고 아늑한 한편 구석에 농막 한 채를 지어 놓았다.

 

김금남 모친이 먼저 이현필을 따라 나서고 그 후에 김금남 양이 반대를 무릅쓰고 이곳에 와 있으면서 100일 기도를 하고 지내던 집이다. 이런 연고로 이현필이 이곳을 드나들면서 부터 이곳은 서리내와 함께 이현필 운동의 발상지였다. 이현필 운동의 초기에는 김금남 양 일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김금남 양의 모친인 강남순 씨를 <갈보리 어머니>라고 불렀다.

 

9) 이현필의 타고난 성격에는 남보다 독특한 점이 많았다. 제자들은 그의 눈물을 잘 볼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타고난 천재보다 꾸준하고 피나는 노력이 그의 인격을 이루었다. 자기완성은 그의 일생의 목표였다. 옳다는 일에는 지체 않고 곧 실천하는 불타는 사나이, 신앙적인 정열의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인격의 진동력이 있었다. 말이 적은 분이었으나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놀라운 감화력이 있었다. 그의 감화력 때문에 그를 한두 번 대한 남녀는 주저 없이 부모도 남편도 아내도 재산도 착착 버리고 그의 운동에 뛰어 들었다. 그는 선풍적인 존재였다. 그가 성경을 가르칠 때에는 앉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어도 그 말 한마디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고 깊은 감동을 일으키는 신비스런 힘이 있었다. 성경을 강의할 때에는 숨소리도 죽여야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낮은 소리로 말을 하다가도 힘이 나면 벌떡 일어서서 정열적으로 간곡하게 말했다. 누구나 그의 이야기를 한번 들은 이는 그를 못 잊었다.

 

10) 한동안 기성교회에서는 이현필 운동자들을 ‘산중파’라고 불렀고, ‘이단’ 이라고 선전했다. “그들은 결혼하지 않고 가정을 파괴하고 재산을 거의다 바치고 이나 빈대를 잡아서는 죽이지 않고 성냥갑에 담아 물에 떠내려 보낸다. 길을 가다가 아이들이 도랑에서 물고기 잡는 것을 보면 돈을 주어 그 고기를 사서는 도로 물에 방생한다. 빌어먹고 다니고 그들은 찬송도 부를지 않고 기성교회 예배에 참석하지도 않는다.” 고 악평을 했다.

 

1948년 이현필의 일행이 해남에 처음으로 전도대로 나갔을 때는 머리를 삭발하고 헌 바지저고리에 배낭을 짊어지고 손에 깡통을 들고 맨발벗고 갔었다. 그래도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과 믿는 군수 부인 등이 나와 천사처럼 그들을 영접했다. 그는 멸시와 존경을 아울러 받았다. 이현필은 늘 하는 대로 거리 가운데로 지날 때는 신을 신고 그 거리 밖을 벗어나서는 신을 아끼느라고 벗어들고 맨발로 걸었다. 스승의 뒤를 따르는 두 자매들도 스승이 하는 대로 추운 겨울날 이지만 신을 벗어 들고 걸었다.

 

11) 벽제 수녀원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준비해둔 관 한 개가 있어 이현필이 운명하면 사용하려고 했었는데 이현필은 유언하면서 자기 시신에 관을 쓰지 말라 하고 자기는 죄인이니까 거적때기에 싸서 내다 파묻으라고 했다. 무덤은 평토장으로 하라면서 죄인의 시체니까 아무도 모르게 하고 아무나 함부로 밟고 다니게 하라고 했다.

 

필경은 임종이 왔다. 안타까이 지켜보고 있는 제자들 보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제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시오!”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때가 1964년 3월 17일 새벽 3시 정각이었다. 그 전날 예고한 바로 그시간이엇다. 그때 이현필의 나이 53세였다.

 

4) 주변 인물 들

12) 수레기 어머니 - 이세종이 자기 후계자 격으로 두 사람을 지목 했는데 하나는 남자로 이현필이요 도 하나는 여자로 수레기 어머니였다. 그의 본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가 살던 고향 이름을 따라서 수레기라 불렀다. 그는 이 세종 의 교훈을 몹시사모했고, 부지런하기로 유명했으며, 그의 신앙은 아주 개방적인 것 같으면서도 고지식한데 가 있다.

 

6. 25때 피난 다니다가 실수하여 다리가 부러졌지만 헝겊으로 그냥 되는대로 잡아매고 다녔기 때문에 그대로 뼈가 굳어 버렸다. 이세종이 세상을 떠나고 이현필을 그대로 따랐는데 정한나 집사와 정귀주씨와 함께 동광원의 3 여걸이다.

 

남의 본이 되고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던 수레기 어머니는 나주시 방산 뒤로 흐르는 강물에 빠져 죽었다. 강을 건너는 돌 징검다리를 장마 뒤에 건너다가 급한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이때 찾은 시체는 상처가 없었으나 1970년 아들 사무엘에 의해 동광원 농장 옆에 매장됐다.

 

13) 현동완 - 서울 종로 ymca 의 총무로 활약하던 현동완 선생은, 유영모 선생을 몹시 존경하며 서로 손잡고 마치 다정한 애인들처럼 서로 따라 다녔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의견차이로 격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현총무는 유영모 선생에게 공자 맹자 소리보다 성경을 더 읽으라고 하며 성경을 연구해서 강해하라고 우정 있는 솔직한 충고를 했다.

 

현동완 총무와 같은 그룹의 사람으로 전남 장성군 소록리에 사는 신공이란 분은 자기가 살아온 날수를 매일 계수해 가는 습관이 있었는데 유영모 선생도 어느 해 어느달 며칟날을 쓰지 않고 자기가 살아온 총달수만을 총 계산해 갔다. 현동환도 그러했다. 시편 90편 12절에 “우리에게 우리 날수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하신대로였다.

 

현동완 총무가 유영모와 함께 광주에 와서 처음으로 이현필을 만나 그 소감을 말하기를 “한국에 인물이 없는 줄 알았더니 광주에 와서 보니 반쪽이 있었구나!” 고 독특한 풍자로 말했다. 유영모를 처음으로 동광원에 소개한 분은 현동완 총무였다.

 

14) 유영모 - 유영모 와 이현필 그리고 동광원과의 관계는 꾸준히 계속된 오랜 관계였다.

 

유영모는 정주 오산학교 교장이었고 유명한 한학자요, 많은 제자를 가지고 있고 그의 사상을 본받은 사람들이 많다. 함석헌도 유영모의 제자다. 유영모는 16세때 입교하여 그때 산 성경책을 70년 가까이 종이 한 장 떨어지지 않은 채 간직하고 있다.

 

본래는 하루 두 번 식사하다가 1952년 2월 14일부터 하루 한끼씩을 먹었다. 일식주의자로 수십년간 하루 한끼씩 먹되 저녁때에 먹고 어디를 가나 두발로 걸어 다녔는데 고집이 대단하여 삼각산 자택에서 서울 종로까지 늘 걸어 다녔다.

 

동광원이 해마다 총회로 모일 때면 유영모가 와서 강의를 했는데 그 강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공자 석가를 높이는 일이나, 기성교인들 처럼 기도하지 않는다는 점 등으로 그는 전통적 기독교 신앙이 못된다고 평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사상이 깊어 이해가 어려워서 “선생들이나 모아 놓고 할 강의다” 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이현필은 유영모를 평하기를 “한마디 피투성이다.” 고 했다. 유영모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이현필 이였다. 동정 사상(童貞. 純潔)에 있어서도 유영모의 주장은 이현필에게 만족했다. 이현필이 존경한 사람은 현동완. 김상돈. 등 여러분이 있으나 그중에서도 유영모를 가장 존경했다. 나이 80이 넘은 몸으로 유영모는 이현필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광주에서의 동광원 모임에 내려와 청년같이 유쾌하며 씩씩하게 종일 꿋꿋이 앉아 가르쳤다.(『맨발의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92. p.89-90. 유영모의 생애와 사상은 《현대종교》2004/7월호 9월호를 참조.)

 

15) 강순명 - 강순명 목사가 광주 ymca 안에서 『독신 전도단』이란 것을 조직하고 특별한 이상 밑에 청년들을 지도할 때 그 단원으로 강 목사의 지도를 받던 분들 중에는 이준묵, 차남진, 윤남하, 고영노, 박철웅, 이현필도 끼어 있었다. 강순명 목사와 이현필 선생 사이는 “하라! 그랬네!” 하는 사제지간의 사이였다. 이현필은 강 목사에게 성경을 공부했다. 강순명 목사는 마음이 착하고 자비한 분이었고 바로 살아보려는 이상주의자였다. 성자 타입의 인물이다.

 

1939년에서 1942년까지 일제 말에는 강순명, 정진철(후에 목사) 여자 두명등 5, 6명이 소위 「칼갈이 대」를 조직해 가지고 전국으로 전도를 다니며 집집으로 “면도칼 갈으시오” 라고 소리치고 다녀 칼을 갈아서 번 돈으로 구제사업을 했다. 이뿐 아니라 거리 청소, 남의 집 변소 청소 등을 하였다. 임종할 때 머리맡에 우는 딸을 보고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를 위해 울라”고 타이르면서 숨을 거두었다.

 

16) 정인세 - 정인세가 이현필을 알게 된 것은 8.15 해방 전부터이다. 정 선생의 나이 23세 때 한 체조 지도교사로 초청되어 광주 y에서 실수학교의 사감노릇을 하였을 때 독신전도단에서 만난 것이 처음이다. 정인세 총무는 신학교에도 다녔으나 정식으로 목사 안수는 받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한때 이곳 저곳 여러 교회를 목회하기도 하였으나 당시 목포에 있던 윤치호에 의해서 광주에 세워진 동광원이라는 고아원 원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부임전 정인세는 양복에 새파란 넥타이 매고 다니던 그가 넥타이도 양복도 벗어 버리고 삭발하고 과거의 모든 사진과 책까지도 모조리 태워 버렸다.

 

그는 내 자식이라 해서 남보다 더 특전을 베풀지 않았다. 더 뒷바라지 해주는 일도 없었고 더 공부시켜 주는 일도 없었다. 똑같이 다루었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원장님’ 이라고 불렀다

 

2. 이현필의 사상

17) 이현필 운동이 한창 불타던 때 광주 지산동 집회소에서는 40일 동안이나 십자가의 사랑과 겸손에 대하여 성경을 들고 목이 쉬도록 가르쳤는데 그때 福音三德을 가르쳤다. 삼덕이란 순결, 청빈, 순명이다. 순결은 생명과 같다고 가르치고 나 하나의 인격 완성이 가장 귀한 것이요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순결, 청빈, 순명의 수도가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18) 이현필의 고신극기(苦身克己), 그의 기도등 특이한 생활은 남들이 도저히 다를 수 없었고 그분의 말씀은 하루 종일 한 이야기를 녹음 한다 해도 모조리 성경 중심 설교요, 사람들의 영혼을 끄는 힘이 있었다. 그래도 그는 누구를 명령해서 무슨 일을 시키는 일이 없었다. 혹시 책망하는 일은 있어도 대개 겸손하게 대했다. 그러나 그가 제자들에게 정신을 넣어 주려고 교육과 훈련을 시킬 때에는 엄격하고 철저했다. 자주독립정신, 청빈과 검소한 생활을 훈련 시킬 때에는 “비누를 쓰지 말고 아궁이 잿물로 빨래하고 털옷을 입지말자. 자기 입을 옷은 자기가 손수 베를 짜 입자.” 하며 그는 일생동안 모직물은 입지 않고 살았으며 홈스펀 짜는 기계를 사서 굵은 무명베를 짜게 하기도 했다.

 

19) 이현필 자신은 일식주의 이었다. 여러 해를 하루 한 끼만 먹되 꼭 저녁때만 먹었다.

 

주로 금식으로 지내는 때가 많고, 며칠에 한번씩 미숫가루로 때우는 때가 많았으며, 생식으로 오이, 살 가루, 물로 끼니를 때웠다. 이현필의 유언이라고도 말하는 <한 숟갈 덜 먹기 운동>은 ① 밥 한 끼에 1원 모아서 불쌍한 형제들을 도웁시다(이것을 한달 계산하여 회비로 월 60원에서 최하 월 30원 모으는 운동). ② 내 몸이 세상 떠날 때 장례비로 1원도 들이지 말고 속옷 내복 한 벌만 입혀서 조용히 묻어 주시오(이것은 그의 유언이었고 그가 계명 산에서 세상 떠날 때 그렇게 했다.) ③ 의심 말고 믿읍시다. 하나님께서 내형편 잘 아십니다.

 

20) 고아들을 위한 동광 원을 시작한지 1년쯤 지났을 무렵 한번은 y총무로 있으면서 동광은 운영을 맡고 있는 정인세 총무가 벙어리 도를 닦고 있는 이현필의 산막을 찾았다. 고요한 호롱불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종이에 필담을 나누었다. 이현필은 금식기도 중에 무슨 생각이 있었던지 종이에다 귀일원(歸一院)이라고 썼다. 그리고 정인세에게 필담으로 권하기를 “곧 나가셔서 광주 역전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따뜻하게 대접하여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을 하시오 이 운동은 동광원 운동이 아닙니다. 귀일원입니다. 동광원 사람만 말고 누구나 역에 나가 비참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보고는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입니다. 그리고 곧 시행 하십시오>” 이렇게 해서 귀일원 운동이 시작되었다.

 

21) 당시 여순 반란의 피는 이미 이 땅의 남단을 붉게 물들이고 앞으로 곧 얼마 뒤에 6.25 난리가 또 북녘으로부터 터지려고 하던 그 역사적인 순간을 이현필은 벙어리 수도를 하면서 구일원에 대한 구상이 태동하고 있었다. 환난이 온다. 올데 갈데없는 사람들 단 하룻밤도 함께 지내줄 이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하겠다. 의지 없는 그들을 구원하라는 신의 계시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것이 ‘하룻밤 재워 보내기 운동’ 이었고, 후에 이현필 만년에 일으킨 일작(一勺)운동의 구상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일작 운동」은 이현필이 1964년에 세상 떠나던 해에 마지막 길로 서울 계명 산으로 가면서 그의 제자들과 마지막 총회 때에 제안한 운동이다. 그것은 모두가 매일 밥 지을 때 자기 먹을 몫에서 한 숟가락씩 떠서 모으자는 운동이다. 이렇게 실시해서 30명이 밥 한상이 되고 300명, 3천명으로 늘어나면 학교도 되고 병원도 되고 비행기가 된다. 그렇게만 되면 자주 국가가 되고 세계는 평화가 온다. 누구나 마음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간단한 선행, 소자에게 물 한잔 떠주는 일 같은 선행. “일작씩 거둬 귀일원에 !” “의지 없는 이 하룻밤씩 재워 보내자!” 돈으로 「십 원 운동」 누구나 돈쓸때 십 원 덜 쓰고 그것을 모아 불행한 겨레들을 재워 보내고 돕자고 했다.(『맨발의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92. p123)

 

3. 이현필과 동광원(귀일원)

 

22) 동광원이 생긴 것은 6.25 반년전 여순사건 직후 광주에서 생겼다. 여순 사건은 쇼크가 컸고 피해가 심해서 부모 잃은 고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때 목포에서 고아원을 크게 하고 있던 윤치호씨가 광주 ymca로 정인세 총무를 찾아와서 “정총무 이러고 있을 때요? 지금 고아들이 자꾸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 ” 그래서 윤치호 씨와 정인세 총무의 주동으로 광주를 중심해서 저명인사 70명이나 회집하여 대책을 의논하고 발기 위원회를 조직하여 고아원 운동을 벌였는데 이름을 동광원이라 지었다.

 

한편 이현필이 화학산 소반바위 밑에서 벙어리 수도를 하면서 기도 중에 받은 그의 새 운동의 이름은 『귀일원(歸一院)』이었다. 『동광원』과 『구일원』은 한 단체 이면서 두 가지 이름이다. 지금도 공식 이름은 『구일원』이다. 정인세 총무가 원장이된 고아사업 『동광원』 운동을 이현필과 손잡고 했고 실제 『동광원』 안의 모든 책임이나 실무 활동은 이현필을 따르는 그의 제자들이 나서서 해왔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동광원』 이라면 곧 이현필의 운동 단체로 알고 있다. 정인세와 이현필은 절친한 런닝 메이트로서 좋은 콤비였다. 그러니 『귀일원』이 곧『동광원』이고 『동광원』이 『귀일원』이다.

 

23) 『동광원』은 처음에는 고아 사업을 위해 시작된 단체이었지만 이렇게 어느새 수도 단체로 변해 버렸고 지금은 고아사업은 그만두고 순수 수도단체로 나간다. 현재(1990년) 동광원에서 수도하는 식구들은 전국에 이백명 가량이 된다. 광주 방림에 본원을 두고 분원은 전남의 곡성, 함평, 진도, 도암, 전북에 남원, 전주, 광주자매, 무등산 등지에 크고 작은 그 단체가 있고 경기도 능곡과 벽제 계명 산, 갈월에도 있다. 혹은 십여 명, 혹은 수십 명씩 모여 살며 관상수도 보다도 노동 수도를 주력하며 자급자족하는 농사에 힘쓰고 있다. 그들은 누구의 원조도 받지 않는다. 자활 생계를 철저히 세우고 있다.

 

24) 이현필 운동이 확대되면서 기성 기독교 안에서는 이해나 동정보다 냉대를 받았다. 그들은 기성교회 예배에는 출석하지 않고 금욕주의적 이어서 엄격한 독신생활로 동정을 지키며 가정생활을 죄악시 하여 동광원으로 들어가는 이들은 가정생활이 파괴되며 거지같이 옷을 허술히 입고 맨발 벗고 걸식 탁발도 하고 산중에 살기가 일쑤이고 해서 이 운동 초기에는 ‘산 중파’, ‘금욕주의자’, ‘이현필 파’ 라 불러 지방교회나 노회목사들은 이단자들 같이 여겼다.

 

25) 이현필을 따르던 여자들 중에는 훌륭한 분들이 여럿이 있었다. 정한나 같은 분은 이현필이 세상을 떠난 뒤 이현필의 정신을 따라 수녀들을 지도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젊어서 지금까지 일생을 운동에 바친 정한나. 정규주 등은 보래 기성교회에서 열심히 다니던 교인들이었으나 이공(이 세종)의 제자 박 모 씨를 따르다가 이현필을 비난하는 말을 듣고 불만스러워 이현필을 찾아 만나 보고 그만 감화를 받아 그 제자가 된 사람들이다.

 

26) 정한나 집사는 그 후 경기도 능곡에 가 있다가 1957년 서울 y의 현동완 총무의 이야기와 이현필의 암시를 받고 혼자 경기도 벽제군 계명 산 앵무봉 밑에 있는 현총무 수양관이 있는 산중으로 분원을 개척하러 들어갔다. 이것이 후에 벽제 수녀의 마을이다. 이현필은 제자들을 훈련 시킬 때 말보다 실천을 통해 진리를 배우게 했다. 정한나를 비롯해서 현재도 이 단체를 이끌어 가는 유능한 지도자들은 몸소 실천하는 데서 그 경험을 통해서 자신을 얻었다.

 

전남 함평에도 만여 평의 농장이 있고, 진도 섬에도 만여 평 넓은 논밭이 있고 그밖에 경기도 벽제 계명 산, 나주시 다도면 중촌 등지에 동광원 수녀들은 흩어져 살며 묵묵히 땅을 판다. 지금도 그들은 효소법 개량농사를 실시하여 농약을 안 쓰고 수확을 올리고 있다.

 

경기도 벽제군 계명 산 분원에는 홈스펀 짜는 베틀을 여러 대 두고 수녀중 일부는 지계를 지고 뒷산에 올라가 나무하고 더러는 베를 짜서 굵은 무명베를 서울에 가져다가 팔았다. 이 베를 사서 옷을 해 입은 이들은 서울에서도 검소하기로 소문난 김현봉 목사의 아현교회 교인들이었다. 그 교인들은 모두 굵은 무명에 검은 물을 들여 옷을 해 입고 고무신을 신고 살았다. 동광원의 특색은 수녀들이 농사를 짓느라고 아주 힘든 노동을 하는 것이었다. (『맨발의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92.p165-166)

 

4. 파 계

27) 이현필은 말년에 후두결핵 병으로 무척 고생했다. 기침과 가래가 심하고 목이 아파서 말을 못했다. 과거에는 죽어도 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절대로 살생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위대한 점은 금욕 고행이나 뛰어난 선행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자기주장을 끝까지 고집하지 아니하고 대오 각성하고 솔직하게 자기 잘못을 고발한 점이다.

 

“제가 오늘 이대로 죽으면 저는 천국에서 예수님께는 역적 같은 놈이 되리라고 느낍니다. 그동안 제가 절대선행을 강조해 왔던 고로, 저를 따르는 이들을 온통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는 자기 생애의 마지막 때가 가까이 왔을 때, 자기 근본 신앙을 분명히 천명하므로 제자들의 오해나 잘못 나감을 미연에 예방한 것이다. “나는 위선자 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구원 얻을 사람이지 선행이나 금욕 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라고 했다. 이말은 이현필이 지금 신촌 거지굴 속에서 죽음을 앞에 놓고 누운 채 엄숙히 자기를 반성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부질없는 이현필관(觀)을 뒤집어엎는 것이었다.

 

28) 사경을 헤매는 이현필은 기운이 극도로 쇠약해 있었다. 제자가 쓰레기통을 뒤져 굴비를 가져다가 머리맡에 놓았더니 그 국물을 입에 떠 넣어 달라고 했다. 그는 젊어서 지금까지 멸치 꼬랑지 한 마리도 입에 대어본 일이 없는 철저한 채식주의자, 금욕주의 자요 옷에 이가 굴러도 d.d.t 약을 단 한번 사준 적이 있을 뿐이다. 수도사가 동정을 버리는 일과 고기를 먹는 일은 죄라고 까지 생각했던 그가 지금 고기를 먹으려고 하고 있다. 그는 지금 일부러 파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김한나라는 수녀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다가 이현필이 고기 국물을 마시는 것을 보고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는 조심스레 김준호 옆에 와서 “선생님이 지금 시험에 들었는지 모르니 고기국물을 절대로 넣어드려선 안 된다.”고 심각한 태도로 제지 시키려 했다. 그때 이현필은 “당신이 하나님이오?” 하며 책망을 했다. 정인세 총무가 오자 필담으로 “이 개 같은 것을 보려고 왔습니까? 원장님, 제가 고기를 먹었습니다. 동광원에서 나를 책벌해 주십시오.” 그는 자기 스스로 파계하고는 스스로 자기를 자조했다.

 

29) 이와 같은 이현필의 파계를 두고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평했다. 어떤 이는 이현필이 이런 파계로 지금까지 쌓아온 자기의 공든 탑을 혁명 하노라 한 일은 그가 걸어온 반생의 주의 주장이 미완성극이라 평했다. 김준호는 “동광원의 타락은 악쓰고 고기 먹게 된 일이다.” 고 했다.

 

저녁 무렵, 해는 서산마루에 뉘엿거리는데 석양이 쓸쓸히 비추는 한그루 밤 나무 밑에 펴놓은 거적때기 위에 다죽은 송장같이 뻣뻣이 누운 이현필의 모습은 참혹한 모습이었다.

 

이제 와서는 스스로 그 자신이 평생 소중히 다듬고 지켜온 길마저 파게 한자,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부인하고 자기 자신 주의 주장마저 부인하고 이제는 제자들에게 마저 멸시받고 죽어가는 이현필이었다.

 

이현필은 “나는 고기를 먹고 약을 썼으나 그러나 나는 고기 안 먹고 약을 쓰지 않는 사람을 존경한다. 그런 분들의 그런 신앙도 존경한다. 그러나 구원 얻는 것은 그런 것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얻는다. 약도 안 먹고 살생도 않는 사람들도 자기주의대로 그대로 안 먹어도 좋으나 먹는 사람도 안 먹는 사람도 서로 남의 인격과 신앙을 존경하라.” 고 했다.

 

30) 고아들을 위한 동광이 시작한지 1년쯤 지났을 무렵, 한번은 y총무로 있으면서 동광은 운영을 맡고 있는 정인세 총무가 벙어리 도를 닦고 있는 이현필의 산막을 찾았다. 고요한 호롱불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종이에 필담을 나누었다. 이현필은 금식기도 중에 무슨 생각이 있었던지 종이에다 귀일원(歸一院)이라고 썼다. 그리고 정인세에게 필담으로 권하기를 “곧 나가셔서 광주 역전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따뜻하게 대접하여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을 하시오 이 운동은 동광원 운동이 아닙니다. 귀일원입니다. 동광원 사람만 말고 눅나 역에 나가 비참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보고는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입니다. 그리고 곧 시행 하십시오>” 이렇게 해서 귀일원 운동이 시작되었다.(『맨발의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92.p.401-422)

 

나가는 말

이상에서 주목받는 유영모에 이어 이현필이 어떤 분인가를 살펴보았다. 그에게서 기성교회로 부터 비난받는 요소가 무엇인지도 다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 교역자들이 성공적인 목회를 통해서 대형교회를 꿈꾸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목적을 이루려는 태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도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꼭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마음자세 만은 우러러 봐야할 마음자세라고 여겨진다. 우리는 한번 생각해 보자! 만일 우리 자신이 죽는다면 위에 열거한 주목받는 인물들처럼 우리를 존경하고 유업을 기리며 따라줄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를 …

 

【참 고 도 서】

1.『한국의 신흥 종교』ⅲ. 탁명환 저. 1974. p385 - 391

2.『좁은 길로 간 사람들』엄두섭 편. 소망사 간. 1985. p.185-190

3.『영 맥』 엄두섭 저 은성 간. 1989. p.103 - 164

4.『맨발의 성자 이현필』엄두섭 저. 은성 간. 1992.

5.『호세아 닮은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87.

6.『순결의길. 초월의 길』엄두섭 저.

7.《김현봉 목사의 생애와 신학사상》정봉기 장로회신학대학 2001 석사논문.

8. 《현대종교》1991. 10월 김현봉 이야기. p.68 - 82

9. 《현대종교》1991. 11월 김현봉 이야기. p. 188 - 197(김현봉사진)

10. 《현대종교》1992. 01월 김현봉 이야기. p. 196 - 212

11. 《현대종교》1992. 02월 이세종 이야기. p. 46 - 57(이세종의 천태수양관)

12. 《현대종교》1992. 03월 이세종 이야기. p. 26 - 34(등광리 교회사진)

13. 《현대종교》1992. 04월 이세종 이야기. p. 26 - 40

 

 

III. 이현필과 동광원

“오 기쁘다! 기쁘다! 오 기뻐! 오매 못 참겠네. 아이고 기뻐!”

숨이 가라앉는 듯 하다가도 다시 돌아올 때마다 “이이고 기뻐! 오 기쁘다. 못 참겠네. 이 기쁨을 종로 네거리에라도 나가서 전하고 싶다.”고 외쳤다.환희의 물결이 터져 나온 것이다. 성령의 기쁨이.... 임종 수일 전부터 기쁨이 밀려와서 어쩔 줄 모르더니 이제 절정에 이른 것이다.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던 제자들에게 “먼저 갑니다. 다들 다음에 오시오!” 하며 고요히 눈을 감았다.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얼굴은 하늘을 향해 바라보면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때는 1964년 3월 18일 새벽 3시였다. 53세로 생을 마감한 성인 이현필선생의 임종시의 모습이었다. 마치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을 그린 성화의 모습이나 같았다고 한다.

맨발의 성자로 알려진 이현필은 1913년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권동리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3세 때 읍내에 있는 일본인 목사 관파(官波)에게 전도되어 복음을 접한 후, 1928년 광주농업실습학교 학생 때 강순명 목사를 통해 알게 된 도암의 ‘이세종’을 만나게 된다. 이현필은 남다르게 거룩한 삶을 동경하며 실천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그의 수제자가 되었고 이세종은 생전에 “내가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해봤지만 내말을 가장 빨리 이해하는 사람은 이현필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세종과 달리 이현필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수도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동고동락하며 제자들을 훈련했다. 이현필 선생을 가장 초기부터 따랐던 분으로 당시 남원 읍내에서 목공소를 하고 있던 오북환 집사였다. 오북환집사는 이현필을 만나 그 감화력에 동화되어 목공소를 내놓고 집회장소로 삼았다. 그는 일생 이현필을 본받아 하나님의 충직한 종으로서 동광원을 가꾸며 헌신했다.

 

이현필은 나이 30세 전후 홀로 산에 은거하면서 금식과 명상생활을 하였다. 화순의 화학산과 남원의 지리산에서 수년씩 홀로 기도생활을 했다. 산에 파묻혀 기도하였고, 특별히 소명을 받아 거룩한 삶을 사모하는 10여명의 소년 소녀들을 제자로 삼아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하였다. 남원에서 몇 십리 들어가는 서리내(仙人來)라는 곳과 그 앞산을 타고 내려오면 갈보리라는 동산이 있는데 이곳에서 제자들과 생활하면서 기도 및 경건생활과 노동 그리고 성경공부 등을 통해 제자훈련을 시켰다. 남원 지방의 독신 기독교인들 중에서 그를 존경하고 따르고자 산으로 모여든 것인데 이것이 동광원의 모체가 되었다. 어머니 강남순과 딸 김금남 두 모녀는 그때부터 이현필을 스승으로 모시고 따랐다. 그때 김금남은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진로문제를 놓고 날마다 고민했다. 그래서 교회에 들어가 열심히 기도하던 중에 “네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하는 신비한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진로문제를 놓고 갈보리에서 백일기도를 했는데 이 기도를 통해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수도생활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자나 깨나 산 제사를 드리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하던 중에 마음에 응답되기를 일생 동정을 지켜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길이라는 깨달음이 왔다는 것이다. 그때 교육은 보통 보름씩 산중에서 행해졌다. 그는 제자들에게 예수의 정신을 본받는 경건훈련을 진행할 때 매우 엄격하고 철저했다. 그는 또한 제자들에게 자주독립정신, 청빈과 검소 생활을 배우게 했다. 성경을 배워주고 겸손과 사랑의 실천, 그리고 양심훈련을 시켰다. 먹을 것이 없던 때라 주로 풀뿌리와 쑥을 먹었다고 한다. 그 자신 스스로가 짚신을 신었고 산중 길을 걸을 때는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으며, 단벌옷과 불을 때지 않는 차가운 방에서 지냈다. 청빈하고 가난하게 사셨던 예수의 삶을 본받고자 몸소 모범을 보인 것이다.

 

서래내는 남원 수지면에서 지리산을 등산하는 도중에 있는 경치가 뛰어난 곳인데 이현필은 그곳의 우거진 솔밭이나 갈대밭 속에 한 번 엎드리면 꿈적도 않고 일어날 줄 몰랐다고 한다. 산에 사는 까마귀가 송장인줄 알고 곁에 와서 ‘까악, 까악’ 하고 울다가 그래도 움직이지 않으니 부리로 쿡쿡 찔렀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화학산 기도 3년, 지리산 기도 4년을 통해 겸손과 자비와 청빈의 수도자인 성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닮아갔다.

이현필은 1948년에 훈련시킨 제자들과 함께 광주 YMCA로 가서 봉사했는데 이때 이들의 모습을 본 당시 YMCA 총무 정인세는 깊은 감동을 받아 바로 이현필을 따르게 되었다. 정인세는 말하기를 그가 만난 인물 중에서 이현필선생 만큼 그릇이 크고 깊은 인물은 없었으며 이현필선생의 그 깊은 속은 자기로서 도저히 측량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현필의 전기를 쓴 엄두섭 목사는 “보통 생각하기를 이현필 선생은 예수를 본받으려고 하신 분이고 하나님만 사모한 분이니 그것밖에는 다른 일은 관심이 없는 분인 줄 짐작하지만 그의 포부는 세계적으로 넓었고 애국심에 불탔으며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분”이라고 전한다.

 

이현필은 식사생활에 있어서 일식주의자였고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다. 하루 한 끼만 식사를 했는데 꼭 저녁에만 했다. 주로 금식으로 지내는 때도 많았다. 또한 그는 많은 신비적인 체험에 대해서는 일체 침묵하였고 꿈 이야기도 하지 않았으며 다만 성경을 가르쳤으며 하루 종일 하는 대화가 그대로 설교였다. 그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아끼는 자비심으로 빈대나 벼룩마저도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간혹 누가 아프다고 그이의 기도를 받고자 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신이 아니오.”하고 거절했다. 그리고 아프다는 이에게는 “아프게, 더 아프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오.” 하였다.

 

이세종으로부터 전수된 순결사상과 남녀유별에 대해서는 무서울 만큼 엄격했다. 이현필도 27세에 결혼을 했으나 그의 스승인 이세종 선생처럼 남매지간으로 지낼 것을 권유하고 실천했다. 후일 이현필 선생의 부인은 개가했다. 이러한 순결사상은 그를 따르는 결혼한 제자들에게는 참 견디기 힘든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현필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결단하여 순결생활을 지켰으며, 때로는 많은 사람이 남편과 집을 놔두고 아이들을 데리고 동광원에 들어와 산 사람들도 많다.

  • ?
    지경야인 2013.05.03 21:16

    30여년 전 남원 서리네골에서 만났던 인상적인 사람들이 오늘 문득 생각이 나서 여기 옮겨봅니다.

    그때 그곳에서 받았던 책 한권이 바로 맨발의 성자인데

    책 내용이 조금 엉성하지만 그래도 이런 삶을 살아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영향으로 풀무원 식품이 생겨났고 아직도 철저하게 채식하고 철저하게 유기농법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스승으로 존경하는 이의 이야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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