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지금 시간은 새벽4시다.
3시쯤 비몽사몽 중에 생각난 이야기들이 결국은 더 이상 잠에 붙들어 놓지 않고
30분 만에 결국 일어나게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생각난 것을 컴퓨터에 쓰려고 노트북을 켜고 익스플러러와 한글을 클릭하고 화면에 나타나기까지 30분이나 소요가 된다.
원래는 아내의 컴퓨터였다가 대학생 딸의 것이었다가 이젠 저의 것이 되기까지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린 것 같지 않은 데 7년 정도 된 컴퓨터가 하드가 고장이 났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아쉬운 대로 쓰고 있는데
낮이라면 다른 일이라도 하면서 부팅시간을 맞출 텐데
새벽에 기다리기가 조금은 지루하다.
누구 혹시 저의 컴퓨터 보다 괜찮은 쓰지 않는 컴퓨터가 있으면 저에게 희사를 해주시면 좋겠다.
어제 재림마을에 들어가서 성경만을 강조하는 한분의 글을 보고 너무 가슴이 아파서 달리기를 하면서도 생각이 벗어나지를 않고 일을 하면서도 그 생각이 떠나지를 않고 운전을 하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뿐이었습니다.
성경
성경
성경
교인들은 성경을 강조한다.
특히 안식교인 들은 더욱 성경을 강조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서 예언의 신이란 엄청난 분량의 책까지 덤으로 강조를 하고 있다.
성경이외의 책은 신앙에서 무용지물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보였다.
얼마 전 창기의 십자가란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본적이 있다.
거기에서 박명호 교주는 성경을 강조하였다.
유기농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문란행각을 성경으로 정당화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할까?
수많은 젊은 여성과 남의 부인까지도 자신과의 성관계를 합리화하는 상태에서
그것이 의심스럽고 믿음이 가지 않으면 자신의 설교 동영상 시디와 성경만을 주고 모든 노동에서 벗어나
몇날 며칠이고 다른 일은 하지 말고 구별된 장소에서 성경과 기도와 자신이 이전에 했던 설교를 반복해서 듣도록 하였다.
그리고 의문이 풀리고 이해가(믿음) 된 연후에 그들과 함께 생활을 하게 되도록 하였다
안식교뿐만 아니라 모든 개신교는 자신들이 진짜 성경대로 한다고 말하고 그렇게 믿고 있다.
그래서 날마다 성경을 읽고 그 성경을 바탕으로 설교를 듣고 그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한다.
그런데도 왜 같은 성경으로 다른 교리가 나올까?
그리고 같은 성경을 읽게 되면 당연히 한가지의 교리로 한 개의 교파로 회귀해야하지 않을까?
우리 안식교도들은 아마 그들이 애써 성경을 부정한다고 생각한다.
또는 성경 성경하지만 우리처럼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미 들은 교리 설교들에 선입견이 자리 잡은 상태에서 100번 1000번을 성경을 읽게 되어도 다만 전에 들은 교리에 확신만 더해주는 역할뿐인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안식교처럼 열린 교회가 어디 있었는가?
1844년의 재림운동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었을 때
소수의 무리가 모여서 잘못이 무엇인가?
성경을 우린 얼마나 알고 있는가?
서로 토론하고 받아들이고 또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지면서 성장하지 않았는가?
안식교회의 독립적 교리가 어디 있는가?
모두가 기존에 있던 각 교파들의 교리들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린 이제 받아들일 만큼 받아들였으니 이젠 더는 받을 것도 없다.
우리가 이제 마지막 바통을 받은 마지막 주자다하고 큰소리치고 있다.
남들이 보면 코웃음칠일이다.
어이 안식교 너희들 내 교리 내놔!
남의 것 가지고 무슨 큰 소리야.
할 것이다.
성경
성경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은 어떤 성경인가?
28개 교리로 이해하는 성경인가 아니면
생으로 날것으로 알고 있는 성경인가?
중국에서는 태평천국의 난이라고 청나라 말기에 일어난 기독교인들의 난이 있었다.
난에 참여한 모든 이가 다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그 핵심인물인 홍수전은 스스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계시를 준 분이라고 믿고 성경을 바탕으로 전도하고 성경의 사상을 건국이념으로 만들어 엄청난 세력을 형성하였다
마지막은 홍수전이 광신신앙으로 변질하여 정치보다는 신앙으로 더 정진하다가 내부 에서부터 일어난 분열로 망하게 되었다.
당시의 청나라는 이난으로 2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조선인구가 1000만이 되지 못하던 시절이다.
조선인구의 배나 되는 생목숨이 성경을 기초로 한 잘못된 해석에서 이루어졌다.
십자군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가?
이처럼 잘못 해석된 성경은 그 피해가 상상을 초월한다.
우린 그런 부류완 질적으로 다르다고 항변한다.
우린 정말 정말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산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 교리이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는걸. 어쩌랴.
설교를 하는 설교자의 내용을 들어보면
성경으로 자신의 말의 권위를 주고
더하여 예언의 신으로 더 큰 권위를 옷 입혀서
신자들의 생활을 사상을 옮짝달싹을 못하게 만든다.
여봐라, 성경에 이렇게 말했다.
여봐라, 예언의 신에도 이렇게 말했다.
고로 이렇게 해라.
그런데 사실은 아니라는 이야기죠.
자신의 생각을 성경과 예언의 신으로 합리화 한 것뿐이란 이야깁니다.
제가 여기서 성경을 가치 없는 책으로 엘렌의 글들을 폄하하고 싶어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지도 못하면서 성경 대로라고 우기고
예언신 대로라고 우긴다는 겁니다.
우리가 확신하는 만큼 비례해서 편파적일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저는 한국정치에서 그 단적인 예를 찾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 행동이 전혀 거부감 없이 투표로이어지고 승리하는 모습에서요
서로 반대편을 도무지 이해를 못합니다.
어떻게 북한과 협력하려는 종북주의자들을 지지할 수 있냐고요
북한정권이 핵 실험하고 나니 정말 이번 선거결과가 참 잘 되었다 라고요.
새누리가 안되었으면 어쩔 뻔했냐고요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하지만 반대편은 이렇습니다.
어떻게 독재자의 딸이 친일파의 딸이 도덕적으로 천하에 개망나니가 한국의 경제발전의 모든 열매를 독식하여 영웅으로 만들어져서 그런 후광밖에 없는 여자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희한하게 느껴질 겁니다.
한국 사람들이 언제부터 핵실험이 있었는데도
전쟁의 불안에 떨지 않고 라면 사재기하지 않고 살게 되었냐는 것이죠.
한국인의 한계가 안식교인 들의 한계입니다.
가장 열린 교회에서 가장 꽉 막힌 교회로 급속하게 전환된 이 현실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는 성경을 읽을수록 더욱 강한 신념만 키울 뿐이지 진정한 하나님의 뜻과는 멀어진다는 이야깁니다.
그것이 믿음이라고 확신할 뿐이지 진정한 의미의 믿음은 아니라는 이야깁니다.
과학을 이야기하면서 성경을 들이밀면 갈릴레오를 죽이는 일이 오늘날 또 일어나게 되어있고
건강을 이야기하면서 뉴스타트나 예언의 신만 해답이라고 하다보면 오늘의 의학계를 송두리째 부정하게 되고
문학, 철학, 예술, 경제 이야기하면서 성경이외에는 필요 없다고 말한다면
진시황제의 분서갱유가 다시 재연되는 것입니다.
우민화입니다.
광신화입니다.
편협한 인간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80년 90년을 살아가는 생애 속에서 예수가 이룬 것보다 더한 고난을 격은 사람
더 많은 사람을 제자로 만든 사람 더 많은 약한 자 고난 받는 자 가난한자와 먹고 입다가 병들고 신음하면서 생을 마감을 한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었습니다.
성경을 너무 미화하면 스스로 오류에 빠집니다.
우린 예수의 이야기를 계속 써 가야합니다.
이제까지 선진들이 삶으로 써왔고 우리도 써가야 합니다.
성경은 66권으로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류입니다.
안식교는 엘렌의글을 성경의 연장선으로 봅니다.
엘렌의 글로 끝났다고 생각하면 그것 또한 오류입니다.
시대마다 성경은 쓰여져야하고 영감은 이어져야합니다.
그런 성경을 보게 되기를 바라는 맘입니다.
소설속에서도
어떤 이의 에세이에서도
선배목사의 설교 속에서도
정치가의 정치철학 속에서도
철학가의 철학 속에서도
과학자의 학설에서도
의학자의 치료학에서도
성경은 쓰여 지고 있으니까요
교회의 진정한 문제점은 교회는 회개하지 않고서, 교인들에게만 회개를 요구하는 데에 있다. 교회에 잘못이 있으면 사람 탓을 하면서, 문제를 만든 교인들에게 회개하라고 말하면서, 목사 자신도 회개하여야 하겠다고 말하면서, 교회는 아무 잘못도 없는 것처럼, “교회는 본래 잘못할 수도 없고, 잘못될 수도 없는 것”처럼 믿고 가르치고 있는 데에, 사실은 바로 교회의 문제가 있다. 그렇게 하면서 변화하기를 거부하는 교회, 바로 거기에 교회의 진정한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는 아직도 야훼께만 순종할 뿐, 예수를 여전히 교회의 주인으로 모시지 못하는 데에 그 문제가 있다. 더 심각한 것은 교회는 그 사실마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들에게는 예수를 닮으라고 말하면서,
“교회는 여전히 예수를 닮기 보다는 야훼를 닮기 좋아한다”
는 데에 교회의 진정한 문제가 있다.
교회는 정말로 변한 것이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4세기 초엽에 지금의 성서가 교회의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이후로 오직 이 성경말씀만을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이 성서를 표준으로 교회의 모든 질서를 유지하여 왔기 때문이다. 교회는 모든 교회의 권위의 근원인 이 성경말씀 때문에, 너무나도 많은 복을 누려왔기 때문에, 이 성서에 얼마나 많은 잘못된 가르침이 있는지에 대하여서는 사실 말하기조차 싫다. 선대의 교회가 원전을 훼손해가면서까지 교회를 반석위에 올려놓은 사실에 대하여, 그들은 알고 싶지도 않다.
“아니,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사실은 하나님이 아니시라 성경이라는, 아니 그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진리는 담고 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고 있지만, 그런 의미에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사실 이성적으로 판단해 볼 때, 성서 역시 인간들이 쓴 글들에 불과하다. 성경 말씀이라고 해서, 성서를 기록한 사람이 바로, 그 때 그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전달하여 주시는 음성을 그 자리에서 듣고서, 바로 받아 글로 옮겨 써 놓은 것이 절대로 아니다. 다만,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고백을, 어떤 역사적인 사건이나 교훈들을 통하여 깨달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체험, 영혼의 목소리를, 영적인 감흥을 차근차근 글로 옮겨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할 의도로 쓴 매우 종교적인 글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인간들의 아주 진솔한 이야기, 인간들이 인간들에게 전해 주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하는 진실에 불과할 뿐인데, 그들은 이런 평범한 사실마저 애써 부정하려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 노릇하는 성서”를, 또한 “그 성서를 독점적으로 선포하는 지위를 이용하여, 그들이 차지하는 특권”을 결코, 하나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