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일이다.
주말에 담임목사님이 새로 이사한 집에 방문을 오셨다.
새로운 집 방 한칸은 서재로 꾸몄다.
벽을 둘러서 책을 꽂았다.
자랑할 일도 아니고 자랑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지만
많은 양의 책이었다.
목사님이 둘러 보신다.
'허집사 책을 많이 읽네!'라며 칭찬을 하신다.
그러나
칭찬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예언의 신 옆에 꽂혀 있던
대하소설 백여권을 보시고선 얼굴이 굳어진다.
무슨 일인지 직감적으로 느껴진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은 다 쓸모가 없어요, 허집사! 예언의 신을 더 많이 읽으세요'
'다른 집보다 예언의 신이 많은 편이긴 한데, 소설보는 시간에 예언의 신을 더 읽으세요'
라고 말씀하신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냥 '네'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속으론 그분의 용감함에 마음이 불편했다.
왜냐하면
그 소설 속에서
민초들의 희로애락을 더 잘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 소설이
예언의 신보다 더 우리 삶과 더 연관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 소설이
설교보다 더 삶의 고통을 아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랜 세월,
소설을 읽으면 영성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래서
공부하기 전에도,
잠자기 전에도,
아침을 시작하면서도,
예신을 달고 살고 소설을 멀리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느끼는 것은,
삶에 대한 이해가 없는,
민초들의 희로애락에 대한 이해가 없는,
우리 삶에 연관성이 없는
설교와 예언의 신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설교말씀보다
가요무대 노래를 들으며 눈물짓는
옆집 아줌마의 마음이 무한 이해가 되는 밤이다.
PS.
예언의 신 무용론이 아니니 예신을 사랑하시는 분들은 너무 마음 상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6000마일 여행 중입니다. 집에 돌아가면 자주 들어오겠습니다.
남편이 민초스다에 글쓰기를 싫어하는 아내를 어떻게 '길'(?) 들여야 합니까? 민초 지식인에 여쭙습니다.
아멘!
우리 소설 좀 읽읍시다.
많이 읽을수록 은혜가 넘쳐 흐릅니다.
PS.
아내를 길들인다고요?
간이 몇 개나 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