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성의 의미를 음미함
유금의 연행과 이조원, 반정균이 『한객건연집』에 쓴 평비, 이를 고리로 이어진 연경과의 지속적 서신 왕래는 이조원의 생일 시회로 이어지면서 이들을 극적으로 고무했다. 중국 당대 지식인과의 실시간 교유란 이전에는 꿈꾸기 어려운 일이었다. 조심스레 열린 사적(私的) 채널이 지속적으로 조금씩 확산, 심화되고 있었다.
서울대 도서관 소장 『중주십일가시선』 중 이조원 소전 부분.
1777년 9월 11일, 이조원의 생일 시회가 열리기 석 달 전에 유득공은 한 권의 작은 시집을 엮었다. 제목이 『중주십일가시선中州十一家詩選』이었다. 제목 그대로 중국 당대의 문인 중 홍대용과 숙부 유금이 가서 직접 만나 교유한 11인의 시를 묶은 앤솔러지였다.
수록된 인물과 수록 작품 수는 다음과 같다.
육비(陸飛) 51수 / 엄성(嚴誠) 16수 / 반정균(潘庭筠) 4수 / 이조원(李調元) 37수 / 이정원(李鼎元) 1수 / 축덕린(祝德麟) 1수 / 박명(博明) 2수 / 주후원(周厚轅) 1수 / 곽집환(郭執桓) 10수 / 이미(李美) 2수 / 손유의(孫有義) 2수
모두 11명 127수의 작품을 수록했다. 이중 육비와 엄성, 반정균은 홍대용이 만났던 인물이고, 나머지는 유금이 연행 도중 직접 만났거나 간접적으로 교유한 인물들이었다. 유득공은 서문에서 이 시집을 엮는 감회를 이렇게 피력했다.
우리나라와 중국은 요동벌과 발해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었다. 명색은 비록 외국의 번방이라 해도 운남(雲南)이나 귀주(貴州) 등 멀리 떨어진 여러 성(省)에 견준다면 굉장히 가깝다. 다만 강토의 제한 때문에 안팎으로 나뉘고 보니 한 시대를 나란히 살아가면서도 마치 천년 전의 옛사람과 한가지다. 비루하고 아는 것이 적은데도 스스로 만족스럽게 여기는 자는 일생토록 송강의 농어와 동정호 금귤의 맛을 알지 못하니 어찌 크게 슬프지 않겠는가. 예전 신라의 최치원(崔致遠)과 김이오(金夷吾)는 중국에 가서 고운(顧雲)과 장교(張喬)를 만났다.또 고려 때 이제현(李齊賢)은 우집(虞集)과 조맹부(趙孟頫)를 사귀고, 이곡(李穀)은 황진(黃溍), 게혜사(揭傒斯) 등과 교유하며 능히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문단을 내달렸으니 주고받은 시문이 이제껏 사람의 눈에 찬란하게 빛난다. 하지만 이런 경우란 천년 백년에 단지 몇 사람밖에 없다. 명나라 때만 하더라도 사걸(四傑)이니 칠자(七子)니, 경릉파(竟陵派)니 운간파(雲間派)니 하는 이들의 풍모와 명성이 천하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제공은 귀를 쫑긋 기울이고도 아무것도 듣지 못하다 몇 대가 지나 출판된 문집이 우리에게 건너온 뒤에야 비로소 어떤 시기에 어떤 사람이 있었던 줄을 알게 된다. 이는 큰 도회지에 과실이 썩어나는데도 궁벽한 향촌에서는 그저 앉아 기다리다가 때가 늦고 마는 것과 한가지다.
내가 뜻을 같이하는 몇 사람과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대화가 이에 이르러서는 크게 탄식하며 답답해하여 마지않았다. 진계숭(陳繼崧)의 『협연집篋衍集』과 심덕잠(沈德潛)의 『국조시별재國朝詩別裁』를 읽고 나서는 더더욱 중국의 인문이 성대한 줄을 깨달았다.하지만 유독 앞서지도 뒤지지도 않고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병술년(1766)에 담헌 홍대용이 연경에 갔다가 엄성과 반정균, 육비 등 세 사람을 얻었고, 올해 정유년(1777)에 숙부께서 연경에 갔다가 우촌 이조원 선생을 얻었다. 또 수레를 기울여 사귐을 논하고 인편에 소식을 부쳐온 사람이 8인이다. (중략) 우리나라로 전해진 이들의 시를 채록해 직접 점검, 교정하고, 사람마다 소전(小傳)을 붙여 1권으로 만들어 동지들 두세 사람과 함께 나누었다. 저 최치원과 김이오, 이제현과 이곡의 유풍(遺風)과 여운(餘韻) 같은 것은 내가 감히 바라지 못하겠지만 훗날 이 책을 살펴보는 사람들이 우리가 조금 일찍 과실 맛을 누려본 것만큼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유년(1777) 중양절 이틀 후 유득공은 쓴다.
『중주십일가시선』의 유득공 서문 끝 부분. 글 끝에 '차진문봉(此眞文鳳)'과 '유득공인' 인장 2과가 찍혀 있다. 유득공의 친필로 보인다.
과거의 역사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에 가서 중원의 선비와 우정의 교유를 나눈 것은 신라 때의 최치원과 김이오, 고려 적의 이제현과 이곡 등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예를 찾기 어렵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조선 문인과 명나라 인사의 개인적 교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중국에 뛰어난 명사가 있다 해도 몇 세대가 지나 그들의 문집이 간행되어 조선에 들어온 뒤에나 아! 그때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있었구나, 하고 감탄하는 형편이었다. 중국의 문예사조 동향은 늘 몇 템포 느리게 조선에 전해졌다. 저쪽에서 이미 시들해진 뒤에 이쪽에서 뒤늦게 불이 붙곤 했다. 늘 엇박자였다.
그런데 홍대용과 유금이 이제껏 아무도 못한 일을 해냈다. 그래서 엮게 된 이 시집은 조선 선비와 교유의 인연을 지닌 당대 중국 시인들의 시만으로 이루어져 동시대성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특별히 위 원문 중에 “앞서지도 뒤지지도 않고(不先不後)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與我同時者)”에 방점이 콱 찍힌 앤솔러지인 것을 유득공은 특별히 자부하고 강조했다. 이 동시대성이야말로 18세기 문예공화국의 공민권을 따질 때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다.
우정의 풍경
홍대용을 필두로 연암 그룹은 특별히 우도(友道)의 문제에 집착했다. 특히 연암은 세명리(勢名利), 즉 권세와 명예와 이욕 획득의 수단과 방편으로 전락해버린 우정의 변질을 개탄했다. 그의 「마장전馬駔傳」은 우정의 문제를 정면에서 심각하게 다룬 최초의 소설이다. 젊은 시절 이들의 교유는 나이를 잊고 처지를 잊고 서로의 마음을 보듬어 보석처럼 빛났다.
이덕무가 1768년 6월 29일에 동인들과 몽답정(夢踏亭)에 놀러갔을 때 시축(詩軸)에 쓴 짧은 소서(小序)가 그의 연보에 실려 있다. 다음이 전문이다.
박제가의 소매를 뒤져 흰 종이 한 폭을 얻었다. 부뚜막에서 그을음을 구하고 냇가에서 그릇 조각을 주웠다. 시를 지었는데 붓이 없었다.내가 솜대 줄기를 뽑자 윤병현(尹秉鉉)은 운부(韻府)의 낡은 종이를 꼬았다. 유금은 돌배나무 가지를 깎고 박제가는 부들 싹을 씹는다.연꽃 향기가 풍겨오고 매미 울음소리가 들리며 폭포의 포말이 끼쳐오는 주름진 바위에서 썼다.
예쁘고 아름다운 광경이다. 시회를 열자고 간 나들이에 지필묵연이 없었다. 한여름 흥에 겨워 술만 챙겨 덜렁거리고 간 걸음이었던 모양이다. ‘자네 종이 있나?’ 박제가가 소매를 뒤적거리더니 말한다. ‘여기 한 장 있습니다.’ ‘한데 먹이 있어야 말이지.’ ‘부뚜막의 그을음을 긁어보세.’ ‘벼루도 없는걸.’ ‘가만. 저 냇가에 굴러다니는 깨진 그릇 조각에다 개면 되겠군.’ ‘붓은 어쩐다?’ ‘만들면 되지 뭐.’ 이런 대화가 오가고 나서 그들은 즉석에서 붓 제작에 들어갔다. 이덕무가 가는 솜대 줄기를 꺾어 붓대로 어떠냐고 묻는다. 유금은 돌배나무 가지를 깎아 이게 더 낫다고 우긴다. ‘붓대만 있으면 뭘 하나?’ 윤병현이 시 지을 때 참고하려고 소매 속에 넣고 다니던 운부를 꺼내 뒤의 해진 쪽 한 페이지를 찢더니 가늘게 꼬아 노끈을 만든다. ‘붓털은 어찌한다지?’ 박제가가 이미 섬유질이 풍부한 물가 부들의 새순을 끊어 결 따라 우물우물 씹고 있다. 잠시 후 붓 터럭 대신으로 쓸 만한 가닥만 남은 섬유질이 준비되었다. 돌배나무 가지에 섬유질 가닥을 대고 종이 노끈으로 칭칭 감자 아쉬운 대로 붓이 만들어졌다. ‘이제 되었군.’ 그릇 조각 벼루에 그을음 먹을 개어 부들 새순 붓에 찍어 각자 지은 시를 박제가가 내놓은 종이에 이덕무가 쓰기 시작한다. ‘글씨가 이게 뭔가? 잘 좀 쓰게.’ 깔깔깔 웃다가 시에 대한 평을 주고받다가 가져간 술을 마시면서 무더운 여름날의 한나절을 개운하게 보냈다. 연꽃 향기, 매미 울음, 폭포의 물보라는 후각과 청각과 촉각을 공감각적으로 재구성한다. 젊은 날 이들의 우정은 이렇게 반짝반짝 빛났다. 세상에 이런 우정은 다시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이들은 홍대용의 『건정동회우록乾淨衕會友錄』을 접했다. 국경을 넘어 이룩되는 참된 우정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답답하고 부러웠다. 연암 박지원은 이 책에 써준 서문에서 우정이 다만 출세의 방편으로 전락해버린 조선의 현 세태를 비판하며 “양묵노불(楊墨老佛)이 아닌데도 의론의 유파가 넷이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이 아니건만 명분의 갈림이 넷”이라고 적었다. 노론과 소론, 남인과 북인으로 편을 갈라 다투고, 그것도 모자라 문반과 무반, 중인과 서족(庶族)으로 구분하는 편협한 조선의 풍토에 숨 막혀한 것이다. 당동벌이(黨同伐異)! 같으면 패거리 짓고, 다르면 공격한다. 네 유파와 네 갈림이 다시 16가지 경우의 수를 낳는 것을 보면, 조선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패가 갈려 다투고 싸우는 일이 일상인 나라였다. 뜻이 맞아도 당색과 신분이 다르면 싸늘하게 외면하여 상대를 인정하지 않았다.
홍대용이 중국에서 오는 길에 만나 사귄 벗 손유의는 훗날 홍대용이 세상을 떴을 때 박지원이 부고를 보내 항주의 세 선비에게 그의 죽음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던 인물이다. 그의 시도 『중주십일가시선』에 수록되었다. 손유의의 직업은 삼하현(三河縣)의 염점(鹽店), 즉 소금 가게 주인이었다. 그를 통해 다시 등사민(鄧師閔)을 소개받고, 등사민은 자신의 친구인 곽집환(郭執桓)을 연암의 친구들에게 소개했다. 일개 장사치인 소금 가게 주인과 조선의 사대부가 대등하게 교유한다는 것은 조선에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연암과 이덕무 등은 평생 본 적도 없는 곽집환을 위해 그의 문집 『회성원집繪聲園集』에 서문과 발문을 써주고, 박제가 등은 그의 거처를 위해 연작시를 기꺼이 지어주었다. 이는 유금이 연행에 나서기 여러 해 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연암은 「회성원집발」에서 이렇게 썼다.
옛날에 벗에 대해 말한 사람이 벗을 두고 혹 ‘제2의 나[第二吾]’라 하기도 하고, ‘주선인(周旋人)’이라고도 했다. 이런 까닭에 글자를 만든 사람이 ‘우(羽)’ 자에서 빌려와 ‘붕(朋)’ 자를 만들고, ‘수(手)’ 자와 ‘우(又)’ 자를 합쳐 ‘우(友)’ 자를 만들었으니, 새에게 두 날개가 있고 사람이 양손이 있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하지만 말하는 자는 ‘천고의 옛사람을 벗삼는다[尙友千古]’고 한다. 답답하구나, 이 말이여!천고의 사람은 이미 흩날리는 티끌이나 서늘한 바람이 되었는데 장차 누가 나를 위해 제2의 나가 되며, 누가 나를 위해 주선한단 말인가?
벗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벗은 제2의 나다. 나를 위해 모든 일을 주선해주는 사람이다. 새의 두 날개요 사람의 두 손이다. 날개 없는 새는 날 수가 없고, 두 손 없는 사람은 뛸 수가 없다. 벗이 없는 이는 날지 못하는 새이고 제구실을 못하는 사람이다. 벗은 ‘제2의 나’라는 이 강렬한 명제는 중국 최초의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가 그의 『교우론』에서 처음 한 말이다.
마태오 리치의 초상화와 『우론友論』의 첫 면. 본문 첫 줄에서 "나와 벗은 남이 아니다. 나의 절반이고 제2의 나다. 벗 보기를 마땅히 나와 같이 해야 한다"고 했다. 이 구절이 연암 그룹을 열광케 했다.
천고를 벗삼는다는 답답한 그 말!
옛사람들이 입에 달고 산 말은 상우천고(尙友千古)다. 천고의 옛사람을 벗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현실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마음 나눌 벗이 없다. 다만 옛글 속의 고인만이 내 마음에 위로를 준다. 그래서 지금을 버리고 오래전에 이미 티끌로 변한 고인을 벗으로 삼는다고 한다. 연암은 이 말이 얼마나 딱하고 답답한 얘기냐고 말했다. 어째서 그런가? 옛사람은 제2의 나일 수 없고, 나를 위해 아무것도 주선해줄 수 없는 관념 속의 존재일 뿐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나는 ‘제2의 나’를 어디 가서 찾을 것인가? 이덕무는 「서해여언西海旅言」에서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글을 남겼다.
사봉(沙峯)의 꼭대기에 우뚝 서서 서쪽으로 큰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 뒤편은 아마득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다. 용과 악어가 파도를 뿜어 하늘과 맞닿은 곳을 알 수 없다. 한 뜨락 가운데 울타리로 경계를 지어 그 너머로 서로 바라보는 것을 이웃이라 부른다. 이제 나는 두 사람과 함께 이편 언덕에 서 있고 중국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의 사람은 저편 언덕에 서 있다. 서로 바라보아 말을 할 수도 있지만 바다가 넘실거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다. 이웃 사람의 얼굴을 서로 알지 못하는 격이다. 귀로 듣지 못하고 눈으로 보지 못하며 발로 이르지 못하는 곳이라 해도, 오직 마음으로 내달리면 아무리 멀어도 다다르지 못할 곳은 없다. 이편에서는 이미 저편이 있는 줄을 알고 저편 또한 이편이 있는 줄을 안다. 그럴진대 바다는 오히려 하나의 울타리일 뿐이어서 보고 또 듣는다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가령 무언가를 붙잡고 흔들흔들 구만리 상공에 올라가 이편 언덕과 저편 언덕을 한눈에 다 본다면 한집안 사람일 뿐이니 또한 어찌 울타리로 막힌 이웃이라 하겠는가?
황해도 장연 바닷가 백사장에서 중국 쪽을 바라보며 떠올린 이덕무의 생각은 조금 특별하다. 뭍에서 보면 바다가 가로놓여 서로 볼 수 없지만, 하늘에 올라가 보면 조선과 중국은 바다라는 작은 울타리조차 의미 없는 한집안 사람일 뿐이다. 귀로 못 듣고 눈으로 못 보고 발로 못 디뎌도 마음으로 만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우정의 논의가 기어코 국경을 넘어서는 현장이다. 이 글은 1768년에 썼다. 홍대용이 다시 만날 수조차 없는 중국 선비와 천애지기(天涯知己)를 맺은 일이 당시 이덕무를 이처럼 크게 고양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런 우정을 꿈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옛사람의 상우천고와 홍대용의 천애지기는 같지만 다르고 다르면서 같다. 먼저 상우천고가 공간을 고정해두고 시간만 잡아 늘인 수직적 사고라면, 천애지기는 시간을 앞세워 공간의 장벽을 넘는 당대성과 동시대성에 바탕한 수평적 사고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문자를 매개로 한 일방적이고 선형적인 사유가 쌍방향 소통을 전제로 한 교감적 사유로 바뀌었다. 나는 이를 한 논문에서 ‘병세의식(幷世意識)’이란 개념으로 명명한 일이 있다.1 병세의식은 동시대를 나란히 살아가고 있다는 의식이다. 이 동시대에 대한 인식은 국경을 초월한다. 반대로 이 병세의식을 공유하지 못한다면 바로 곁에 있어도 그는 내 벗일 수가 없다. 지금이 답답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지만, 이들은 관념 속 옛사람을 상우천고하는 대신 국경 너머 저쪽의 벗들과 나누는 우정을 통해 천애지기의 병세의식을 키워나갔다.
소전 속의 정보들과 제2탄 『열상주선집』
한편 『중주십일가시선』에 실린 각 사람의 소전에는 다른 기록에서 보지 못한 정보들이 포함되어 있다. 주로 유금을 통해 얻은 정보를 추록(追錄)하는 방식을 취했다. 어디까지나 현장성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육비에 관한 기록에서는 “숙부께서 정유년 봄에 연경에 가셨을 때 이부원외랑 나강 사람 우촌 이조원과 만나 육비가 이미 진사에 뽑혔으나 아직 벼슬을 받지 못해 집에서 지낸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여 육비의 과거 급제 사실을 알렸다. 엄성의 소전에서는 “뒤에 들으니 엄성은 민중(閩中) 땅에 가서 관사(館師)가 되었다가 학질을 앓아 집에 돌아와 죽었다. 김재행이 만리봉(萬里峯)에 올라가 길게 통곡하니 듣는 이가 비통해했다. 담헌은 필담 중의 명어(名語)를 따로 초해서 『철교어록』 1권을 엮었다”고 썼다. 『철교어록』이란 별도의 한 권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조원 소전에서는 “내게도 시를 주어 자신을 이지지기(異地知己)라 했다. 또 소상(小像) 1본을 보내며 자신의 생년월일을 말해주고, 『한객건연집』에 실린 여러 사람이 술을 따라 멀리서 축수해달라고 했다. 중국 사람이 벗과 교제함에 있어 정이 참되고 말이 도탑기가 이와 같다”고 적었다. 이로 보면 이조원의 생일 시회는 애초에 이조원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앞서도 늦게 얻은 딸의 이름을 시 속에 넣어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함으로써 딸이 오래 살기를 소망한 일이 있다. 그가 유득공을 두고 이지지기, 즉 다른 땅에 사는 나를 알아주는 벗이라고 호명한 것은 인상적이다.
이 밖에 짧게 스쳐 만난 사람의 시도 수록했다. 기록이 남지 않은 유금의 연행 당시 행적이 이를 통해 조금씩 드러난다. 그중 중강각사(中江搉使) 박명과의 만남이 흥미롭다. 그는 몽골인이었다. 호는 석재(晳齋) 또는 서재(西齋)로 원나라 세조의 후예다. 옹방강과 가까웠던 그는 의주 건너편 책문(柵門)에 오래 살아 조선 사신들이 연행 때마다 으레 그의 거처를 들렀다. 그는 나중에는 이 일로 몹시 피곤해했는데, 유금도 그에게 들렀던 모양이다.
숙부께서 정유년 봄에 연경에서 돌아오면서 그를 방문하셨다. 머리카락이 이미 성성하였다. 그와 필담을 해보니 국가의 전고와 군읍의 연혁에 대해 묻기만 하면 척척 대답하는데 확실한 근거가 있었다. 또 향을 사르고 차를 끓이며 골동품 감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숙부께서 평소 성력(星曆)에 밝았으므로 서양의 방법 중 알기 어려운 것을 들어 점검해보았다. 또한 모두 명확하게 설명해주었다. 스스로 뽐내기를 2만여 권의 책을 읽었다고 했다. 역사의 기록에서 빠진 일을 많이 알고 변증하는 것을 즐겼다. (중략) 숙부의 당호가 기하실인데, 박명이 예서체로 써서 주었다. 필치가 자못 굳세다.
『동화필화집』에 실린, 박명이 유금에게 써준 기하실 글씨.
『동화필화집』에 이때 박명이 유금에게 써준 기하실 세 글자가 친필로 실려 있다. 필치가 굳세다고는 했지만 명필로 알려진 그의 글씨가 이때는 힘이 빠져 그랬는지 그다지 신통해 보이지 않는다.
한편 유득공은 『중주십일가시선』을 엮은 지 19년 뒤인 1796년에 『병세집幷世集』을 엮는다. 그후 자신과 이덕무, 박제가 등이 연행에 참여해서 직접 만났던 인물들을 대거 보충하고, 1764년에 조선통신사행으로 일본에 갔던 원중거(元重擧)가 일본 문사들에게서 받은 시를 첨가하여 말 그대로 한중일 세 나라 동시대 문인들의 시집으로 확장해 묶었다. 교유의 폭이 넓어지면서 그들의 자신감은 하루가 다르게 커져갔다.
1777년 가을에 보내온 편지에서 이조원은 자신의 시에 대한 네 사람의 평을 요청했다. 자신이 『한객건연집』에 평비를 달아주었으니, 너희도 내 시에 똑같이 해달라는 뜻이었다. 이 말에도 그들은 감격했다. 자신들을 대등하게 대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이조원은 네 사람에게 다음 사신 편에 『한객건연집』 이후에 쓴 다른 시도 계속해서 보내달라고 청했다. 네 사람은 신이 나서 다시 『한객건연집』의 후속 시집을 준비했다. 이 시집에는 『열상주선집洌上周旋集』이란 이름을 붙였다. 열상은 한강 가란 뜻이고 주선은 앞서 연암의 글에서 보았듯 벗을 나타내는 이들만의 용어였다. 그러니까 ‘열상주선집’이란 한강 가에 거주하는 벗들의 시집이란 뜻이다.
이들은 『한객건연집』 이후의 작품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시를 엄선했다. 현재 시집의 실물이 전하지 않아 규모와 편집에 대해서는 따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막상 준비는 했지만 이 시집은 11월 동지사 편에 북경으로 건네지지 못했다. 흡족한 선집을 엮기에 시간이 부족했다. 대신 그해 12월 5일에 열린 이조원의 생일잔치 때 지은 시를 포함해 그사이에 오간 교유에 관한 시들이 시집 속에 수록되었던 듯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네 사람 중 이덕무와 박제가가 채 몇 달도 되지 않아 이듬해인 1778년 3월에 진주사(陳奏使)의 일원으로 그토록 그리던 북경 땅을 밟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두 사람의 북경행은 떠들썩한 이야깃거리를 풍성하게 만들어냈다. 이덕무와 반정균의 만남도 이때 이루어졌다. 모든 것이 짜맞춘 듯이 진행되었다.
1 정민, 「18, 19세기 조선 지식인의 병세의식」, 『한국문화』 제54집(서울대 규장각학국학연구원, 2011), 183~204쪽 참조.
출처 : http://cafe.naver.com/mhdn/70041
문학 동네 카페 http://cafe.naver.com/mhdn 에 정민 교수가 지난 1년간 하바드 옌칭 도서관에서 후지스카 교수의 저장 도서를 중심으로
18세기 한국 중국 시인들의 교류와 우정에 대해 연구한 것들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위의 글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문집들은 카페에 있는 정민 교수의 앞 글에 소개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