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알고있는 내용이지만 자꾸 율법이 우리에게 부담이 되는 듯하여
율법을 이루는 것과 지키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함께 깨달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율법에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확대를 하셔서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에 대한 반응은 두가지로 나타납니다.
먼저 율법주의적 반응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야하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미워하지 말자"라고 결심을 합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우리는 "미워하다"라는 말을 먼저 이해를 하여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누구를 미워하는 감정이 들면 미워하지 않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미 미워하는 감정이 들어가는 순간 그는 율법을 어긴것입니다.
그렇게 이미 율법으로 어겨진 것을 깨닫는 순간 다시 미워하지 않기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종교적(?)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하여 사랑할 수 없는 상황이나 감정이 들어갈 때에 다시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미 그는 "사랑하라"는 말씀을 어긴것이며 그 깨달음으로부터 노력을 출발합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삶이 고단하고 힘들며 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이룰 수 있을까요?
관점의 변화입니다.
미워하지 않기 위한 노력을 누가 하느냐?
사랑하는 노력을 누가 하느냐? 에 대한 관점의 변화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하는 것이고, 또 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율법주의이며 자기의 의를 쌓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이루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먼저 미워하는 것은 그리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나의 본성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본성은 정직하게 그 일만을 할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본성이 율법을 지키는 일과 율법을 어기는 일을 다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것을 스스로 이루지 못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만 기도할 뿐입니다.
하나님(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것을 이루어주시도록 간구할 뿐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요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분이 다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약속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소원이며 그 소원이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원과 우리의 소원이 일치할 때에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간절한(하나님처럼) 소원이 되었을 때에 그 소원으로 인하여 간청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두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소원(곧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청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런 상기의 "미워하지 말라" 와 "사랑하라"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루어주실까요?
우리가 미워하지 않도록, 사랑하도록 능력을 주시고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주실까요?
이미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행위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킴(능력적인 성화로)으로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다면
언제고 또 우리는 미워하게 되고 또 사랑안하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가 아닌 우리의 관계를 변화시켜주십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며 소원을 이루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워하였던 자를 형제로 만들어 주십니다.
사랑할 수 없던 자를 가족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면 더 이상 말씀을 지키려고 얽메이지 않게됩니다.
다만 그 말씀들을 이루어주시도록 간구하게 될 뿐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을 앞서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때를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각자에 맞는 소원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주십니다.
그렇기에 오늘 하나님의 소원이 나의 소원과 일치하는가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소원을 우리안에 두시고 또 깨닫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