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조회 수 1475 추천 수 2 댓글 1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014 2 16 / 주현절 여섯 번째 주일

 

그들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것 3

마태 13:10-17

 

곽건용 목사

 

예수에 대한 여론과 기독교인에 대한 여론의 차이

 

미국의 한 여론조사기관에서 일반사람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질문은 “‘예수’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무엇인가?”였습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내놓은 대답은 ‘지혜’ ‘수용적’ ‘긍휼’ ‘은혜로움’ ‘겸손함’ 등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조사에서 “‘기독교인’이란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더니 ‘비판적’ ‘배타적’ ‘스스로 의롭다 함’ ‘편협함’ ‘억압적’ 등의 대답이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슬픈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이 여론조사가 많은 것을 의미하겠지만 제게는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예수님에게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보입니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지만 과거의 습관을 끊어버리지 못한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예를 들면 교회에 다니면서도 아직껏 점을 치고 사주팔자를 보러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젠 기독교인이니까 점을 치거나 사주 보러 다니지 말라고 점잖게 가르쳐야 할까요? 그걸 끊어야 제대로 된 기독교인이라고 가르쳐야 합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직 끊어내지 못해서 고쳐야 할 것에 집중하지 말고 지금 잘 하고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는 과거의 습관을 끊지 못한다 할지라도 새롭게 노력하는 부분에 집중해서 칭찬하고 격려하는 게 옳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앙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많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 깨달음으로서의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보면서 복음서에 나오는 믿음이 대개의 경우 ‘신뢰’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가 말하는 신뢰로서의 신앙은 ‘의존’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모든 걸 하나님께서 다 해주실 것으로 ‘믿고’ 감나무 아래서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게 신뢰는 아닙니다. 기도의 응답은 소원성취와 같지 않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응답 여부뿐 아니라 방법 역시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내 소원이 이뤄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뭘 원하시는지 깨닫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은 뭔가를 얻어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믿음을 뭔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게 되면 그것은 우상숭배로 전락하고 맙니다. 우리 앞에 길은 여럿이 있습니다. 나는 그 중 하나를 택해서 가고 있습니다. 그게 바른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내 길이 옳다고 믿는다고 해서 남이 가는 길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이상 그걸 누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더욱이 정말 내가 가는 길이 바른 길입니까?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난 몇 주 동안 계속 ‘믿음은 곧 깨달음'이라는 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설교를 주의 깊게 들은 분들은 지금쯤 제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파악하셨을 것입니다. 오늘은 믿음은 곧 깨달음이란 주제의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종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얘기하는 걸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세상 마지막 날에 대한 얘기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세상 마지막 날에 대한 얘기가 적지 않게 등장합니다. 이 얘기는 마가복음 13장과 병행하는 공관복음서 말씀에 집중되어 있는데 먼저 그것을 발췌해서 읽어보겠습니다. 마지막 날이 가까이 오면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누구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는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사람을 속일 것이다. 또 너희는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일어난 소식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을 듣게 되어도 놀라지 말아라.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니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날 것이며 지진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기근이 들 것이다. 이런 일들은 진통의 시작이다……. 그 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가 여기에 있다. 보아라, 그리스도가 저기에 있다.’ 하더라도 믿지 말아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 표징들과 기적들을 행하여 보여서 할 수만 있으면 선택 받은 사람들을 홀리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 환난이 지난 뒤에 그 날에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에 싸여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읽습니까? 정말 마지막 날이 올 걸로 믿습니까? 그때가 다가오면 이런 일들이 정말 벌어지리라고 믿습니까? 여기엔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첫째로, ‘이런 일들은 언제나, 늘 일어나는 것 아닌가? 이런 일이 없었던 적이 있는가?’라는 반응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읽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인자가 구름 타고 올 거라는 대목 말고는 늘 일어나는 일이 아니냐는 겁니다. 전혀 새로울 게 없다는 거죠. 인류 역사상 전쟁이 없었던 때가 없습니다. 기아와 지진 역시 마찬가지죠. 따라서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해서 말세가 다가왔다고 믿는 것은 늘 말세란 얘기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둘째로, 이런 얘기를 어떻게 믿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마 이런 일들이 일어나겠느냐는 겁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이 얘기를 믿고 안 믿고는 전적으로 읽는 사람의 선택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했다고 해서 믿어지지도 않는데 억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남들이 ‘멍청하게 그런 걸 어떻게 믿느냐?’고 핀잔을 줘도 믿어진다면 억지로 안 믿을 수 없는 것이고요. 믿고 안 믿고는 전적으로 읽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선택하기 전에 예수님 말씀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는 제대로 알고 선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뭘 믿는지, 뭘 안 믿는지는 제대로 이해하고 나서 믿든지 말든지 하자는 얘기입니다.

 

지금의 것과는 다른 세계관이 전제된 이야기

 

요즘 ‘별에서 온 그대’라는 드라마가 인기가 있지요. 거기에는 4백 년 전에 뭐가 잘못 되어서 지구에 내려와 살고 있는 외계인이 나오는데 그가 조선시대에 살 때 일어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그가 동료 관원에게 지구는 둥글다고 얘기하니까 그 동료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냐고 반박합니다. 만일 지구가 둥글다면 사람이 어떻게 똑바로 서 있겠느냐고, 다 넘어지지 않겠냐고 말하지요. 그러면서 만일 지구가 둥글다면 넌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주인공은 ‘멀리서 보면 안다.’라는 상대방은 알 수 없는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은 드라마에 나오는 김수현 같은 인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구에 대해서 지구인보다 훨씬 더 많이 아는 외계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시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문화와 환경 안에서 사셨던 분이란 얘기입니다. 예수님은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과 다른 세계관과 시간관을 가진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도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하시진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영성과 지혜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면이 있었지만 세계관이나 시간관은 그 시대의 것을 공유하고 계셨습니다. 마지막 날에 대한 말씀에도 이 사실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시간과 역사에 시작과 끝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시작은 물론 창조이고 끝은 종말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시간과 역사가 시작됐다고 믿었습니다. 그때가 언제였다고 믿었는지는 우리가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오늘날 창조론자들처럼 그들도 6천 년 전에 세상이 창조됐다고 믿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빅뱅이론에서처럼 150억 년 전에 우주가 만들어졌다고 믿지는 않았다는 겁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큰 숫자는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종말은 미래에 오겠지만 그렇게 먼 미래는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이 중에는 인자가 구름 타고 오는 걸 죽기 전에 볼 사람도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시간이 끝나는 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그 시대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그럼 언제 시간이 끝나는가, 이게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종말이 언젠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주장을 내세웠던 게 당연하지요. 예수님은 이 문제를 한 마디로 정리하셨습니다. 그때가 언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그때가 언젠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마지막 날이 다가오면 여기저기서 전쟁이 일어나고 기근이 심해지고 지진이 일어나고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고 별이 쏟아져 내릴 것이란 얘기는 예수님이 처음으로 하신 얘기가 아니란 사실입니다. 이런 얘기는 당시 묵시론자들 사이에선 널리 알려진 흔한 얘기였습니다. 예수님이 만들어내신 얘기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시중에 회자되던 얘기를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예수님도 시대의 아들이었다고 말씀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지금 여기 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시대를 뛰어넘는 그 무엇이가가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고 제가 초점을 맞추고 싶은 지점도 바로 이 대목입니다. 예수님이 시대와 공유하셨던 내용이 아니라 공유하지 않았던 내용, 곧 예수님만의 독특한 것에서 예수님 특유의 메시지를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나라와 종말에 있어서도 예수님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면이 있었는데 학자들이 그것에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제 그게 뭔지 살펴봅시다.

 

예수님이 종말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날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무슨 뜻인지는 다 알지요. 다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속뜻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날은 아무도 모르니 사람들은 거기에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기독교 역사를 보면 마지막 날이 언젠지 계산해서 특정 날짜를 예언했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 예언은 다 틀렸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사람이 나오면 틀릴 가능성에 100%입니다. 따라서 그날이 언젠지 우리가 신경 쓴다고 달라질 게 없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말씀이 아닌가 말입니다. 그날이 언젠지도 모르고 그날을 당기지도 미루지도 못한다면 왜 신경을 쓰겠냐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가 뭔지 찬찬히 돌아봅시다. 예수님의 복음은 “회개하라.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선포로 시작됐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저기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나라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이 행복한 이유는 하나님나라가 그들 것이기 때문이고,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이 행복한 까닭도 하느님나라가 그들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로워야 한다고 하셨고, 예수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하나님나라의 잔치에서 먹고 마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에서 하나님나라는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미래의 일입니다. 문제는, 누가 거기 들어갈지가 전통적인 생각과 달랐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은 전통적인 유대교에선 거기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이는 당시 유대인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들보다 먼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라고까지 말씀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당시 유대교의 사고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셨지만 여전히 하나님나라는 미래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에 관한 말씀 중에서 진정 독특한 점은, 그 나라가 지금 그리고 여기서(here and now)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신 말씀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는 여기 있다고도, 저기 있다고도 할 수 없다. 하나님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라는 유명한 말씀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들을 내쫓으면 하나님나라가 너희에게 이미 온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독특한 생각을 봅니다. 이런 말씀에서 하나님나라는 이미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이미’ 왔습니다! 그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것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이미 왔습니다! 벌써 이루어졌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아무도 모르는 먼 미래의 ‘사건’으로만 여기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현재의 사건으로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중요한 점은,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나라가 현재냐 미래냐 하는 시간의 차원을 넘어서서 신앙의 중요한 본질을 보여준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이미 이루어졌다면 그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하나님나라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잔치 같은 거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 모든 사람에게 부어지는 나라이고 정의와 자유와 평등, 평화가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해 더 얘기할 수도 있지만 이만큼만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라가 현재 이루어졌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그런 나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여전히 전쟁과 기근으로 고통 받는 세상이고 많은 사람들이 자연적, 인위적인 재해로 고난당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은 하나님나라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나라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 시대라고 해서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못지않게 부자유하고 불평등하고 평화롭지 않은 세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나라가 이미 왔다고 하셨는데 대체 그게 무슨 뜻이냐는 겁니다.

 

저는 그 하나님나라는 내가 삶에 대한 시각과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버림으로써, 성서적 용어로 말하면 ‘회심’(메타노이아)하여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나의 삶에서 질적인 전환을 이룸으로써 새롭게 펼쳐지는 영적인 새 세상을 가리킨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영적 의미에서 ‘종말’입니다. 시간의 끝으로서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가치관의 시작으로서의 종말 말입니다. 길이로 펼쳐지는 시간이 아니라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질적인 시간으로서의 종말, 곧 깨달음의 때를 가리키는 종말 말입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메타노이아’ 곧 ‘회심’이라고 불러왔습니다. 회심은 도덕적, 윤리적인 죄를 참회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식구조가 전면적으로 바뀌는 것을 가리킵니다. 세상과 삶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가치관과 세계관이 달라지는 것, 그래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지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방식으로서의 신앙의 회심, 이것을 메타노이아라고 부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나라가 지금 여기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을 때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회심의 때가 왔음을 의미합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이런 의미의 회심과 깨달음에 대해서 적지 않게 말씀하셨음을 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마태 6:22-23)라는 말씀도 그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눈은 몸의 눈이 아니라 영혼의 눈이고 빛은 태양빛이 아니라 내면의 빛을 가리킵니다. 곧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면 내면의 빛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채로 어리석은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깨달음이 없는 믿음은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미몽(迷夢) 같음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의인들과 예언자들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얘기를 대부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비유하는 게 참 얄궂은 구석이 있습니다. 비유란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주지만 동시에 뭔가를 감추기도 합니다. 뭔가를 쉽게 설명하기도 하지만 어떤 면을 감추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비유를 들었던 사람들은 매우 쉬운 이야기 같지만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해 주셨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다....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했을까요? 마음이 무디어져 있어서 그랬습니다.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전까지는 믿음은 곧 깨달음이라는 생각이 퍼져 있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은 하나님께 의존하는 게 믿음이라고 믿었고 기껏해야 의존 아닌 신뢰가 믿음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무디어진 마음을 갈고 닦아서 깨달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 본문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너희의 눈은 지금 보고 있으니 복이 있으며 너희의 귀는 지금 듣고 있으니 복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싶어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을 듣고 싶어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그토록 보고 싶었지만 보지 못했던 것이 무엇일까요? 듣고 싶었지만 듣지 못했던 것이 무엇일까요? 영의 눈을 떠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닫는 게 아니었을까요? 무디어진 마음을 갈고 닦아서 지금 이 자리에 이미 와 있는 하나님나라를 느끼는 게 아니었을까요? 닫혔던 귀를 열고 지금 여기 와 있는 하나님나라의 잔치자리에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선물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와서 왁자지껄 웃고 떠들며 축제를 즐기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을까요?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하나면 충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골고루 아낌없이 선물로 부어주시는 사랑, 그것을 알고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은 없습니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나옵니다. 이 사랑을 그저 머리로만 아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마음으로, 영혼으로 깨닫고 느끼는 것,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 모두에게 기대하시는 믿음이라고 전 확신합니다.

  • ?
    fallbaram 2014.02.22 01:13

    아멘! 아멘! 아멘!

    하모!  그렇지 ! 그렇고 말고!

  • ?
    깨달음 2014.02.22 03:11
    곽건용 목사님 :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하나면 충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골고루 아낌없이 선물로 부어주시는 사랑, 그것을 알고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은 없습니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나옵니다. 이 사랑을 그저 머리로만 아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마음으로, 영혼으로 깨닫고 느끼는 것,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 모두에게 기대하시는 믿음이라고 전 확신합니다. "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어떻게 그것을 (알고) (느끼고) (깨달아) 알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가슴으로), (마음으로), (영혼으로) (깨닫고 느낄) 수 있겠습니까?

    다 들 이렇게는 말씀들을 하시는 데,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은 뭔가 다를 것이라 고 기대를 하고 싶습니다.

    사과 맛을 본 사람은 그 사과 맛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맛이 달기는 꿀같은 데,
    레몬을 섞어 놓은 것 같고,
    씹을 때 그 감촉은...
    하고 말입니다.

    사과를 먹어 보았더니,
    정말 (가슴으로) (마음으로) (영혼으로) 그 맛을 (깨달았다) 하면
    그 사과 맛이 어떤 것인지 도무지 알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그 맛이 바로 (천국)이다 라는 경지가 되려면
    보통적인 체험이 아닐 진 데,
    무엇인가 좀더 확실하고 구체적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과적인 맛만 구체적일 뿐 아니라,
    그런 경지에 이르는 길 까지 구체적으로 설명이 되어야 하지 않을 까요?
    그 사과 맛을 진정으로 체험한 분이라면 말입니다.

    요사이
    가슴으로, 마음으로, 영혼으로, 깨달아 알라고
    말하는 사이비들이 하도 많아서 하는 말입니다.

    또 다른 말로는,
    성경을 매일 묵상하고
    기도를 매일 하면 그 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말들도
    알고 보면 자기는 경험이 없다는 말이죠.

    곽 목사님이 그러시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정황으로 봐서는 분명히 경험하신 분 같은 데,
    결론이 통상적이고 일반적으로 되어,
    답답하여 한마디 한 것입니다.
    무례가 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 ?
    김주영 2014.02.22 03:32
    회개는 과거의 죄를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행위로서의 죄라는 관점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아직도 지성소에서 죄 도말 못하시고
    천년기동안 성도들이 들추어 내야 한다고 믿는
    우리의 잘못된 신학

    하나님 나라는 재림이라는 사건으로만 이르러 오는 것처럼
    그렇게 고아처럼 살게 하는 우리의 잘못된 신학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믿쉽니다
  • ?
    왈수 2014.02.28 00:40

    > 김주영 : 회개는 과거의 죄를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
    제 글 : 회개는 과거의 죄를 정리하는 것이기도 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 ?
    곽건용 2014.02.22 07:57
    오랜만에 왔습니다. 그 동안에도 교수님께서 줄기차게 제 설교를 올려놓으셨네요.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게, 보통 성의가 아니라고 전 믿습니다. 그 동안 몇 주 동안 믿음에서 깨달음이 갖는 자리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한 3-4주 계속되니까 우리 교인들 중에서도 '대체 뭘 깨달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기대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배 후에 제게 묻는 분들도 있었지요. 전 끝내 마지막에 나온다는 말로 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설교를 하고나면 '깨달음' 님 같은 반응을 보일 분이 있을 거로 짐작했습니다. '결론이 너무 일반적이고 보편적이 아닌가?'하는 생각 말입니다. 맞습니다. 전 이 설교 시리즈를 시작할 때부터 결론을 이미 갖고 있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결론 말입니다. 다만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음에 있어서 깨달음이라는 게 갖는 중요성에 대해 너무 무심하다는 게 문제라고 여겼던 겁니다. 성경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도 이 점을 강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 점을 상기시켜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결론 말인데요, 과연 그게 정말 그럴까요? 정말 우린 이 진실을 깨닫고 있는 걸까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골고루 아낌없이 선물로 부어주시는 사랑'을 가슴으로, 영혼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요? 만일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 기독교 안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갈등과 미움, 차별 등은 벌써 없어졌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서로 이단이네, 비정통이네 하며 싸우는 짓, 나/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틀렸다고 정죄하고 밀어부치는 짓, 남들과 다른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짓들.... 이 모든 짓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되, 소수의 이른바 '자격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고 믿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득도, 열반, 구원, 영통, 직통계시.... 다 좋습니다. 뭐가 됐든, 거기 도달하는 길이 뭐가 됐든 전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렇게 얻고 깨달은 내용이 '절대자의 무조건적인 사랑,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골고루 아낌없이 선물로 부어주시는 절대적인 사랑'이라면 말입니다.

    '깨달음' 님 덕분에 제 생각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
    박희관. 2014.02.22 14:03
    과거에 거듭남을 경험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의 경륜을 다 이해 한다고
    한때는 생각을 했었읍니다.

    아니 다 깨달았다고 자만을 했는가 봅니다.

    흐르는 시간속에
    그동안 안다고 생각 해왔던 모든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진 물처럼
    이제는 마음에 젖은 흔적만 있읍니다.

    거기에 다시 그 무엇으로 채울까 기웃 거렸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만 남습니다 ....

    하나님의 많은 사랑과 은혜를 경험 했음 에도
    그런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깊은 깨달음 이 아직 도 없네요.!!!
  • ?
    왈수 2014.02.28 00:45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하나면 충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골고루 아낌없이 선물로 부어주시는 사랑, 그것을 알고 느끼고 깨달아야...."
    제 글 : 하나면 충분하다니... 그런 말을 누군 못합니까? 그 하나를 깨닫기 위해서 성경도 알아야 하고, 기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창조가 무엇인지, 출애굽이 무엇인지, 사무엘이 누구인지, 다니엘이 누구인지, 요한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지요. 요 3:16을 깨닫기 위해서 아담도 알아야 하고, 아벨도 알아야 하고, 성소가 무엇인지, 지성소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유월절이 무엇인지, 무교절이 무엇인지, 바울이 누구인지,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회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 ?
    곽건용 2014.02.28 05:46

    왈수 님 글: "그런 말 누군 못합니까?"
    제 글: 맞습니다. 전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했을 뿐입니다. 설교라는 게 본래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목사가 하는 거 아닙니까? 저는 저만 할 수 있는 말을 한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하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고, 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하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 ?
    깨달음 2014.02.22 18:40
    곽 목사님,

    제가 "보편적인 결론이다" 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다 알고 있는 결론 같은 데,
    뭐 좀 새롭고 구체적이어야 하지 않나 하는 좀 무례한 질문에,

    목사님은
    '절대자의 무조건적인 사랑,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골고루 아낌없이 선물로 부어주시는 절대적인 사랑'이 그 답이다. 이것이 긍극적인 깨달음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질문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무조건적인 사랑"에 인간들이 감동을 해야 하는 데,
    "무조건" 전에 그럼 그 "조건"이 무엇이였습니까?
    무슨 조건이 있었는 지를 먼저 알아야,
    그 조건을 따지지 않는 무조건이 무조건인 줄 알게 될 것 아닙니까?
    그래야 감동을 하든지 말든지 할것 아니겠습니까?

    동대문 시장에서
    "무조건 양말 10개에 만원"을 준다고 해도,
    첫째는 내가 양말이 필요해야 그 무조건이 나에게 해당 사항이 될 것입니다.
    두째는원래 (조건)이 무엇이였는지를 알아야 그 (무조건)이 나에게 감동이 되지 않겠습니까?

    "무조건적인 사랑" 전에 무슨 조건이 있었나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 ?
    곽건용 2014.02.28 05:53

    무조건적인 사랑 이전에 조건이라.... 위의 왈수 님이 여러 조건들을 제시하셨으니 그걸 참조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성경도 알아야 하고, 기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창조가 무엇인지, 출애굽이 무엇인지, 사무엘이 누구인지, 다니엘이 누구인지, 요한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지요. 요 3:16을 깨닫기 위해서 아담도 알아야 하고, 아벨도 알아야 하고, 성소가 무엇인지, 지성소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유월절이 무엇인지, 무교절이 무엇인지, 바울이 누구인지,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회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등등

    저는 하나님이 조건을 내거셨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려던 사람들이 '하나님은 이런 걸 좋아하시겠지....'라고 생각하고 이런저런 조건들을 내세웠겠죠. 그런데 그런 조건들 덕분에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게 된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조건들 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게 가로막혔다고 봅니다. 그걸 깨우치는 게 '깨달음'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위의 왈수 님이 말한 것처럼 이러저러한 것들을 다 알아야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저처럼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깨달아야 출애굽이 뭔지, 아벨과 성소가 뭔지 깨닫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 봅니다.

    '두려움 없는 사랑'이란 말을 하지 않나요? '조건 없는 사랑'도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 ?
    Rilke 2014.02.24 06:38
    안녕하세요.

    먼저 곽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세번에 걸쳐서 "깨달음"에 대해서 설교를 해서, 많은것을 배우고 생각할수가 있었습니다.

    이 주제는 제가 평소에 관심이 많고 늘 고민하던것이어서 더욱더 유익했습니다.

    저의 고민의 원인은, 목사님께서 시작할때 예를 든것과 비슷하게, "왜 예수를 오래 믿어왔고,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도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가? 왜 수 많은 교회의 문제및 어려움 속에는 늘 교회를 오래 다닌 분들이 자리잡고 있는가? 왜 교리를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 대로 살지를 않는가?"에 있습니다.

    요악하면, 간디의 말 "나는 예수는 좋아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싫다"를 어떻게 받아 들이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것인가에 있지요.

    비단 이런 고민은 저만의 것은 아닌것 같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숨을 거두기 전에 평생 믿어 왔고, 봉사를 했던 기독교에 대해서 회의적인 발언을 해서 한 동안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적이 있지요. 신앙 생활이 길어질수록, 봉사를 하며는 할수록 저도 테레사 수녀의 발언을 조금 이해할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한 밤중에 예수를 찾아간 니고데모를 생각하게 됩니다. 바리세인인 니고데모도 유대교에 대해서 어쩌면 이와같은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가 저는 "깨달음"에 대한 가장 적합한 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이 대화를 거듭남 (중생), 침례, 또는 미사 (성만찬?, Eucharist) 의 기원으로 많이 해석을 해 왔지요.

    그 중에 저는 예수님의 "너가 땅에 것도 이해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늘의 것을 이해할수 있겠느냐?"라는 말을 많이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너희는 보아도 보지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닿지 못한다"라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고 나와있는데, 어떤사람이 나와서 그렇지 않다고 하니, 교회에서는 그사람을 정죄했지요. 저는 이것이 교회와 과학의 갈등 또는 차이를 잘 설명한다고 싶습니다.

    사람은 보이는대로, 써 있는대로 믿게 되지요.

    사람은 너무나 작은 소리 또는 너무나 큰 소리는 듣지를 못하지요.

    역시 사람은 너무나 작은 물체 또는 너무나 큰 물체는 보지를 못하지요.

    사람은 무게가 없는 물질 (예, 햇빛)에 대해서는 이해하기가 어렵지요.

    그래도 무게는 없지만 햇빛은 보이기는 하지요.

    그렇다며는 무게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다면 과연 사람들이 인지 (인식)을 할수 있을까요?

    깨달음의 세계는 이와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듯이. 참고로, 이번주에 7살짜리 막내 아들이 "바람이 왜 부는지 알아요?" 라고 질문을 해서 굉장히 당황했습니다. "기압의 차이로 분다. 지구가 돌아서 분다 " 여러 설명을 하기는 했지만, 저도 잘 모름을 발견했기 때문이지요.

    어떤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고민할떄는 까끔, "제가 이러다가 돌아 버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물질적인 세계에서 영적인 세계로 넘어 가는길이 바로 "깨달음"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마디로, 전적인 변화지요. 이전세상과 이후의 세상은 같지만 다르다고 할수 있겠지요.

    변화는 깨달음이 없이는 이루어 질수가 없다고 봅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므로 변했다고 하는데, 저는 그것 보다는 바울이 변한것은 어쩌면 예수를 만난 이후 아라바이 사막에서 이루어 지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요즘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면서 다시 느낀것이지만 바울은 이땅과 저땅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의 창을 열어주고 고민케 하는 설교를 올려주어서 감사합니다.

    지금은 거울 (?)로 보는것과 같이 희미하지만, 그 날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것 같이 선명하리라 싶습니다.

    샬롬,
  • ?
    김운혁 2014.03.04 02:05
    "믿음은 깨닫는것이다" 라는 말씀에 동감 합니다. 일만마디 방언을 하는것보다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마디말하는것이 낫다고 말했습니다. 요 17:3에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의 보내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 입니다. 창조 기념 안식일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대대의 표징 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근원을 깨닫게 해주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리석은 진화론이나 무신론에 빠지지 않도록 세월이 흘러가도 보존하시고자 시간속에 세워 놓으신 기념비 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창시자 이시며, 진리 자체 이십니다. 보이는것이든지, 보이지 않는것이든지 이 우주에 모든것이 다 예수님의 창조의 역사로 선것들이며 유지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일을 말씀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말씀으로 이루실 수 없는것이 있었는데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가운데 마귀가 심어 놓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혹과, 불신의 씨앗이었습니다.

    그 병든 마음을 치료하고 씻어 주시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하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어린양"으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이 십자가의 위대한 사건은 온 우주의 창조하심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고귀한 하나님 사랑의 현현이었습니다. 그 위대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가 바로 무교절 안식일 입니다.

    지구 창조보다 더 크고 위대하고 그 규모가 우주적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이루신 " 다 이루었다" 입니다. 그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신 예수님은 무덤에서 아빕월 15일에 첫날을 보내셨습니다. 그 날은 "큰 안식일" 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요 19:31) 당연히 창조 기념일보다 큰 안식일인것입니다. 창조주께서 고통당하며 이루신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을 치료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 하시고 우주에 베풀어 주신 첫날이 바로 아빕월 15일 입니다. 그날은 온 우주의 광복을 의미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노예 해방 기념일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온 우주의 광복절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이 약속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루어지는 가장 기쁜 축복 입니다. 피조물에서 영원토록 사망이 거두어지는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망이 멸망받았다는 말은 더 이상 아무 피조물도 죄를 지을 일이 없게 된것이라는 의미 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은 완전하며 영원합니다.

    영원한 우주 시대가 흘러가는 동안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아빕월 15일을 영원토록 하나님 사랑의 최고의 기념비로 지키게 될것입니다. 주님 속히 오십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오케이, 오늘부터 (2014년 12월 1일) 달라지는 이 누리. 29 김원일 2014.11.30 10401
공지 게시물 올리실 때 유의사항 admin 2013.04.06 36649
공지 스팸 글과 스팸 회원 등록 차단 admin 2013.04.06 53664
공지 필명에 관한 안내 admin 2010.12.05 85451
685 19년 전 거짓말을 또? 노 동자 2015.08.04 179
684 1993년 사건, 조경묵 목사 , 재림교회 목사였습니까? 8 Rilke 2011.10.27 3586
683 1993년 그 때 그 사건 14 김주영 2011.11.03 1862
682 1991년에 멈춘 시계 1 로산 2012.09.28 1408
681 1979년 12월 8일 비공개 재판 김재규 진술 신생 2014.03.01 1381
680 1977년생/이민우/연지동 1 이민우 2013.06.20 1803
679 1950년대 우리나라 힘든 모습 - 사진 모음 잠 수 2010.12.24 2373
678 1939년 9월 1일 김균 2013.09.12 1640
677 1937년, 미시건 플린트 vs 1981년, 항공관제사 파업 4 대전유성 2011.06.27 2227
676 1914년 안식일교회의 배도사건 2 file 루터 2014.09.08 854
675 1914년 안식일교회의 배도사건 1(두번째시험받은사건) 5 file 루터 2014.09.08 620
674 19 세 이상 성인들만 읽을수 있는 글.. 3 김 성 진 2012.05.18 4064
673 18세기 한국 중국 시인들의 동시대성과 우정_ 정민 교수 1 무실 2013.07.31 1758
672 18세가 못하는 딱 한가지. 십팔세 2014.06.11 781
671 18대 대선을 승리로 이끈 좌빨들! 5 18대선 2012.12.20 1243
670 18대 대선선거무효소송 재판 지연 대법관 탄핵소추안 발의 청원 7 친일청산 2016.01.30 93
669 18대 대선선거무효소송 재판 지연 대법관 탄핵소추안 발의 청원 친일청산 2016.02.19 73
668 18년과 2년. 2 2년 2014.12.04 538
667 189조원의 비극 걱정원 2015.02.04 235
666 1888년과 이설-김 **님 5 로산 2011.01.28 1687
665 1888기별자인, 존스와그너가 죄짓고 넘어지지 않았는가? 2 file 루터 2015.02.23 233
664 1888기별거절한당시 상황에 대해 루터 2014.11.12 464
663 1863 년 "건강기별 묵시" - 화잇은 무엇을 보았나? 8 file 김주영 2015.05.24 426
662 1844년이후에는 재림시기를 찾으라고 주신적이 없음. 19 루터 2014.09.10 495
661 1844년이후 죽은자도 144,000인에 포함된다는 구절 9 file 루터 2015.02.03 273
660 1844년을 넘어서는 시간 예언은 없음 9 임용 2015.02.09 402
» 1844년 10월 22일을 새삼스레 말하는 장로교 목사 12 김원일 2014.02.21 1475
658 1844 년 졸업하지 않으면 이 교회는? 11 김주영 2016.06.18 347
657 182:61 로 가결된 반역 6 김주영 2013.11.05 1760
656 180도 상반된 대응 180도 2015.07.21 120
655 1800여년 후에 3 김균 2013.12.14 1189
654 1800년대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실려고 했는데...못하신 이유 예언 2015.05.11 192
653 1800년간의 역사의 폐허 속에 묻혀 있었던 주님의 피로 세우신 안식일 김운혁 2014.06.26 611
652 170년 전의 UB 통신 1 file 김주영 2014.10.22 603
651 1700년의 역사의 폐허속에 묻혀 버린 "하나님의 희생으로 세워진 안식일" 에 대하여 6 김운혁 2014.03.11 933
650 16일 밤 “댓글 흔적 없다” 17일 “가능성 없지 않아” 말 뒤집은 경찰----달인 대회 나가면 경찰이 일등하겠다 4 먹통 2012.12.17 1490
649 16일 '그것이 알고 싶다' 세월호 비밀문서 추적 1 file 2주기특보 2016.04.15 63
648 16세 아이가 성경을 대하는 법 2 김균 2015.08.25 234
647 16.5%가 왜 이리도 많냐?-6 2 로산 2010.12.15 1979
646 15년 8월16일 안식일 - 장경동 목사 1 행복 2016.06.24 128
645 156쪽까지 8 김균 2015.10.11 245
644 150년만에 공개된 가톨릭 대신학교 <영원과 하루> 22 카레데스네? 2012.12.04 1352
643 148회 연평해전 특집 (with 김종대) 숙제 2016.04.18 52
642 144000의 진실을 모르니 엉뚱한길로 빠집니다. 성경을 잘보세요 지경야인 2015.07.10 208
641 144000명 2 로산 2011.01.27 1510
640 144,000인이 상징수가 아니고 실제수인 이유 1 file 루터 2014.11.12 439
639 144,000관련도표 1 file 루터 2015.08.24 91
638 144,000과 계18장천사에대해 질문입니다 에 답변 2 file 루터 2014.11.12 488
637 143회 조선일보 김대중 기자 50주년 스페셜 1 김대중군 2016.04.09 59
636 138명 15 바다 2011.01.01 2047
635 12월을 맞이하며 3 1.5세 2014.11.30 679
634 12월 5일, 우리 모두 복면을 씁시다! 3 프레시안 2015.11.25 113
633 12월 2일 기념 순교성인, 성녀 아우렐리아 1 케로로맨 2012.12.01 1992
632 12월 22일전에 단 한명이라도 진리를 위해 일어나기를 기원하며.... 4 김운혁 2014.10.19 474
631 129th Birthday to the Statue of Liberty! file 자유의상징 2015.10.28 138
630 1270억:100억 3 로산 2012.11.05 1127
629 126명 영적 특공대! 조선족 교회협의회 소식!!! 정무흠 2011.07.26 1507
628 1260일에 대한 여러분의 대비책은 무엇인가요? 5 김운혁 2016.07.15 122
627 1260일간 지구에 비가 내리지 않을 일에 대하여 20 김운혁 2015.10.11 255
626 1260일, 42달, 한때 두때 반때에 대한 실체를 파헤친다(영상) 김운혁 2014.12.10 558
625 1260년과 1260일 그리고 42대 김운혁 2014.10.18 485
624 12345님께 드립니다 9 권오장 2013.11.03 1546
623 12 월의 엽서 - 이 해인 잠수 2014.12.16 516
622 12 월 6 일 ( 월 - 한국 ) 출석 부릅니다요 단디 하이소마 9 잠 수 2010.12.05 2656
621 11월28일 출석부 (나도 협박 한번 해볼까나^^) 8 바다 2010.11.27 1569
620 11월 29일 출석하십시오! 11 고바우생각 2010.11.28 4533
619 11월 17일 제25회 남가주 SDA 연합 성가합창제 admin 2012.11.06 3022
618 119 소방관들 분노 폭팔 불났네 2014.05.29 754
617 11/26(금) 출석부입니다... 아무도 안 만드시면 제가 계속~~~ 13 고바우생각 2010.11.25 1360
616 11/22(화) 화창한 날씨입니다!!! 출석하세요~~~~ 9 고바우생각 2010.11.22 1215
Board Pagination Prev 1 ... 211 212 213 214 215 216 217 218 219 220 ... 225 Next
/ 225

Copyright @ 2010 - 2016 Minchoquest.org. All rights reserved

Minchoquest.org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