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비 등 어깨 밟고 일어나서 시집간 딸
일주일 전 이다.
30나이 한달 앞두고 딸의 결혼식은 멋지게(?) 마쳤다.
자식의 혼례를 이래라 저래라 하지 못하는 이 풍토에서
애비의 한가지 약속만은 지켜 주었으니 감사할 일 이다.
‘예식은 교회에서’의 부탁은 들어 주었으니, 남어지 절차야
어떠니 저쩌니 나무라지 못할 처지 인지라 눈 감아 주었다.
100여명의 친구들과의 흥건한 한 밤을 새운 흔적이 다음날
리셉션 장내에 수십개의 피자 박스들이 증거물로 널려져 있었다.
하여튼 젊음이 좋은 거다.
하니문 간다고 세수도 하지 못하고 공항으로 달려 간 셈이다.
뒷정리는 우리에게 남겨 놓고서…
이태리로 간다나……….
1990년 25년전에 나는 5살 짜리 딸을 데리고 서 태평양 괌도에 갔다.
아내는 아들의 학교 문제로 후일에 오기로 약정하고서
아침에 일어나 머리를 가지런히 빗겨 뒤에 고무줄로 묶고
시원한 아이랜드 꽃무뉘 옷을 입혀 선교사가 운영하는
홈스쿨 1학년으로 등록하여 다녔다.
임시지만 엄마를 본토에 두고온 딸은 깔끔하게 옷 입혀 보냈다.
무더운 열대의 후끈한 바람결에 피부는 얼마 안되어 본토인의
칼라와 다름 없이 까무잡잡 해졌다.
여러 달이 지나면 금세 열대 풍토의 문화에 익숙해 지기 마련 ,
어느날 일요일에 온 교우들하고 해밀리 비치에 놀러가서
산호초들 사이를 거닐고 스노클링 하기로하였다.
우리는 무슨 연유 인지 늦게 비치에 도착해 보니
다른 이들은 100여 미터 건너편 산호밭 물위에 놀고 있었다.
나는 가까운 길을 마다하고 차를 주차한 가까운 곳에서 수영하여 가기로 했다.
어린 딸을 등에 언치고서 ..
물가의 시작하는 곳부터 한길 이상 되는 깊은 곳 이였다.
어느 정도 자신하고 건너 가는 중에 파도가 출렁거리면서
힘이 부닥치기 시작 했다.
목적지의 중반경에 그리고 몇 길이나 되는 깊은 지점에서 힘에 딸렸다.
가볍게 여긴 딸은 무게가 점점 무거워서 머리를 들기가 힘들었다.
나는 점점 물에 잠기는 상황에서 딸은 등 어께로 올라와 살길(?)을 찾는 게다.
이것은 자연의 본능 일게다
온몸이 거이 물에 잠기고 허우적 거리는 지경에는 딸은 자기도
물에 빠지지 안으려고 나의 머리까지 누르면서 올라 왔다.
아 ! 나는 ‘주여’ 하고 부르짖을 믿음도 없는 연약한 죄인 이였을까.
아비가 등에 올라탄 딸을 내 던지고 ‘살려라’하고 소리치며
도망칠 아비가 있겠는가.
가능하다. 나 살자고 …
순간적이라도 내 새끼는 살려야 되겠다는 작심으로 머리를
물에 담고 잠수형으로 물을 어느 정도 마시면서
‘구원’의 손길을 간구 하였다.
순간 나의 몸이 물 위로 솟아 오르는 감격이 느껴 졌다.
물 밑에서 잠수 스노클링하던 두 명의 미국인 잠수사들이
우리를 들어 올린 것이다.
‘오 땡스 투 갓’
이곳은 지난 해에 한 초신자인 새 색시가 물에 빠져
익사 할 뻔 하였으나 구조로 병원에 입원하여
사흘 만에 의식을 찾아 소생한 그 지점 이였다고 들려 주었다.
어제서야 신혼여행 간지 나흘 만에 사진 두장 보내오면서 ‘ 프로렌스 에서’
겨우 한줄의 장소 만을 기입하고 이메일을 보내 왔다.
그 것도 노심초사하는 엄마의 이메일을 받고 회신(?)한 것이다.
좋은가 부다,.
둘이서 웃고 웃는 모습만 보아도 정겹다.
‘그 동안 엄마 아빠 얼마나 수고 하셨는지 고맙다’는 겉치레 말도 없이
달랑 자기들의 세상만 만난 듯한 표정이다.
섭섭한 마음 접기로 했다.
부모의 깊은 심정을 얼마나 알지 있는지 하는 걱정과 염려는
한낮 ‘기우’인 것으로 작심 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언젠가는 부모의 애틋한 자식의 사랑을 잊지 않고
드러 낼 때가 있을 것' 하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30년 보살펴온 둥지는 깃털만 남기고 텅 비어 있다.
이제 찬 바람이 불면 남은 깃털들은 하늘로 흩어지고
둥지는 무너질 것이다.
겨울 눈보라에 나무들의 벌거벗고 초목들은
땅속으로 숨을 것이다.
나의 흰 머리도 세월 따라서 드물게 남아서
마른 피부에 담금질 하고 있을게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지나고 내년이 되면
또 새로운 봄은 오겠지.
작년에 되 돌아간 철새들이 다시금
이곳에 찾아 올 것이다.
그때면 우리 딸도 새끼 하나 안고
우리 집 둥지로 오겠지
빈 둥지는 허물지 말아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