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말린 유리병에 담긴 유방이 도발적이다.
꼿꼿하게 발기되어있는 유두.
무안해진 시선을 서둘러 아래로 거둔다.
슬픔인지, 아픔인지, 둘 다 인지, 모르겠다.
에디가 병을 내밀며 피식 웃는다.
“별 거 아니네. 한 때는 선정적이고 육감적이어서 사내들의 눈길을 붙들었던 건데
살아있는 몸에서 분리 되고나니 망측하고 쓸쓸하다...
버림받은 것들은 다 그래... 맞지?”
말투에 묻어있는 황량함을 들켰다고 느낀 걸까,
제 어깨 스스로 토닥이듯 말을 잇는다.
“남아있는 이것을 볼 때마다 잃은 한쪽이 생각났어.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 미련을 떨쳐버리는 상책이겠다 싶었지.
공평하기도 하고.
둘이 함께 있어야 하는 것들은 나란히 함께 있는 게 보기 좋아.
어떻게 생각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고개를 모로 꺾는다.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에 실려와 깨어나자마자
자신의 잘린 유방을 한번 보고 싶다고 요청하더니만.
“모니터가 왜 이렇게 이상한 소리를 내지?”
나는 딴전을 피운다.
오 마이, 환자가 간호사의 마음을 이렇게 휘저어 놓아도 되는 거야?
오늘, 그녀는 오른쪽 유방을 잘라냈다.
10개월 전, 암덩어리가 자라고 있는 왼쪽 유방을 절제했는데,
한 시간 전, 건강하고 아무 죄 없는 것을 떼어내었다.
전이될 위험을 미리 없애기 위한 방책.
생살 도려내기.
그녀는 밋밋해진 가슴에 두터운 드레싱과 복대를 친친 감고
혈액을 뽑아내는 플라스틱 주머니까지 달고서 내게로 왔다.
에디. 53세.
그녀는 자식 둘을 일찍 성장시켜 내보내고
제2의 인생을 향해 새로운 출발을 하려는 찰라, 암이라는 직격탄을 맞았다.
남자 친구는 그녀의 우울한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갔다.
광야에 혼자 내팽개쳐진 듯 암울했단다.
“칠흑 동굴 속에 갇힌 듯한 두려움, 어떤 건지 알아? 그 고독감, 이해할 수 있어?”
10개월 전에 처음 만났을 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던 그녀였다.
그녀를 다시 만났다.
화학치료로 인하여 기력은 많이 쇠해졌지만 정신은 예전과 달리 단단하다.
삶에 대한 진지하고 평온한 태도가 옆에 있는 내게까지 전이되어 온다.
“생각 하나 바꾸니 세상이 달라 보이는 거 있지?
병이 아니었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감정의 순수를 경험하고 있어.
이젠 이 땅 위의 모든 쓰라림을 넉넉히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비결을 물으니 미소만 짓는다.
비밀인가.
하기야 삶의 정수가 이웃과 나눌 수 있는 것이던가.
오직 홀로 깨달을 수밖에 없는 영역일 것이다.
회복실에 머무는 동안 대화를 나눈다.
마취제와 진통제의 혼합 사이에서 겪는 몽롱함으로
보통 사람 같으면 손가락도 가누기 힘든 상황일 텐데
그녀의 의식은 맑고 또렷하다.
통증에게 어리광 부릴 틈을 주고 싶지 않다며
간호사에게 대화를 청한다.
53세, 그녀의 나이가 자꾸만 생각의 뿌리를 흔든다.
53세의 여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는 아니지만
여전히 생산적이고 가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제까지 쌓아온 스팩을 누려야지. 내려놓고 정리하되
좋은 것 귀한 것 분별할 줄 알고
세상에 대한 관조의 시각이 깊어지는 때이고.
30, 40 대의 분방한 삶에서 한발자국 뒤로 물러난 여유와 안정된 모습이
사람들에게 평온함을 주지.
중용의 묘미를 터득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열망이 깊어지는 때이기도 하고.
에디처럼 병을 앓으면 이 모든 에너지는 어찌 되는 걸까?(미안하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누려야지."
하나와 둘, 둘과 하나가 절묘하게 조합되어 있는
몸에 대한 대화도 오간다.
머리 하나, 팔 두 개. 심장 하나, 허파 두 개. 위 하나, 콩팥 두 개. 방광 하나, 다리 두 개(정말 절묘하다).
쌍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그만큼 할 일이 많기 때문이야.
한쪽이 없으면 남은 한쪽이 없어진 것의 몫까지 넉넉히 감당해주어야지.
눈 두 개. 귀 두 개. 허파 두 개. 신장 두 개.
그런데 유방은 왜 두 개일까.
인류를 먹여 살리는 어미의 표증일거야.
옆집 홀아비가 젖동냥으로 키우는 갓난아기에게 나누어 줄 수 있어(하하하).
아기에게 한쪽 젖을 물리면 다른 한쪽 젖무덤도 샘물 솟듯 젖이 차오르지(침묵과 숙연).
젖을 먹이거나 빌려줄 이유가 없는 여자에게는 그러니까 불필요한 기관이야.
떼어내겠다는 결심도 훨씬 쉽지(정말 그렇구나).
하나씩만 있는 기관도 나름 이유가 있을 거야.
유일한 것이기에 조심스럽게 아껴 다루고 잘 간수해야 해.
경계하고 단속해야 하는 것들이기도 하지.
입이 왜 하나인 줄 알아?
위험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야.
오죽하면 말하는 일에 먹는 임무까지 맡겼을까.
먹을 때만이라도 입을 다물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위도 하나지.
두 개였다면 식탐을 채우느라 세상은 아귀다툼이 더욱 심해졌겠지.
사랑의 심벌인 심장이 두 개였다면 어찌 되었을까.
문학과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힘들 거야.
심장이 하나이듯 사랑은 하나이어야 해(둘 다 잠시 조용하다).
생식기도 남녀 모두 하나씩이지.
만일 남녀성징이 각각 하나씩 한 몸에 있다면.
혹은 똑같은 생식기가 한 몸에 두 개씩 있다면.
사회는 혼란의 도가니 속에 빠지고
인간의 존엄성과 정체성은 무참히 망가졌겠지(그래그래).
인간이 앓는 질병 중 생식기 관련 질병이 가장 악랄해.
자궁, 난소, 유방, 전립선.
모두 생명을 보관하고 성장시키고 기르는 기관들이지.
생명은 귀하고 또 귀해서 함부로 다루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 들어있어(왜 이렇게 생각이 같을까).
인간에게 없는 것도 얘기해보자.
날개!
날개가 없는 것은 신의 인색함이 아니라 큰 은혜라고 생각해.
날개로 인하여 행복해지기 보다는 불행해질 가능성이 더 많을 테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아무리 친밀한 관계라 할지라도
상대방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공간과 간격이 있지(끄덕끄덕).
날개가 있다면 존재의 절대 거리를 지키는 일이 그만큼 힘들어질 거야.
턱없이 괴롭고 아프겠지(휴우, 한숨).
회복실에서 에디가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53세, 두 여자의 이야기도 끝이 난다.
에디는 이 방을 떠나 병원을 나서면 세상 어디론가 흡수되어 살아갈 것이다.
유방 둘을 잘라내었으니 몸의 기관들을 단속하기가 그만큼 쉬울 것이다.
사는 일도 그만큼 홀가분해지겠지.
창공을 차고 나는 꿈을 자주 꾸리라.
<한국산문> 3월호, 신작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