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는 용감했다!

by 김주영 posted Nov 20, 2010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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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다에 연재하던

우리 건강기별 역사 이야기 제 8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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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잇의 아들들, 의과대학에 가다>



건강기별의 역사 이야기, 본 궤도에 올려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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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 미약했던 우리교회 건강개혁 사업은 급속히 발달했다.


1863년 계시가 있었고

1864년 건강기별의 첫 책 (말썽 많은 Appeal to Mothers)  이 출판되었고

1866년에는 배틀크릭에 요양원이 설립되고,  건강에 관한 정기간행물이  시작되었다. 


해가 지날수록

전문인력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요양원은 처음에는 불어나다가  환자가 줄었고

건강잡지도 엘렌 화잇과  우리 교회 목사들이 돌아가며 쓰는게 한계가 있었다. 


럿셀 트랄이라는 수치료 전문가가

객원 기고가로 건강잡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했는데

가끔 극단적인 주장을 해서 (소금을 절대로 먹지 말라는둥)  독자들이 불평했다.


안식일교회 안에는 아직 

제대로 된 의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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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화잇은 

교회의 똑똑한 젊은이 몇을 

의과대학에 보내 학위를 따오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1872년

배틀크릭에서

네 젊은이가 

뉴져지에 있는 트랄의 수치료학교로 향학했다. 


트랄의 학교는 1년 수학하면 MD 학위를 주었다. 


이 4인 유학단의 행수는

메릿 켈록 (Merritt Kellogg) 이라는,  이미 의사노릇을 하고 있는 40세의 신실한 교인이었는데,

트랄 학교 출신이었고, continuing education 이 목적이었다. 

그는 이후  SDA 의료사업의 대부가 된 쟌 하비 켈록의 이복 형이다. 


쟌 하비 켈록 (1852-1943) 은 

그 총명함과 학구열을 일찍 알아본 제임스 화잇에게  열 두 살에 발탁되어

리뷰에서 식자공으로 시작하여

교회에서 출판되는 모든 출판물들을 다 읽었고  

미시간의 사범대학에서 한 학기 공부를 마친 상태였다.

제임스 화잇은 쟌 켈록에 기대를 걸어

재정적 지원을 하며 의과대학을 권했다.  


이 켈록가의 두 형제와


화잇의 살아남은 두 아들 

엣슨 (당시 23) 과  윌리 (18)가 

의과대학에 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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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잇 부부는 오랫동안 

아들 엣슨이 의사가 되기를 바랬는데

이 말썽꾸러기 아들은 건강개혁을 실천하는데는 젬병이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의사가 되겠다는 희망은 버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오죽하면 어머니가 

"너를,  보나 마나 실패할 것이 뻔한 그 자리에 갖다 놓으면

우리(부모) 에게 수치일 뿐 아니라 너에게도 수치일 것이다" 라고 했을까


그러나 청개구리 엣슨은 웬일인지

의과대학에 가겠다고 했고

화잇 부부는  스스로 알아서 학비를 조달하는 조건으로 

엣슨을 트랄의 학교에 보냈다.

(사실 그간 엣슨 때문에 지출한 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엣슨의 학업을 위해 또 돈을 대주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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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잇 가의 두 형제와

켈록 가의 두 형제가

렛셀의 수치료 학교를 졸업했는데


켈록가의 두 형제는 의사가 되었고

화잇 가의 두 형제는 의사를 하지 않았다. 


공이 어느 쪽으로 튈 지 모르는 

청개구리 엣슨은

"요즘 의사들, 모두 다 강물에 쓸어 넣어야 할 것"

이라 말할 정도로 180도 돌아섰다. 


엣슨이 이렇게 말한 것은 

그가 불안한 말썽꾸러기였기 때문 만은 아니었다.

사실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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