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망친 문법 그리고 신앙을 망친 율법
어떤 과목보다 가장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아서 영어공부를 하는 나라지만 아래의 글을 읽으면 한국은 열두 아시아 국가중에 꼴찌로 영어구사력이 낮은 나라로 나타났다.
왜? 그럴까?
ReadingCare.com의 디렉터 조 명현씨는 미국에 사는 한국인 성인들의 영어를 한 마디로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한국어 감각으로 새 영어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표현이나 감각은 한국식인데, 단어만 영어로 바꾸는 방식이다. 그것도 어휘 실력이 충분치 않으니 표현이 자칫하면 우스워진다. 엄밀히 말하자면 반 토막 영어다. 이런 양상은 조기 유학생들에게서도 자주 발견된다. 세계에서 가장 으뜸가는 두뇌로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경쟁 속에서 노력해온 "한국 국민의 영어 구사력이 아시아 12개국 중에서 12등"이라는 발표를 접하면서도, 그 원인을 제거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종래의 편법에 더욱 더 열심히 매달리는 모순이 미국에서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조 명현씨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한다. 고등교육을 받은 미국인들이 일상 대화에서 흔히 사용하는 어휘들을 감각적으로 익히라는 것이다. "그러나 단어의
뜻만 달달 외우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방법입니다. 그건 영어실력 향상에 백해무익한 시간낭비죠. 기억력이 아무리 좋아도 마찬가지에요. 반면에 좋은 예문을 자꾸 읽어서 통째로 외울 정도가 되면, 영어의 감각은 원어민 수준으로 접근하게 되면서 높은 수준의 대화, 영어다운 영어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 그리고 이렇게 예문 중심으로 훈련하면 6개월 만 지나도 어휘를 적재적소에 정확히 사용하는 높은 수준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기억에 의존하는 영어는 실패를 가져오고, 감각에 의존하는 영어는 성공을 가져온다는 뜻이다.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는 장래에나 가야할 장소이고 또 가시적인 변화를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산다. 그래서 율법을 이해하는 측면도 그러하다. 기억이나 해석이나 인식적인 방법을 통해서 이를 수 있는 나라를 우리는 지향하지만 어린아이들을 바라보며 예수님은 하늘나라는 그런 인식속의 공간이나 잡지도 못할 구름이 아니고 어머니가 아이를 만지듯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로 오셔서 우리를 만져주는 무의식적 (?)인 관계와 시간들이며 그래서 임마누엘-우리와 함깨 계시다 이며
그런 감각적이고 유아적인 관계의 자라남을 통해서 천국이 완성이
된다는 의미의 말씀을 하시고자 한 것이다.
위의 글을 쓴 필자는 감각에 의존하는 영어가 아니고 기억에 의존하는 영어를 지향했기 때문이라는 다소 생뚱한 방향으로 이슈를 끌고간다. 좀 부가설명을 하자면 문법적으로 이해가 된 상태를 지향하기 보다는 통째로 외워서 감각적으로 튀어나오는 영어의 영역을 구축하자는 말이다.
이 이론을 뒷받침하고 이 지론을 적용하기 위해선 영어에 자주 등장하는 비밀이 아닌 비밀같은 idiom이 하나 있다.
The younger, the better 이다
더 어릴수록 더 좋다 라는 말이다.
갓난 아이시절엔 숨을 배에서 쉬는것으로 시작하지만 점점 성인이 되어가면서 목으로 숨을쉬게 되는것처럼 어린시절엔 모든것을 감각적으로 받아 들이지만 성인이 되면서 만사를 기억 또는 이해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레 흐르게 된다. 그것이 문법을 도입한 우리나라의 영어공부 방식이었다.
나는 짧은 기간이지만 중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 경험이 있다.
이런 문제를 내나름으로 파악한 상태에서 그동안의 전통적 문법위주의 수업에서 벗어나 우선 정확한 발음을 연습하고 dialogue 를 외우는 방식으로 수업을 이끌어 갔다.
적어도 그 중에 가장 공부를 잘하는 똑똑한 학생 하나가 교장선생에게 새로온 영어선생이 문법중심의 수업이 아닌 이상한 방향의 수업을 한다고 일러주기 까지는 제법 재미있게 수업을 진행했었다.교장의 권고로다시 전통적 방식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지만 두고두고 아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훗날에 성인이 된 그당시의 여학생하나를 미국에서 만났는데 그 는 내가 그당시에 가르친 방법이 가히 선구적이었다고 그 때의 정확한 발음 그리고 dialogue 의 외웠던 일들이 자신에게 어느정도의 실력을 받침해준 것이라고 나중에사 알게 되었다는 회고를 하는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율법의 기능또한 영어를 구사하는 일에서 문법적인 방식의 한계가 가진 문제처럼
거의 동일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린 배울 수 있다.
율법을 주신이가 이 율법의 문제를 모를리가 없는것이다.
우리는 툭하면 우리를 지으신 이가 우리가 살아갈 수있는 어떤 방식을 주셨는데 그것이 율법이라고 주절대면서 정작은 율법을 어떤식으로 받아들이고 구사할 것이냐를 잘 알지 못한다.
그렇다 율법을 주신이가 어떻게 율법을 보느냐 또는 읽느냐를 가르쳐 주신것을 한번 생각해 보자.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 들이지 않고 성인들이 하는 그런 지식적인 받아들임이 결국에는 실컷 시간을 투자하고도 영어 구사력이 떨어진 한국사람의 처지처럼 신앙의 구사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신앙이 자라나지 못하는 것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말씀하시고자 하여 거기에 청년 율법사의 이야기를 끼워넣고 계신것이다.
청년은 어린시절부터 율법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믿고 글자 그대 (문법) 로 지켜온 사람이나 어른이 되어서도 아직 영생의 확신이 없는 사람이 되어 예수에게 나타난다. 예수는 그가 기억속에 담아 지켜온
율법의 문자적인 요구들을 틀림이 없이 지켰다고 대답하나 예수는 그것으로 부족하다고 말씀하신다.
율법의 행동은 분명히 있었고 또 청년의 기억속에 살아 있는 것이지만 율법의 정신이나 율법의 주인은 그에게 없었다는 그 한가지 부족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3장에 어른 니고데모가 찾아 왔을 때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고 하신 말과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이 같은 입에서 나온 말이요 또 동의어인것이다.
어린시절에 길러준 부모가 진정한 부모이고 어린시절에 늑대에게 물려간 아이가 나중에 늑대 소년이 될 수 있음처럼 하늘 나라도 어린시절인 무의식의 단계에서 하나님께 잡혀가야 하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직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율법의 자식이 되려면 최소한 열두살이 넘어야 한다는 말도 이 맥락에서 생각해 보면 율법을 지키는 일이 매우 지식적이거나 인식적인 차원에서 지켜짐을 의미하고 있는것이다. 그러나 복음과 은혜와 거저주는 일과 만져주심이 우리의 신앙의 감각적인 차원이 되고 또 그 고마움과 인간의 힘과 노력이나 시간으로 결코 갚지 못할 매우 이상하면서도 당연한 관계속으로 우리의 믿음을 들이밀고 어린아이처럼 당연한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이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인 것이다.
구원을 값없이 베풀어 주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그분의 성품의 사본인
율법과 게명을 지켜야 한다는 바로 그 인식적이고 adulterous 하고 지식적이며 기억적인 사고방식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신앙이라는 동네에서 바벨론 못지않게 위험한 생각임을 나는 성경을 통하여
배우고 있다. 아이들의 믿음으로는 그것은 당연히 부모님이 하셔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권리 남용이 오히려 온갖
예의를 갖추고 하나님답게 살아가고자 하는 그런 고상해 보이는 신앙의 경지보다 더 큰 경지라고 뜻하는 것이다. 그런 고상한 경지를 성경은 “종-slave 의 행동이라고
꼬집고 그렇지 않고 당연히 의지하고 무엇이든지 달라하는 아이들의 신앙을 옹호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아래의 어떤 글에는 고민하는 자의 하소연이 올라오고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물었던 것과 동일한 질문이 올라오나 인식적이고 기억적인 사고방식에서 우리는 아무런 해답을 갖지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율법은 어린아이에게 유익하고 어른들에게는 유익하지 않으며
새 계명은 새로 태어난 천국의 아이들에게만 준수가 가능한 것이므로 옛사람을 그대로 가진자들에겐 해당이 되지도 않는것이니 지킬까 말까를 질문할 단계도 아니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친부모에게서 태어난 친자식들은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달라하고 조르고 미안해 하지도 않는것이다.
새로난 자들이 여기에 있는가?
하나님이 이제 친부모라는 사실도 믿는가?
율법때문에 왜 고민하고 고생하는가?
여기에 기록된 것중에 하나라도 지키지 아니하고 항상 지키지 아니하는 종의 관계 보다도
이제는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한다는
새로운 도전속에서 그대는 어디에 서 있는가?
율법이 그대들의 신앙을 망쳤다면 그것은 율법이 아니고
당신의 생각과 태도이다. 즉 믿음이 없다는 말이다.
지키려 할 수록 믿음이 떨어지고 관계가 멀어지는 천국이 우리가 붙잡고 살아가는
이상한 나라임을 그대는 한번쯤 생각해 보았는가?
오직 예수라는 말이 성립이 되려면 우리는 그의 아들이 먼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민초가 이상해 졌습니다 전에는 수정이 용이하고 쉬웠는데 오늘은 전혀 수정도 안되는군요. 매우 중요한 내용이 빠졌는데 어찌 할 수가 없읍니다. 이 아래의 성경절이 결정적인 내용인데 수정으로 첨가할 수 없군요. 독자들이 끼워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위의 성경절에 연결된 성경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