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프로스트의 그 유명한 시의 글귀처럼 나에겐 가지 않은길이 참 많아 보인다.
고등학교 일학년때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조 문양 선생님은 이미 서울에서 모셔갔고
그 대신 다른 선생님 (신학을 전공하신) 이 음악과 영어를 가르쳐 주시는데 고등학교
이학년 여름쯤 그분이 내게 뜬금없이 도내 성악 콩쿠르에 나가보고 싶지 않느냐고
물으신다.
형님의 그 끔찍한 죽음으로 몰락한 우리집의 경제적 여건으로 보나 내 공부 실력으로 보나
대학을 가더라도 경제력이 턱없이 부족한 터라 쿵쿠르에 입상하면 장학금을 받고
음대를 갈 수 있다는 희망에 그러자고 하고는 연습을 시작했다.
지정곡은 Largo 이고 자유곡은 " Die weiden grenadiier-두 사람의 척탄병"으로 선생님이
결정 하셨다. 두곡 다 성량이 풍부하지 않으면 표현하기 어려운 곡들인데 선생님은 내
성량을 믿었던 모양이다. 하루에 한시간은 유성기판에서 노래를 듣고 또 한시간은
발성을 하고 다음 한시간은 노래를 연습했다.
콩쿠르가 열리던 곳이 우연이도 어머니의 모교인 신명여고 였고
그 큰 강당에서 노래를 한다음 나는 내심 일등만을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거의 기성 성악가의 성량이나 음질에 손색이 없다는 주변의 평가처럼
내 목소리와 견줄만한 학생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입상자의 이름에는 내 이름이 삼등에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실망에 실망을 한 선생과 제자 어이없어 하는데 한 사람이 닥아왔다.
심사위원중에 한 사람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이런말을 했다.
계명음대에서 주최하는 대회이니 그 학교의 성악교수들이 쥐고 흔드는데
시작도 하기전에 벌써 등수가 결정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도 나를 위해서 노력을 기울였지만 역부족이었으며
그럼에도 내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날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성악에 다시는 몰두하지 않았다.
간간이 특송을 하기도 하고 온갖이의 결혼식에 불려 다니기는 했지만.
언제 부턴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드러운 손길이 내 황량했던 신앙의 옷깃을
다시 여며주신 후 부터 나는 목소리를 앞세우는 노래를 하는것이 아니라
목소리에 실려가는 복음의 짜릿함을 노래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시절 꿈도 없이 방황하던 시절의 나를 붙잡고
내 재능의 뿌리들을 어루만지며 동고동락해 주신 그분을
나는 평생 마음속에 부등켜 안고 산다.
이제는 다른 목적으로 그길을 다시 가고싶은
지금
조심스럽게 녹이 슨
악기(?)를 다시 다듬으며 유명한 테너에게서
난생처음 한달에 두번씩 레슨을 받을 때 마다
내 재능의 뿌리를 튼튼하게 붙들어 주신
그분이 생각이 난다.
Again,
To Sir with Love
레슨받기 시작하는 fallbaramnim, 뜨거운 응원에 박수를 보냅니다. 가끔 이곳에도
"목소리에 실려가는 복음의 짜릿함을 노래" 오려주실것을 기대해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