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딸을 떠나 보내면서 전정권
제 여식(女息) 전 은경의 장례에 보여주신 성도 여러분의 뜨거운 사랑에 무어라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과 슬픔이지만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와
따뜻한 위로와 도움으로 다시 힘을 얻어 맡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앞서 보내는 것을 참척(慘慽)이라 한다지만 참으로 참혹하고 비통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평생 믿고 가르쳐온 재림과 부활의 소망으로 참고
이전 보다 그날을 더욱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잘 참아 내겠습니다.
제 아이는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와중에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소풍이라도 가면 가게에 가서 한 시간씩이나 할머니께 드릴 선물을 고르던 아이였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같은 반 아이가 세상을 떠난 것을 두고 여러 날을 슬퍼하던 아이였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신덕부장, 기도반장 등을 하면서 같은 학교의 종교 활동에 열성을 기울였습니다.
한 번도 주연(主演)을 해 본적은 없지만 학교의 행사에 늘 백그라운드를 만들고
준비물을 챙겨주는 일로 여러 번 날을 새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신학과를 가라고 했더니 “ 아빠, 나 때문에 훌륭한 목사님이
될 사람 하나가 피해를 입으면 어떻게 해요” 라는 말로 주저했습니다.
결국 치위생사가 되어 일을 하며 치과 봉사에 빠지지 않고 쫒아 다녔습니다.
그리고 별새꽃돌 과학관에 가서 학생들에게 별을 가르치고 꽃을 가르치는 일을 위해서
제 동생과 오빠까지 데리고 가서 지도자 과정을 마쳤고 그 일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서
다시 대학에 편입해 원예디자인학과를 마쳤습니다.
그것으로 부족했던지 다시 대학원에서 기독교교육학과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보건대학의 요청으로 치위생과의 조교를 하느라고 하고 싶었던 일을 미루어야 했습니다.
마석에 있는 치과에 치위생사로 다니면서 어느 추운 겨울날 맨발로 들어왔습니다.
왜 그렇게 오느냐고 했더니 일을 마치고 버스를 타려는데 갑자기 눈이 내렸다는 것입니다.
유치원 버스 하나가 어린 남자아이 하나를 내려놓고 갔는데 갑자기 내린 눈 때문에 맨발인 아이가 벌벌 떨면서
제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서 자기의 양말을 벗어서 신겨주고 목도리를 벗어 감싸 주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 이튿날 그 아이와 엄마가 목도리와 양말을 가지고 케익을 한 상자 사가지고 왔더라고 하더군요.
그 이후에도 길에서 만난 할머니에게 목도리나 장갑을 벗어주는 일을 여러번 했습니다.
제가 부족하나마 글을 쓰는 데 제 아이의 도움이 참으로 컸습니다.
서점에 갈 때마다 참고가 될 만한 책을 사오고 제가 필요한 책이 있으면 청계천 헌 책방을 뒤져서라도 사오곤 했습니다.
제게 끊임없이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아이였습니다.
보건 대학의 요청에 따라 조교를 하고 실습전담 교수를 하면서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밤 열두시나 새벽 두시, 혹은 밤을 꼬박 새워가면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밥을 못 먹은 아이들을 위해서 자기 연구실에 밥솥을 갖다 놓고 밥을 해 먹여가며 불철주야 아이들을 돌봤습니다.
학교에서 안식일학교를 맡아 학생들의 신앙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 즈음 학교에서 제 아이를 매우 힘들게 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출장 중에라도 선물을 사서 그들에게 먼저 전하곤 했습니다.
과로와 스트레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병이 생겨 학교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어 투병중이면서도
학생들의 국가고시 시험장에 빠짐없이 가서 격려하곤 했습니다.
정말 참아 내기 힘든 투병 중에도 같은 병실에 있는 동료에게 전도해서
침례를 받게 하고 그 친구들이 지금도 열심히 신앙을 하고 있습니다.
아비 되는 제가 너무 안타까워하고 힘들어 하니까 끊임없이 제게 힘내라고 격려를 했습니다.
아이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도 제게 “아빠, 힘내세요” 라고 말하더군요.
절망의 나날을 보내면서도 전혀 눈물을 보이지 않고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제 친구와 동료들을 오히려 격려하며 친구의 아이들의 생일 선물을 챙겨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극심한 고통이 있었지만 가족들에게 재림의 날을 기약하며 찬미를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제 할머니께서 즐겨 부르시던 “하늘 가는 밝은 길이”를 부르는 중에 평안하게 주님의 품에 잠이 들었습니다.
생전에 자신이 소원한 대로 신체는 한국 생명나눔본부에 기증을 해서 남김없이 주고 우리의 품을 떠났습니다.
아이를 생각하면 마치 제 심장을 뜨거운 냄비위에 놓고 볶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보여준 인내와 용서, 그리고 바보스러울 만큼 베풀고
또 베푸는 모습은 저희 남은 가족들에게 큰 깨우침을 주고 떠났습니다.
아이를 위해서 지난 3년간 매일 조석으로 기도해 주신 분들의 가없는 사랑을 잊을 길이 없습니다.
장례에 전국에 흩어져 있으면서도 찾아와 마지막 떠나는 길에
조문을 해준 600여명의 제자들과 친구들에게 무어라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극심한 고통 중에 찾아와 위로해 주시고 도와주신 모든 분들의 사랑을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위로의 글을 주신 분들에게 일일이 답글을 쓰지 못하지만 이 글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 할 수 없어서 때로는 방황하고 고민했지만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숨은 가르침(hidden curriculum) 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평안하고 안전할 때, 기도드리면 즉각 두드릴 때마다
문이 열리는 형통한 때가 아니라 오히려 문을 두드려도 계속 닫히기만 하는 막막한 상황에서
고통을 어떻게 이겨내느냐의 자세에 신앙의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라는 교훈을 배웠습니다.
고통은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고함소리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무엇을 기대하느냐보다는 삶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고통입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작은 천사 하나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기쁘게 하고 깨우치고 격려하고 한 없이 베풀고 떠났습니다.
오래 같이 있지 못하는 아쉬움 보다는 지난 세월 함께 할 수 있었던 추억에 대해 고마워하며 살겠습니다.
누구나 원하는 만큼 그렇게 오래 함께 살수는 없는 것일테니까요.
아이가 더 베풀고 싶었지만 다 하지 못한 것, 하고 싶었지만 다 하지 못한 것
남은 식구들이 이어가면서 재림의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여러분 모두의 가정에 하나님의 다함이 없는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2013년 1월 2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재림의 소망 안에 잠든
전 은경의 남은 가족들 드림
재림마을에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