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누나가 주차를 하다가 “종오야, 차 앞에 연이 걸렸다. 저 연 좀 치워줘" 한다.
차 밖으로 나가서 연을 치우려 연줄을 잡았다.
연줄을 잡은 나의 모습을 보면서 재밌는 생각이 들었다.
“야~ 나도 연줄을 다 잡네. 누나 사진 좀 찍어줘.”
난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난 종오형이 부러워.”
“왜?”
“형은 자유로우니까.”
“넌 안 자유로워?”
“그럼, 내가 무슨 짓을 하면 아버지, 장인, 사돈의 팔촌이 다 걸리거든. 그래서 아무 것도 맘대로 못해. 근데 형은 걸리는 게 없으니까 무슨 일이든 소신껏 할 수 있잖아.”
하지만 그는 병풍 막처럼 쳐져있는 그의 연줄로부터 오는 절대적 혜택에 대해서는 언급을 안했다.
연줄이라는 것이 예수님을 죽였다.
자신들의 삶을 지키려 만들었던 세상의 연줄.
크면 클수록 더 좋았으리라.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요 11:49, 50
메시야의 생명까지도 버리게 만들만큼 그들에겐 소중했던 연줄..
연줄이 있는 사람은 혜택이 많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선택할 자유는 없다.
예수님과 엘리야, 침례요한은 세상 연줄을 잡지 않았다.
연줄이 있는 자는 진실 되거나 거짓된 목소리를 여러 개 만들 수 있다.
연줄이 없는 자는 목소리가 하나다.
간혹 불순한 다수가 순수한 소수에 마녀라는 누명을 씌어 죽인다.
순수한 소수는 속절없이 당한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전 4:1
그 피해에 익숙한 단체 중 하나가 재림교회일 것이다.
우리는 힘 있는 다수를 향해 우리가 이단이 아님을 온갖 방법으로 증명해왔다.
그래서 우리는 소수의 서러움을 너무도 잘 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고 서글픈 일이 하나 있다.
100년을 넘게 다수에 의해 이단이라는 누명을 쓰고 살아온 우리 사회에서도 그와 같은 폐단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과부 심정 홀아비가 잘 알 텐데도 그렇게 한다.
사실 내게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연줄이 하나 있다.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과부와 고아, 또 억울한 사람들의 연줄이 되신다.
그분의 줄은 사랑으로 엮은 것이다.
그 줄은 너무 강해서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다..
나의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도 그 줄을 잡았으면 좋겠다.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당하는 자를 신원하시며 궁핍한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리이다” 시 140:12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 39
푸르른 하늘가에 가서 어린아이처럼 뛰어놀고 싶다.
선악간의 대쟁투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