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식어질 때
목숨을 내 걸고 하는 것이 사랑인가?
그렇다고 대답하는
분들이 몇이나 될까?
그러나 사랑은 우리가 알다시피 목숨을 내 걸고 하는 것이다.
아니라고? 그렇다면 그것은 사랑이란 거창한
이름을 사용할 수 없다.
세상은 유행가 가락에서조차 사랑을 최고의 것으로 논한다.
예수쟁이들만 사랑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 주위에도 우리보다 더한 가족 사랑으로 뭉쳐진 사람들 보기보다 많다.
가족을 위해서 친구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그리고 조국을
위해서
모든 것 희생한 사람들 매우 많다.
뒷일 걱정도 하지 않고 가족에 대한 일들 제쳐 두고
일념이란 말이 무색하게
뛰어드는 사람들 매우 많다.
그래서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된다.
우리는 내 조국 내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해 본 일이 있는가?
나만이 구원 얻겠다고 소인배적 사고(思考)로 살지나 않았는지
다시 한 번 뒤돌아보는 여유도 가져야겠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처음 믿을 때 가졌던 그 각오가 그대로 계속한다고 생각하는가?
계 2:4
"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희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불붙듯이 일어나던 그 사랑,
가만히 앉아 있을 여유조차 없던 결심들 이젠 다 어디로 가고
나만
알고 내 가족만 알고 내 입맛만 아는 시대가 되었다.
처음 사랑은 언제 사라졌는지 조차 기억에 아물거리고
하나님을 믿는 빈껍데기만
남아있는 그런 사랑을 해 본 적은 없는지
이렇게 허울 좋은 사랑에 젖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일까?
육에 속한 사람이 영에 속한 일을 어떻게 이해할까?
나는 육에 속한 사람이 영적에 속한 것을 이해하는 일을 이렇게 생각한다
요3:6
"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육에 속한 사람은 영에 속한 일도 육적으로 먼저 이해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육에 속했기에 영에 속한 것이 무언지 잘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가 죽도록 사랑해 본 경험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있다.
인간적으로 덤덤한 사람이 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할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아라.
먹은 사람이 물 쓴다라는 말이 있듯이 사랑도 해 본 사람이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한다.
베드로가 가야바의 집 뜰에서 인자하신 주님과 눈을 맞추지 않았더라면
자기의 잘못을 잘 모르든지 늦게야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의 눈길에 녹아 버린 베드로는 닭이 울자
자기 선생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때의 일을 평생
후회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사람이 위대하게 되려면 그런 경험을 가져야 한다.
인간의 일도 모르면서 어찌 하늘의 일을 논할 수
있는가?
우리는 사랑을 육체적으로 설명하고 정신적으로 분석하고 영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게 그리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가족 간에는 자신이 깨어지는 경험을 가져야 그 끈적한 사랑을 이해하기 쉽게 된다.
우리는 그가 먼저 사랑하셨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가 언제 나를 사랑했다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는가?
성경에 적혀있다고? 그걸 어떻게 믿는가? 무조건 믿으라고?
세상에 얼마나 과학이 발달했는데 그런 것을 무조건 믿을 수 있나?
예수께서도 자기 제자들을 부르실 때 무조건 믿으라고 하시지
않았다.
그 무식하고 가난한 어부들도 무조건 따르지 않았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내 생애 어떤 부분에서 주께서
말씀하셨을까?
우리는 냉철히 생각해 봐야 한다. 분명히 나다나엘과 같은 그런 일이 있을 것이다.
직접 말씀하시던 그 시절과 다른
방법으로 주께서 내 마음에 작동하시면서
나를 부르셨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 사랑이 우리에게 왔을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가졌었는가?
그가 먼저 사랑하고 있다고 하시는데 나는 어떻게 반응했던가?
요사이 살아가면서 주께서 나를 지금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서로 이야기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