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7일
/ 성령강림절 여덟 번째 주일
이 예수를 어찌 할까나.......
마가 3:1-6
곽건용 목사
기독교인이 예수가 누군지 모른다
종교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지만 쉽고 간단히 말하면 ‘절대자’를 믿는 것입니다. 절대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종교란 말입니다. 그런데 절대자 하느님에 대해서 얘기하고 가르친
분은 셀 수 없이 많고 그것들이 다 같진 않습니다. 그 중 기독교는 ‘예수님이 가르친’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그저 막연하게 일반적인 절대자 하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예수님이 믿고 가르친 하나님을 믿는 종교란 얘기입니다.
그러면 왜 하필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질문입니다. 절대자 하나님에 대해 가르침을 베푼 수많은 위인들과 성인들 중에 왜
하필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정당합니다. 제 답은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믿고 가르치신 하나님이 안 믿어지면 안 믿으면 됩니다. 그 결과가 어떻든 그것은 그 사람이 선택한 것이니 감수하면 그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은 자기의
선택의 결과를 감수하고라도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문제는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아마도 미래에까지)
기독교인들 중에는 자기가 믿는 예수님이 누군지, 그분이 무슨 생각을 했고 무엇을
가르쳤으며 어떤 행동을 했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데 있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어떤 하나님을 믿었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대부분은 예수님이 유대인이니까 막연하게 구약성서의
하나님을 믿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구약성서가 보여주는 하나님은 하나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은 다양한 얼굴을 가진 복잡한 분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은 이 다양하고 복잡한 하나님의 모습들 중에서 어떤 것을 진짜 하나님으로 믿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앞으로 더 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두세 달 동안 역사적 예수를 설교하겠습니다.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란 예수님이 실제로 누군지를 따져 묻고 답을 찾는 일입니다. 주후
1세기 초기에 팔레스타인 땅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30여 년을 살다가 십자가에 달려
요절한 나사렛 사람 예수라는 분은 어떤 생각을 했고 무엇을 믿었으며 뭘 가르쳤고 어떤 사람들과 친구였으며 누가 그분의 적이었는지,
그리고 그를 죽인 자들은 누구였는지를 역사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역사적 예수 연구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예수의 실제적이고도 역사적인 모습을 찾는 시도를 가리킵니다.
기독교가 예수를 믿는 종교라면 기독교인이 믿는 예수가 누군지 알아야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실제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면서도 그 예수가 실제로 누군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걸 알고자 하는 노력은 별로 기울이지 않는 게 현재 기독교의 사정입니다. 그 증거는 수없이
제시할 수 있지만 오늘은 ‘사도신경’에 대해서만 얘기해보겠습니다.
사도신경에는 역사적 예수가 없다
우리는 예배에서 ‘사도신경’을 외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를 방문한 사람들 중에는 ‘왜 이 교회는 사도신경을 외지 않는가?’라고 항의조로 묻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많은 교회에서 사도신경을 신앙의
시금석처럼 여기고 있는데 그걸 외지 않으니 이상한 모양입니다. 그들 중엔 사도신경을 외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라고까지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사도신경을 외지 않는 우리는 교회가 아닌 셈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사도신경을 외지 않는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신경을 외워야 교회는 아닙니다. 그걸 외지 않더라도 조금도 모자라지 않은 교회일 수 있습니다. 참된 교회의 시금석은 사도신경을
외는가 여부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외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신조에 옳지 않은 내용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이 신조는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고백에 있어서 균형이 갖춰져 있지 않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분이 문제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사도신경은 예수의 신성, 곧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심각한 도전을 받았던 시기에
쓰였다고 추측됩니다. 신경의 대부분이 예수에 대한 고백으로 이루어져 있고 또 그 중 대부분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점을 강조하니 말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외아들이고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에게서 났으며 부활하여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 우편이 앉아 계시다가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는 것 등이 모두 예수의 신성에 대한 고백입니다. 사도신경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봐도 ‘역사적 예수’에 대한 얘기는 한 마디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한 얘기는 한 마디도 없습니다. 살이 있고 피가 흐르는 예수가 사도신경에는
없습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해 서술하는 유일한 대목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대목인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말에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되어
있지만 라틴어 원문에는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under Pontius Pilate)라고 되어 있습니다.
곧 원문에 따르면 예수는 빌라도에 ‘의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빌라도 ‘치하에서’ 죽은 겁니다. 누가 예수를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모호합니다. 사도신경은 빌라도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었을까요?
예수가 누구이고 뭘 가르쳤는지 제대로 알려면 그분이 뭘(누구를)
믿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는 믿음의 ‘대상’이기만 했던 게 아니라 ‘주체’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도 뭔가를 믿었고 누군가를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가
누굴 믿었을까요? 하나님? 물론 맞지만 이것으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게 거의 없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은 너무 당연해서 하나마나한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가 ‘어떤’ 하나님을 믿었는지를 알아보려면 얘기가 그리 간단하진 않습니다. 예수는 ‘어떤’ 하나님을 믿었을까요? 예수가 유대인이었으니까 당연히
구약성서의 하나님을 믿었겠지만 답이 그리 쉽지 않은 이유는 앞에서도 얘기해했듯이 구약성서가 보여주는 하나님의 모습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매우 다양합니다. 때론 그것들이 서로 어울리지 않고 상충되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서 예수가 믿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지가 문제입니다. 여러분 중 어떤 분에겐 이 말이 충격일 겁니다. 구약성서의 하나님이 한 분인데(유일신!) 그 하나님의 모습이 다양하다니! 예수가 믿은
하나님이 그 다양한 하나님 모습들 가운데 하나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겁니다. 이론적으로 백 마디 말을 하기보다 예를 하나 드는 게 더 이해하기 쉽지요. 오늘 본문으로 마가복음
3장을 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벌어진 일
어떤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제물 바치는 일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했지만 토라를 배우고 가르치고 예배하는 일은 회당에서 했습니다. 회당은
말하자면 기독교인들에게 교회당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거기엔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예수님은 그때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때 거기에는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스파이들도 있었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무슨 짓을 하는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알고
계셨을까요? 아마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더러 “일어나서 이 앞으로 나오너라.”라고 말씀하시고는 회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이 질문은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묘한 질문입니다.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는 질문이지요. 안식일이 어떤 날입니까? 안식일은 일하지 않고 쉬는
날입니다. 그래서 편안할 ‘안’(安)에 숨쉴 ‘식’(息)자를 쓰는 안식일(安息日)이 아닙니까. 편안하게 숨 쉬는 날이니 일하지
말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일을 하면서 편안하게 숨을 쉴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하지 않고 쉬는 날인 안식일에 어떤 일을 해야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착한 일을 하는 게 옳은지 악한 일을 하는 게 옳은지 말입니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이 질문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바리새인들과 달리 이해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 안식일은
그냥 쉬는 날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겐 안식일도 일하는 날이었습니다. 쉬는 게 안식일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안식일에 무슨 일을 하느냐가 문제였습니다.
착한 일을 하느냐, 악한 일이냐? 이게 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떠오르는 질문은 무엇이 착한 일이고 무엇이 악한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절하게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이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말문이 막혔다는
겁니다. 왜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했을까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이 질문이 그토록 대답하기 어려웠을까요?
예수님은 그들이 대답하지 못하는 걸 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보시고 탄식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굳어져 있어서 대답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출애굽 당시 파라오가 떠오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가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키지 않은 것은 그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얘긴 그만 하고 제가 하고 싶은 얘기로 넘어갑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어떤 하나님을 믿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물론 한 단면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 하나님은 누가 안식일을 어기는지를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다가 이를 어기는 자가 발견되면 당장 엄히 처벌하는 분이 아닙니다.
안식일 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사람들이 노심초사하고 전전긍긍하는 걸 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란 얘기입니다. 그 하나님에게는 안식일을 주신 이유와 목적이 분명합니다. 안식일에 사람들더러 쉬라고 하신 이유와
목적이 분명한 하나님, 그래서 사람들이 그 이유와 목적이 맞게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안식일을 주신 목적은 사람을 살리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쉬어야 생명을 부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에 쉬라고 하신 이유는 안 그러면
사람이 죽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루도 쉬지 않고 열흘, 스무날,
한 달, 두 달을 일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사람이 살 수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고 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하나님이 안식일을 주셨다고 믿었습니다.
곧 생명을 갖고 있는 모든 존재가 그 생명을 유지하고 살라고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는 예수께서 한 손이 오그라든 한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곳은 회당이고 그 날은 안식일이었지만 그런 것들이 예수님을 막진 못했습니다. 한 손 오그라든
사람은 그렇게 태어난 사람입니다. 선천적 장애인이었지요. 요즘도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여전히 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심했습니다. 더욱이 당시 유대사회에서 장애인은 단순히
장애인이 아니었습니다. 장애인은 누군가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받아들였습니다. 본인이 아니면 그의 부모가 죄를 졌고 그래서 하나님의 벌을 받아 그렇게 태어났다고 믿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는 사회에서 외면당하는 사람이었고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던 겁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게 옳을까요, 죽이는 게 옳을까요?
이 사람을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님이 봤습니다. 그분은 스파이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보통 사람의 생각에는 몸조심하는 게 맞습니다.
기왕이면 권력자들 눈 밖에 나지 않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직 본격적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그들 눈 밖에 나면 될 일도 안 될 터이니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예수님은 그들 눈치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지켜보든 말든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들이 쳐놓은 올가미에 걸리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던 겁니다. 예수님은 무엇에 근거해서 이렇게
행동하셨을까요? 무엇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이렇게 과감하고 위험한 행동을 하게 했을까요? 저는 하나님이 이렇게 행동하게 만들었다고 확신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행동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길 원한다고 믿었기에 그렇게 행동하셨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무관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았고 그 행동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기에 이렇게 행동했을까요? 그렇게 행동하려면 중요한 유대인의 관습을 무시하거나 뛰어넘었어야 했습니다. 안식일 계명과 관련해서
바리새인들이 만들어놓은 복잡한 전통을 무시해야 했던 겁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다 무시하셨습니다.
하긴 그들의 관습이 무슨 대수로운 일이었겠습니까. 당연히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구약성서에 명시되어 있는 율법조항까지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사람이
만든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주신 계명 말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그 계명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민수기 15장을 보면 안식일에 땔감을 해왔다는 이유로 사형당한 사람 얘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땔감을 해왔다고 해서 모세 앞에 끌려왔답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이 없어 처리를 미루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모세더러 그를 처형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만일 누군가 예수님에게 와서 민수기의 에피소드를 말하면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물었다면 어떻게 대답하셨을까요? 이 하나님과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크게 다르다고 대답하지 않으셨을까요? 예수님은 안식일에 땔감 해왔다고 해서 죽이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예수님에게
그런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믿는 하나님은 안식일에 착한 일 하라는 하나님이고 생명을 살리라는 하나님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결국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주셨습니다. 거기 있던 사람들이
기적에 놀라거나 그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다른 기적 사건들에는 있는 바로 그 반응 말입니다.
그들은 그저 예수님의 선언을 듣고 놀라서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굳은 마음을 보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얘기를 듣습니다. 그 일을 본 바리새인들은 나가서 즉시 헤롯 당원들과
만나 예수를 없애버릴 방도를 모의했다는 얘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에 대해선 다음 주일에 자세하게 얘기하겠습니다.
마가는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는 얘기를 지나가는 것처럼 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가는 예수의 사역 초기부터 누군가가 그분을 죽이려 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로마제국 치하 유대사회에서 당시 누군가가 예수를 죽이려 했다는 겁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이유 없이 죽이진 않습니다. 사이코페스가
아니라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진 않지요. 사람이 사람을 죽이려 하는 데는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밝히는 일은 예수가 누구이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아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 모두의 죄 탓으로 돌리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규명이 아니라 신앙의 해석입니다.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신앙의 해석입니다. 저는 신앙의 해석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무의미하다고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신앙의 해석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과 역사적 사실 규명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번 ‘역사적 예수’ 설교를 통해 알아보려는 것도 신앙의
해석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얘기하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를
‘믿는다’는 일은 곧 예수를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처럼 사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중엔 어떤 신조를 고백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를 따라서 사는 게 아니라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됐다는 얘기입니다. ‘Living Jesus’가 아니라 ‘Confessing
Jesus’가 신앙의 내용이 된 것입니다. 머리로 인정하고 입으로 고백하면 그것으로
충분하게 됐습니다. 이것은 큰 변화입니다. 아니, 엄청나고 치명적인 변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더 나빠졌습니다. 지금은 예수를 사는
것도, 고백하는 것도 아닌 예수를 ‘구경하는’ 것이 신앙이 됐습니다. 오늘날 신앙은 ‘공연구경’과 비슷합니다. 노래 잘 하고 춤 잘 추는 사람이 앞에 나와서 노래하고
춤추면 그걸 구경하면서 박수치는 게 신앙의 전부가 되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요즘은 신앙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예수 살리미’나 ‘예수 따르미’를 보기 힘들어졌습니다. 우리가 역사적 예수를 망각한 것과 이런 현실이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번에 역사적 예수를 설교하는
까닭은 우리가 구경꾼의 자리에서 벗어나서 예수를 삶으로 사는 자리로 나아가 보자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 설교는 다음 주에 계속됩니다. ♣ 노란 색상 배경은 퍼온이가 보탠 것.
고맙소!
It is so powerful state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