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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의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란 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4, 5월에 숲이 무성해지고 과실이 갓 열려 새들이 우지질 때, 여린 파초 잎을 딴다.

파초 잎새의 줄기 사이에 왕유(王維)의 ‘망천절구(輞川絶句)’를 미불(米芾)의 글씨체로 쓴다.

넓은 파초 잎에 가득 써진 글씨가 예뻤던지 곁에 있던 꼬마가 갖고 싶은 눈치를 보인다.

파초 잎을 꼬마에게 냉큼 주면서 대신 호랑나비를 잡아오게 한다.

호랑나비의 머리와 더듬이, 눈과 날개에 어려있는 금빛과 푸른빛을 한참동안

찬찬히 살펴보다가 산들바람 사이로 날려보낸다.

이렇게 관찰한 나비와 꽃들, 그밖에 온갖 사물들에 대해 그는 그때그때 메모해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메모가 모여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라는 참으로 아름다운 한 권의 책이 되었다.


박종채가 아버지 박지원의 생전 기억을 적은 《과정록(過庭錄)》에는 연암의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아무리 지극히 미미한 물건, 예컨대 풀이나 짐승이나 벌레라도 모두 지극한 경지가 있으니, 조물주가 만든 자연의 현묘함을 볼 수가 있다.”

박종채는 아버지를 또 이렇게 기억했다.

“매양 냇가 바위에 앉아 들릴 듯 말 듯 읊조리거나 느릿느릿 걷다가 문득 멍하니 무엇을 잊어버린 듯 하셨다.

때로 오묘한 깨달음이 있으면 반드시 붓을 잡고 기록을 해서, 깨알같은 글씨로 쓴 조각조각 종잇장들이 상자에 가득 차고 넘쳤다.”


박 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을 때마다, 나는 자꾸 흔들리는 말 잔등 위에 다리를 꼬부리고 올라앉아

작은 공책에다 보고들은 것을 끊임없이 적고 또 적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옛 사람들의 그 많은 여행기를 읽노라면, 나는 이들이 여행에 목적이 있었는지

아니면 여행기를 쓰는데 목적이 있었는지 분간 할 수 없어 어리둥절할 때가 있다.

길가에서 본 시시콜콜한 풍경이나, 여관 방 벽에 써진 낙서,

심지어 길가다 만난 중국 여자의 헤어스타일이나 악세사리에 이르기까지

기억력만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관찰의 기록들이 글 속에는 다 적혀 있다. 모두 생활 속에 체질화된 메모 습관 때문이다.


책을 읽다가 좋은 대목이 나오면 곧바로 메모지에 옮겨 적었다.

시간이 없을 때는 책에 찌를 찔러 표시를 남겨 두었다.

그러다가 귀양을 간다거나 벼슬에서 물러나 시간을 얻게 되면, 메모지를 수습해서 주제별로 정리하고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서 책으로 엮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은 제목 그대로 지봉 이수광이 읽은 책을

주제별로 분류해서 거기에 자신의 설명을 덧붙인 책이다.

김만중의 《서포만필(西浦漫筆)》이나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같은 책들도

기특한 메모광들의 끊임없는 기록과 사색의 결과물이다.

그밖에 각종 문집에 실려있는 ‘잡지(雜識)’나 ‘잡록(雜錄)’ 또는 ‘방필(放筆)’이나 ‘산필(散筆)’ 등이

들어간 제목의 글들은 모두 일정한 체계 없이 생활 속에서 해온 메모들을 모은 것이다.

정조 임금도 그 벅찬 집무의 여가에 틈틈히 메모를 적어 《일득록(日得錄)》을 남겼다.
성 호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도 자신의 관찰과 메모를 주제별로 엮은 것이다.

그의 저술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것에 《관물편(觀物篇)》이 있다.

경기도 안산에 은거하면서 전원 생활 속에 듣고 본 것을 메모하고,

여기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 것이다. 모두 76개의 항목으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 하나.

새 중에는 벌레를 잡아먹는 것이 있다. 수풀 속에서나 거름 흙 또는 늪에서 벌레를 구하여 얻는다.

고기를 먹는 것도 있다. 이것들은 산야에서 사냥하여 얻을 수 있다.

솔개는 성질이 벌레를 잡아먹지도 못하고, 재주가 꿩이나 토끼를 사냥하지도 못한다.

다만 하루 종일 빈 마을 사이를 맴돌며 멀고 가까운 곳을 엿보다가,

병아리 따위를 훔치곤 한다. 내가 이를 보고 말하였다. 아! 사람 또한 이 같은 자가 있다.

마을 위를 빙빙 선회하는 솔개를 보다가, 자신의 노력으로 먹이를 찾지 않고

남이 이룩해 놓은 것을 한 순간에 날치기하듯 훔쳐가는 쓰레기 같은 인간에 대한 혐오로 생각을 발전시켰다. 다시 한 도막.

밭 에다 오이를 심었는데 날이 가물어 마르려 하였다. 물댈 일을 의논하니 어떤 사람이 말했다.

“막 마르려 하는데 물을 주면 오이에게 도리어 해가 될 것입니다.

차라리 잠시 그대로 두었다가 비오는 날을 기다림만 못합니다.”

이튿날이 되자 잎이 말라 떨어져 버렸다. 이에 비로소 물을 주니, 비록 많이 주었지만 죽고 말았다.

내가 말했다. 심하도다! 남의 말을 들어 일을 망쳤구나. 때를 놓치면 소용이 없다. 잠깐의 방심으로 1년 농사를 망치고 만다.

그냥 본 것을 적기만 한 것이 아니다. 관찰에 그치지 않고, 그 결과를 사색하여 삶의 문제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것을 반드시 기록으로 남겼다. 생각의 힘은 그냥 길러지지 않는다.


출처: 정민 교수의 홈 페이지 http://jungmin.hanyang.ac.kr/ 독서론과 문장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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