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조회 수 1569 추천 수 0 댓글 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류시화 시인의 글이다.


프랑스 시인 장 루슬로의 시 <또 다른 충고>를 다시 읽는다.


"고통에 찬 달팽이를 보게 되거든 충고하려 들지 말라

그 스스로 고통에서 벗어날 것이다

너의 충고는 그를 상처 입게 만들 것이다

하늘의 선반 위로 제자리에 있지 않은 별을 보게 되거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라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K를 처음 만난 것은 서울 동숭동의 학림다방에서였다. 

대학교 신입생인 나는 서른한 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전혜린, 

화가 장욱진, 시인 김종삼이 출입하던 전설적인 

학림다방을 학교보다도 더 자주 드나들었다. 

수업을 등한시하고 그 목조 건물 이층 구석에 앉아 라벨의 볼레로를 신청하고는 

시를 쓰고 카뮈와 랭보와 로르카를 읽었다.


어느 주말, 다방에 사람이 붐벼 한 여학생과 합석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서로에 대해 무관심했는데, 

친구를 기다리는 듯한 그녀의 태도가 몹시 눈에 거슬렸다. 

거슬린 정도가 아니라 한심해 보였다. 

나처럼 대학 신입생인 것이 분명한 그녀는 진한 화장에 껌을 씹으며 

연신 손거울을 꺼내 머리 모양을 매만졌다. 

그 무렵 나는 가진 것은 없었으나 문학적 자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433행이나 되는 엘리어트의 장편시 <황무지>를 줄줄 외워 

문예장학생 면접시험을 단번에 통과한 문학청년이었다.


그녀의 속물스런 모습에 화가 난 나는 정색을 하고서 

처음 보는 그녀에게 격한 질책과 충고를 던지기 시작했다. 

지금의 이 불온하고 부조리한 시대에 고뇌로 가득 차야 할 대학생이 

그렇게 아무 의식 없이 살아도 되는 것인가가 비난의 핵심이었다. 

나는 충고를 넘어 울분을 터뜨렸고, 그녀는 놀라서 커다랗게 뜬 눈으로 

한 마디 대꾸도 못하고 나의 자기 일변도의 주장을 들어야만 했다. 

옆 테이블의 사람들도 놀라는 표정이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던가. 

그녀는 나의 비난에 얼굴을 들지 못했고, 스스로 자신의 말을 제어할 수 없게 된 나는 

달리 수습도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오는 것으로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나는 나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잊기 위해 

낮술에 취해 마로니에 공원 벤치에서 잠이 들었다. 

감추고 싶은 내 젊은 날의 자화상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녀 K가 학림다방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화장도 하지 않았고, 

긴 머리는 단발로 짧아져 있었으며, 그

녀의 눈빛은 형언할 수 없는 세계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 왔다고 했으며, 

무섭기까지 한 얼굴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후 4년 동안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한 사람의 삶을 말하는 것은 때로 한 시대를 말하는 것일 때가 있다. 

그 사람의 삶이 우회하지 않고 시대와 격렬하게 부딪쳤을 때 그렇다. 

그날 이후,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이 이어지는 그 4년 동안 

K는 반정부 데모에 온몸을 던졌으며, 혁명 전사가 되었고, 

학교 옥상에 올라가 자해까지 하며 독재 타도를 외쳤다. 

운동권 핵심 세력이 뒤에 있을 때 K는 몸을 사리지 않고 

맨 앞에 서서 정의를 부르짖었다. 돌아온 대가는 가혹했다. 

그녀는 금방 수배자가 되었고, 여성의 몸으로 두려움을 무릅쓰고 

누군가에게 하룻밤 신세를 져야만 했으며, 끝내는 체포되었다. 

그리고 2년 여의 감옥 생활 동안 혹독한 취조로 정신의 문제까지 얻었다.


내가 대학 졸업반일 때 형기를 채우고 나온 그녀가 나를 찾아왔다. 

그때는 학림다방이 문을 닫고 다른 주인에게 팔려 

건물도 새로 짓고 이름만 남아 있었다. 내가 다니는 대학 근처 

카페에서 나는 그녀와 마주앉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시대의 부조리와 부딪치지도 못했고, 

밖에서 최루탄이 터질 때 골방에 앉아 시를 썼으며, 

세상의 문제보다 나 자신의 문제와 씨름하느라 청춘기를 다 보냈다. 

그녀가 차가운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고 있을 때 

그녀에게 '의식 있는 삶'을 외치던 나는 마음의 문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진리의 깨달음을 진실의 실현보다 우선시한 어리석은 삶이었다.


그녀 또한 말이 없었다. 

차라리 그녀가 나를 질책하고 무슨 말을 하기를 바랐는데, 

그저 긴 침묵만이 이어졌다. 마지막에 나는 간신히 

나로 인해 망가진 그녀의 삶에 대해 참회했고,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 의연하게 말했다. 

나를 만나지 않았으면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그 삶이 더 나은 삶이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져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작가에게는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글의 소재가 된다. 

작가라면 어떤 소재로든 한 편의 완성된 글을 쓸 수 있다. 

그러나 K는 단순한 글의 소재가 될 수 없다. 

그녀는 나의 아픔이고 회한이고 참회이다. 

뒤돌아볼 수조차 없는 나의 상처이다. 

얼마만큼 진실했는가. 얼마만큼 치열했는가. 

나는 K 앞에서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 다만,

K의 삶이 그 이후의 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고백해야만 할 것이다. 

그녀는 마치 삶은 이렇게 불태워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듯했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치열하게 추구하려고 노력했고, 

그것이 그녀에 대한 나의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더는 길이었다. 


어떤 글은 이렇듯, 오랜 후의 고백이고 고해성사이다.


주) 제목은 옮긴이 마음대로 지은 것이다. 

      거위의 죄책감과 고해성사에 깊은 공감을 느끼며...

  • ?
    박희관 2013.09.11 14:10

    좋은글 감사 합니다.

     

    자신이 남들 보다 깨여 있다고 생각 하는 모든이가  한번 곱씹어 보아야할 문제라고 생각 됩니다.

     

     무력한 관념 보다는  작은것 이라도 행동 하는 자가 돼야 할것 같네요. 

  • ?
    아기자기 2013.09.11 19:52

    생각만 하는 것보다는 작은 것 하나라도 행동하는 것이 나은데

    단 그것이 정의로울 경우에만 한할 것입니다.

    그 행동이 정의롭지 못하다면 차라리 게으른 달팽이가 더 낫겠지요^^

    감사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오케이, 오늘부터 (2014년 12월 1일) 달라지는 이 누리. 29 김원일 2014.11.30 11980
공지 게시물 올리실 때 유의사항 admin 2013.04.06 38310
공지 스팸 글과 스팸 회원 등록 차단 admin 2013.04.06 55214
공지 필명에 관한 안내 admin 2010.12.05 87118
9435 기가막혀 탱크 2013.08.26 1829
9434 안타까운 탈북자 이야기 2 이흥모 2013.08.26 2010
9433 개와 고양이 -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6 아기자기 2013.08.26 1799
9432 檢 "원세훈, 댓글 민간요원 동원·관리 직접 지시" 1 모퉁이 돌 2013.08.27 1986
9431 여성 고무신에 좌우가 없는 이유는? file 아기자기 2013.08.27 2307
9430 金氷三 (김빙삼)옹 > 다시 보는 예언 ㅋㅋㅋㅋ 1 金氷三 2013.08.27 3025
9429 당신의 00가 궁금하다. 2 음모 2013.08.28 1878
9428 말할 수 있는 사회. 1 프로젝트 2013.08.28 1809
9427 매우 정치적이신 연합회장님? 6 김주영 2013.08.28 1905
9426 느낌 아니까 1 탱크 2013.08.28 2188
9425 전우가 남긴 한마디의 허성희와 최종오가 독도에서 만나다! 1 file 최종오 2013.08.28 2007
9424 머저리들2. 2 박휘소 2013.08.29 1969
9423 영기(靈機; Intelligent) 와 영기(靈氣; Reiki) 1 5 무실 2013.08.29 1922
9422 [평화의 연찬 제77회 : 2013년 8월 31일(토)] ‘우리의 책임과 의무’ (사)평화교류협의회(CPC) 2013.08.29 1553
9421 김종찬 - '산다는 것은'(1995) 1 serendipity 2013.08.29 2328
9420 머저리들3. 3 박휘소 2013.08.29 1742
9419 슬픔이 기쁨에게 4 좋은말씀 2013.08.30 2004
9418 유명 목사님의 육성 사랑고백(Happy Losers) file 최종오 2013.08.31 1969
9417 내 앞에서 화살에 맞았다며 아파할 때... 4 file 아기자기 2013.09.01 1802
9416 Try to remember 2 바다 2013.09.01 1643
9415 베리칩 받으면 지옥 갈까요? 2 jhdh 2013.09.02 1901
9414 인본주의 2 김균 2013.09.03 1405
9413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2 김균 2013.09.03 1536
9412 '이석기 사건' : 종북 사냥에 대해 가장 잘 쓴 글 중 하나 김원일 2013.09.03 1772
9411 사회원로들...“국정원, 이석기 수사 여론호도용으로 악용말것 1 모퉁이 돌 2013.09.03 1380
9410 사상의 자유와 매카시즘 안티매카시즘 2013.09.03 1456
9409 노벨문학상에 추천된 허성희의 독도찬가(허성희와 최종오 진행) file 최종오 2013.09.03 2237
9408 탄자니아 다종교가 평화로운 이유는 김다해 2013.09.04 1752
9407 입이 백개라도.... 여기에, 그 잘난 입을 가진 분들 다 어디 갔나???? 9 User ID 2013.09.04 1990
9406 유신의 추억 망령 2013.09.04 1562
9405 [꼭 퍼가주세요]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꼭 봐야 할 동영상 <백년 전쟁> 망령 2013.09.04 1664
9404 종교 너머 아하! 재림교회에 침투한 종교다원주의.... 2 file 마린 2013.09.04 1879
9403 아씨 노씨 그리고 아씨 단군왕검 4 김균 2013.09.04 1883
9402 선사와 크리스찬 4 김균 2013.09.04 1471
9401 관리자님께 - 실종신고 2 아기자기 2013.09.04 1873
9400 세계의 알몸을 보라 3 삼식유파 2013.09.05 1730
9399 나는 꼴통이다 꼴통 2013.09.05 1755
9398 메카시즘의 광기 ( 펌글 ) - 한겨레 신문에서 7 꼴통 2013.09.05 1498
9397 평화의 연찬 제78회 : 2013년 9월 7일(토)]‘우리 역사 속에 나타난 선비들의 책임과 의무’ (사)평화교류협의회(CPC) 2013.09.05 1660
9396 생각하고 살아가자 꼴통 2013.09.05 1327
9395 국정원 직원, '박근혜 대선캠프' 홍보글 직접 퍼날랐다 1 거지 2013.09.06 1898
9394 용감한 아가씨 그리고 아름다운 참빛 2013.09.06 2157
9393 영국도 등돌린 美 시리아 공습, 한국은? 다락방 2013.09.06 1605
9392 천암함 상영중단. 3 암흑기 2013.09.06 1729
9391 천사1515의 외침. 외침 2013.09.06 1983
9390 머저리들4(잔치는 끝났다) 박휘소 2013.09.07 1883
9389 닭털~~ 닭털의부활 2013.09.07 1595
9388 '천안함' 측 "상영중단 통보, 민주주의 후퇴" 처남 2013.09.07 1753
9387 생각할수록 우습기만 하네. 또라이 편식쟁이들만의 게시판... 3 달수 2013.09.07 1874
9386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것 꼴통 2013.09.07 1695
9385 징그러운 목사님들 꼴통 2013.09.07 1939
9384 쉼도 그 곳에서는 쉬어간다 . - 원철 스님 꼴통 2013.09.07 1961
9383 더듬이가 긴 곤충 되어 거짓말을 타전하다 4 아기자기 2013.09.07 1883
9382 천국에 가려면... 3 박희관 2013.09.08 1495
9381 "나는 왜 이석기 체포동의안에 찬성했나" 모퉁이 돌 2013.09.08 2150
9380 나는 오늘 국정원에 신고 당했다 2 안티매카시즘 2013.09.08 1504
9379 권순호목사 vs 안드레아 보첼리 file 최종오 2013.09.08 3366
9378 천국과 지옥 - 박희관님에게 화답 1 김주영 2013.09.09 1569
9377 Herem or Hesed southern cross 2013.09.09 1284
9376 한국 천주교회가 심상치 않다 4 꼴통 2013.09.09 2053
9375 독도는 한국 땅 한국은 일본 땅 꼴통 2013.09.09 1863
9374 우리가 ‘개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 6 꼴통 2013.09.09 1794
9373 User ID 님에게 5 꼴통 2013.09.10 1413
» 백조가 되어 날아간 학림다방 달팽이와 거위의 고해성사 2 아기자기 2013.09.10 1569
9371 예수가 목사 안반가워한다 1 김균 2013.09.10 1462
9370 생태계는 말한다 김균 2013.09.10 1618
9369 어디서 살면 제일 좋을까요? 2 김균 2013.09.11 1870
9368 어느 국문학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김원일 2013.09.11 1715
9367 때가 되면 보여 주리라. 7 박희관 2013.09.11 1486
9366 기가막혀 기가막혀 기가막혀 1 꼴통 2013.09.11 2409
Board Pagination Prev 1 ... 86 87 88 89 90 91 92 93 94 95 ... 225 Next
/ 225

Copyright @ 2010 - 2016 Minchoquest.org. All rights reserved

Minchoquest.org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