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에 떠도는 유머에는 실없는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그 중에는 간혹 뼈있는 의미가 담겨 있어
웃고 넘기기에는 뭔가 생각하게 하는 것들이 있다.
이것은 누구나 한 번은 들었을 유머이다.
50대 이후에 집에서 밥 먹는 횟수에 따라서 아내가 부르는 남편의 호칭이 달라진다고 한다.
1. 집에서 한 끼도 먹지 않는 남편은 ‘영식(零食)’님
2. 한 끼만 먹는 ‘일식(一食)씨’
3. 두 끼를 먹으면 ‘이식(二食)군’
4. 세 끼를 다 먹으면 ‘삼식(三食)이 xx’ 라는 것이다.^^
집에서 한 끼도 안 먹어서 아내를 귀찮지 않게 하는 능력 있는 남편은 ‘님’으로 높여 부르고,
하루 3끼를 꼭 집에서 먹어 아내를 귀찮게 하는 남편은 ‘xx'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 세태를 반영한 우수겟 소리이다.
당신은 영식님 인가? 아니면 일식씨, 이식군? 혹 삼식이 xx?^^
나도 결혼 후는 일요일 외에는 삼식이가 되어 본 적이 거의 없었는데,
신혼 때는 아침과 저녁을 집에서 같이 하는 ‘이식군‘이었지만
곧 아침만 집에서 하는 ’일식씨‘로 진급했고,
심심치 않게 자의반, 타의반 ’영식님’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소식小食에 대한 관심으로 집이든 외식이든 2식만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나도 2년 전부터 완전한 ‘이식군‘이 됐다.
과식을 안 하니 속이 편하고 좋다.
물론 소식이라고 무조건 누구에게나 좋은 것은 아닐 테고
자신의 노동량과 신체 조건에 맞추어야 할 것이지만,
미국이나 한국에 사는 대부분의 이들은 너무 많은 음식을 소비한다고 한다.
피터 멘젤과 페이스 달뤼시오 부부의 저서 <Hungry Planet>에 의하면,
사진작가인 피터 멘젤은 작가인 부인 페이스 달뤼시오와 함께
전 세계를 여행하여 각 나라 일반 가정의 4~5인이
일주일 동안 섭취하는 음식을 그대로 재현하여 사진에 담았다.
이 작품들은 <Hungry Planet>이라는 제목의 책으로도 나왔고
또한 노벨평화센터 주관으로 각국에서 전시되고 있다 한다.
기사에 의하면 한 주일에 한 가정에서 지출되는 식비가
룩셈부르크 $465, 독일 $459, 프랑스 $419 등 유럽 국가들이 상위를 차지하고,
멕시코 $189, 터키 $145 둥이 중위권,
그리고 하위권으로는 이집트 $68, 인도 $39 등 인데,
최하위는 차드 난민촌이 $1(배급된 식량 약 $17.33어치) 이고
다음이 에콰도르 $32이다.
한국은 자료에 없고 일본이 $317.
그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은 미국의 경우
남미계 가정은 $242인데 비해
흑인 가정이 $314로 더 많이 지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자료는 그 나라의 평균이 아니라 피터 멘젤씨가 방문한 가정의 식비이다.
아래의 처음 사진은 유럽 가정의 일주일분 음식이고
다음 사진은 최하위인 차드의 1주일분 식량과 가족사진이다.
그야말로 $400과 $18의 차이를 실감하게 된다.
부자 나라의 음식량을 보면
과연 우리가 저 많은 음식의 섭취가 꼭 필요한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지구촌에서는 지금도 약 8억 명이 굶주리고 있고
일 년에 약 3000만 명이 기아로 죽어가고 있다 한다.
그 중 1000만 명이 15세 이하이라 한다.
남한에서 먹고 버려지는 음식만 북한에 보내도 북한의 식량 문제는 해결되고,
미국에서 소비하고 버려지는 식량만으로도
지구촌에 굶어 죽는 사람은 없어지게 된다 한다.
우리 집안의 일주일분의 음식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사진을 찍는다고 가상해 보자.
특히 한국 음식은 국과 찌개가 있어서 어느 나라보다 음식의 양이 많을 것이다.
굶주린 이들에게는 세르반테스의 말대로 “빵만 있으면 웬만한 슬픔은 견딜 수 있다.”
우리가 많이 먹어 ‘삼식이 xx'인 것은 부인을 귀찮게 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기아에 굶주려 죽어가는 이들의 음식을
우리가 과식함으로 독식해서 먹어치우기 때문이리라!
미국의 사회주의자 스콧 니어링은 많은 재물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버리고 미국 동북부의 버몬트 지역 숲으로 들어가
스스로 집을 짓고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고
지역 마을 공동체와 건전한 교류를 하면서 살았고,
잉여 생산 자체를 사회악으로 간주하여
년 간 필요 이상은 농사를 짓지 않았다 한다.
우리 교인들은 식생활이나 절제를 주로
자신의 건강과 품성 그리고 종교적 구원과 연결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어찌 보면 이기적인 동기일 수 있음이다.
욕심 없는 검소한 식사와 생활 그리고 나눔,
그 안에서 얻는 소소한 만족과 행복을 누릴 줄 아는 것도 복이며 지혜일 것이다.
우리 모두가 스콧 니어링 같을 필요는 없을지라도
비록 정당하게 얻은 것이라도 ‘잉여剩餘 취득물‘을
마치 자기 소유인양 나누지 않고 간직할 때
그것은 누군가를 굶어 죽게 하는 범죄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잘 먹고 잘 산다는 웰빙의 의미는 나만 배부르게 먹고
잘 입고 잘 산다는 호의호식好衣好食의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 조금이라도 인류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고
지구촌의 어려운 이웃을 돌보며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웰빙이리라!
아래의 사진은 피터 멘젤씨의 사진이다.
십계명의 율법은 금제(禁制)의 면에서보다도 자비의 면에서 고찰해야 한다. (가려뽑은 기별 234-235)
오늘 아침에 읽은 말씀입니다.
장로님의 글과 겹쳐지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옮겨보았습니다.
써주신 글 덕분에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믿음"을 강조하는 이유를 다시 묵상해보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