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님의 글
늘 그렇듯
지극히 플라톤적이고 영지주의적이다.
모든 인간사가 그렇듯
정치도 쉽게 부패한다.
그런데
정치의 부패성에 맞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도
정치다.
정치가 부패한다는 말은
삶이 부패한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삶의 부패성에 맞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도
삶이다.
정치성이 배제된 삶이 있는가.
없다.
정치성 없는 삶을 살겠다는 말은
물에 젖지 않고 수영하겠다는 말과 같다.
물에 젖지 않고 수영하는 방법이 있기는 있다.
개구리 옷 잠수복 입으면 된다.
다른 물고기들이 피땀 흘리며 물갈이하고 청소하는 물속에서
그렇게 살고 싶으면 살기 바란다.
물론 그 삶도
물을 떠난 삶은 아니다.
아예 육지 동물로 변신해서 물을 벗어나고 싶으면
그렇게 노력해 볼 일이다.
영지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는
그 물속으로 일부러 뛰어든
인간이다.
개구리 옷 잠수복 없이.
청교도 님의 글이 얼마나 또한 정치적인 글인지
그는 알고 있는가.이렇게 시작하는 노래가 있다.
This world is not my home, I'm just passing through...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오, 나는 그저 이곳을 스쳐 지나갈 뿐이네...
이 노래를 청교도 님에게 바친다.
Good luck to him.
그대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정치란 기본적으로 다스림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도 정치적일 수 있습니다. 부조시대와 ‘신정정치’는 연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세계에 고착된 ‘정치적’이란 개념은 당쟁과 당파의 테두리를 벗어나 생각할 수 없습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정치란 피아의 양분적인 판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은 인간의 세속 정치와 혼재될 수 없습니다. 속물스런 인간의 속물스런 판단일 뿐입니다.
그대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희박한 의지로 믿어보는 시늉을 하면서 덧없이 일생이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대들이 소위 오랜 연조로 가시적 교회내의 주체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복음의 변두리를 겉도는 들러리적인 존재들인 것입니다. 예수를 아는 지혜와 축복은 단순하고 갈급한 자들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세계가 천국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결코 예수님의 속성과 성품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는 현자의 말을 굳이 빌려오지 않을지라도 하늘 아래 인종치고 죄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가 없습니다. 아울러 정치적이지 않은 인간도 없을 것입니다. 지배세력을 지향하는 세상의 추세는 열두제자도 비켜가지를 못하였습니다. 세인이 가는 대열의 큰 물살에 비교적 순수하던 요한과 야고보도 함몰되어 입신양명을 꿈꾸었습니다.
가롯유다는 심중의 의도를 숨기운 체 예수를 통한 세상의 권좌를 추구했었습니다. 제자들은 긴 시간 동거하며 깊은 교훈을 가까이서 받았지만 예수의 진정한 정체성과 그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지능이 예수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여기었고 다른 제자들조차도 세초부터 전승되어 온 속죄물의 실체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부활한 연후에야 난마 같았던 그 교훈들을 비로소 헤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연히 사도가 되었습니다. 온갖 술수의 정치적 셈법에 얽매인 인간에게 천국의 씨앗이 발아될 때에 세속적 발상의 망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압제를 근간으로 하는 세속정치와 동일시하는 것은 복음에 전혀 문외한적인 발상입니다.
많이 알고 많이 실천하는 것 같지만 예수님에 대한 실마리를 붙잡지 못하는 한 모든 수고는 공중누각을 짓는 일에 불과할 것입니다. 꽤나 종교적 사리에 밝고 첨단의 진보적 사고를 표방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헛물을 켜고 있는 것과 진배가 없습니다. 저들은 복음의 참여자가 아니라 구경꾼으로 일생을 허비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의 통치와 속세의 통치는 엄청난 괴리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접장님! 좀 기대이하이군요. 여과 없이 진중한 이야기를 해보지요. 충돌을 자처하시니 충고를 좀 하겠습니다. 전 기성교회에서 가르치는 보편적 구원의 길을 전면 신봉합니다. 영지니 예정이니 모두 비류들의 부산물로 여깁니다.
플라톤의 동굴 속 사람은 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님의 통찰은 세계의 속성을 전혀 투과하지 못한 시선입니다. 현실을 넘어서는 시선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정치도 그렇고 삶도 부패하는 것은 부정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부패와 다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항하여 사회적 제도가 개선되고 한 국가의 이념도 바뀔 수가 있습니다.
개인의 적용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주망태, 난봉꾼, 별의별 중독자들이 세련된 신사숙녀로 말끔히 변신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인간 승리적인 현상에 대해 거듭났다고 칭송으로 일관합니다. 헤집어보면 사회의 건강한 일원으로 변신시키는 이러한 대도약도 기독종파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종교를 떠나서도 치유적인 인성교육과 자기개발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이러한 성공적 사례는 흔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밑동부리에 접근한 근본적 회복이 아닙니다. 사람의 시선으로는 대단한 쾌거일지 모르나 진정한 의미에서 문양의 변화입니다. 시쳇말로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세의 시선으로는 깔끔한 선남선녀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으로 덧없이 죽어갈 초로인생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지상에서 수많은 병자를 치유했지만 여전히 깊은 만족을 하지 않았습니다. 도로 죽을 인생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님은 강단에 서고 있지만 사람의 말에 익숙할 뿐입니다. 아직 기독교의 본질과 죄인의 속성에 대해 잘 모릅니다. 사람의 출생에 대해 신령한 시선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현실적 불의와 다투지만 아직 영혼의 싸움에 대한 실체를 모르고 있습니다. 영혼으로 거듭나는 두 번째의 출생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현실주의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님은 신앙에 대해 조소와 호기를 부리고 있지만 사람들을 무덤으로 인도하는 선봉이 될 수가 있습니다. 저도 피켓 드는 님에 못지않았습니다. 과격하고 의기가 폭풍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냥 지나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라는 실체와 접근하고 생명의 시여자에 대한 믿음이 뒤늦게 생겼습니다. 자궁의 출생은 누구나 다 일관된 것이지만 영혼의 출생은 생명에 목마른 자들만이 얻는 천혜의 특권입니다.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은 비유와 추상이 아니라 이 세계의 현실입니다. 님이 기고만장해도 영혼의 바닥부터 새로워지지 않으면 주변인으로 일생을 허비하게 될 것입니다. 과거 청교도들은 사람이 두 번 태어나는 것에 대한, 세계의 진리를 명확히 이해하고 기꺼이 그 연단의 용광로 속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한 번 태어나면 두 번 죽는 것이고 두 번 태어나면 한 번 죽는다는 청교도들의 암송구가 있습니다.
This world is not my home, I'm just passing through...
이 가사를 주신다니 고맙게 받습니다. 님은 조소적이지만 제겐 실감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