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저서 <피로 사회>에 의하면
과거의 근대 사회는 “해서는 안 된다”가 중요한 사회 규범인 “규율 사회”였고,
그 후 현대에는 “할 수 있다”가 모토인 “성과 사회”로 자본주의가 진화했다고 한다.
“규율 사회”가 금지의 사회, 부정의 사회로 부적응자를 광인이나 범죄자로 만들었다.
“성과 사회”의 페러다임은 “존재하려면 할 수 있어야 한다.”이다.
개인의 능력의 결과 즉 업적이 성공이고 성공만이 최상의 가치가 된다.
이 성공의 대열의 부적응자는 낙오자이며 우울증 환자를 양산해 내는 사회이다.
성공이 유일한 규율인 이 성과 사회에서는 타자를 누르고
오직 성공을 위한 긍정성의 과잉 사회이다.
사회의 불의나 불합리에도 긍정적 정신으로
적응하고 이용해서라도 자아의 성공에 집착하는 과잉활동의 사회로
그로인해 필연적으로 다음 사회는 “피로 사회”가 도래한다.
피로 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피로 사회에서 현대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다.
자유롭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성과에 사로잡혀있다.
자기 착취 사회인 “피로 사회”에서 필요한
피로한 자아의 치유는 휴식이며 머뭄이 필요하다.
즉 몸과 정신의 안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
즉 개인과 사회의 착취와 차별, 불의와 불합리가 없어지고
평등과 정의와 상식이 회복 될 때만이,
다음 단계인 “행복 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피로 사회’에서 다음 단계인
치유와 회복의 과정을 거친 “행복 사회”로의 전환을 거부하고
‘체념 사회’로 몰려가는 것 같다.
체념을 권하는 소리가 여기저기 드높다
체념을 추천하고 교육하고 장려한다.
불의와 차별에 저항하는 사람을 빈정대느라 바쁘다.
의식 없거나 체념한 사람에게 솔깃한 장사를 한다.
‘체념 사회’ 그 다음은 ‘위로 사회’다.
병 주고 약 주듯
먼저 체념을 권하고 곧 위로를 판다.
독재자들의 단골 수법이다. (5공 시절의 3S 정책등...)
또한 종교인들도 그 짓을 아주 잘 한다.
정치가 엉망이니 부패한 종교가 아주 살 판 났다.
조찬 기도회를 넘어 독재자 추모 예배도 본다.
악한 정치와 부패한 종교는 같은 편이다.
믿음과 순종을 앞세워 불의에 대한 침묵과 희생을 정당화 시킨다.
사회의 부조리에도 ‘긍정의 힘‘을 내세워 개인의 변화에만 짐을 지운다.
이는 노예 제도가 있는 사회에서
사회 제도의 개혁보다 노예 개인의 긍정성을 강조하고
노예 제도 안에서 능력 것 잘 적응해서
남보다 더 편하게 일하고 많이 얻어 먹으라한다면,
과연 노예 제도 안에서 성공한 노예는 성공한 것이고
그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이고 “행복 사회”가 되는가?
노예 제도의 개혁 없이는 노예 개인만의 변화는 무의미한 것 아닌가.
즉, 사회 제도의 개혁 없는 개인만의 변화는 무의미한 것이다.
오히려 타인에게 가해자가 되는 것이다.
노예 제도 타파 없이 노예만의 변화만으로 진정한 노예의 해방(구원,행복)이 없는 것같이
잘못된 사회 제도와 권력자들의 개혁 없이 개인만의 변화을 강요하는
이런 종교를 ‘아편 종교’라 한다.
마약에 몽롱해 져서 아픔과 병을 잊으라한다.
그렇게 중독되어 죽고 만다.
세속 세상이 아니라 영적인 세계이고 부활 후의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고?
그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에 있고 어디에서 부터 시작 되는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 17:21)
차별과 불의한 권력에 침묵하고,
그러한 제도와 권력에 복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미덕이라 가르친다면
그 종교는 아편과 다를 바 없고,
그 교회는 아편 파는 장사일 뿐이다.
그리 말하는 목회자는 ‘아편 장사치(마약상)’와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만일 나도 그리 하면
나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아편 장사치나 마약 중독자가 되어 가는 중이다.
아니 그러한가?
Brav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