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은 청교도 님.
"일"은 김원일.
청: 바치지 않고 그냥 던져주어도 됩니다.
일: 바쳐도 선전포고냐고 물으시는데 던졌으면 벌써 전쟁 나지 않았을까요? ^^
청: 전쟁을 한번 하자는 의도인가요?
일: 씩이나.^^
청: 불필요한 투박함없이 사리와 논증으로 대응하면 대화는 이어집니다.
일: 님의 어투는 필요한 투박함, 필요한 직설인가 보죠? ^^
청: 영지주의는 지식을 기반으로 하고 관념적 신앙으로 점철된 님에게 더 적합한 적용이 아닐까요?
일: 영지주의를 그렇게 이해하시나요? 놀랐습니다. 더욱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님에게 관념적 신앙으로 점철됐다는 말을 들으니 기함하겠습니다.^^
청: 그러나 플라톤주의 아닙니다.
일: 플라톤주의인지 아닌지는 관심 없고, 플라톤적으로는 보입니다.
청: 회개한 죄인입니다.
일: 저하고 동문이시네요. 저도 거기 출신인데. ^^
청: 접장님! 좀 기대이하이군요.
일: 미안합니다, 기대 이하여서. 앞으로는 기대치를 낮추십시오.^^
청: 여과 없이 진중한 이야기를 해보지요.
일: 저 역시 여과 없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청: 충돌을 자처하시니 충고를 좀 하겠습니다.
일: 제가 반응한 님의 글은 충돌을 자처하는 글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충돌은 님이 자처하셨습니다. ^^ (내용도 내용이지만 우선 제목부터: "그대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청: 영지니 예정이니 모두 비류들의 부산물로 여깁니다.
일: 예정은 제가 언급한 주제가 아니고, 영지주의는 기독교 역사 초기에 비주류의 부산물로 처리된 것 맞습니다. 아예 이단으로 처리했죠. 그게 잘한 것인지 아닌지를 지금 다시 들여다보려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만.
청: 충고를 좀 하겠습니다. 전 기성교회에서 가르치는 보편적 구원의 길을 전면 신봉합니다.
일: 충고받을 일이 있으면 받겠습니다만, 이건 “충고”가 아니라 그저 님의 자리를 밝히는 말씀이네요. 어쨌든, 기성교회가 가르치는 보편적 구원의 길을 전면 신봉한다는 말 놀랍지 않습니다. 영지주의는 기독교 역사 초기에 앞문으로 쫓겨났지만, 곧 뒷문으로 다시 들어와서 그 역사를 은근히 지배해왔고, 인간 존재의 물질성을 누구보다도 강조하는 안식교조차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까요.
청: 님의 통찰은 세계의 속성을 전혀 투과하지 못한 시선입니다. 현실을 넘어서는 시선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일: 아, 그렇습니까? 삶의 어쩔 수 없는 정치성을 이야기하면 현실을 넘어서는 시선이 빠져 있는 거군요? 실소를 금할 수 없습니다만,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혹 아시는지 모르겠으나 저는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만 그의 무신론적 유물론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
청: 플라톤의 동굴 속 사람은 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일: 네, 맞습니다. 저는 그 동굴 속 그 사람입니다. 전도서에 대한 불만이 많지만, 그래도 제가 아직 전도서를 읽는 이유입니다. 저 아래 김균 장로님의 글도("나는 예수를 모른다.") 한 번 참조해 보심이 좋을듯합니다. 동굴 밖의 일, 우리는 우리 앞에 그림자로나마 희미하게 나타난 부분 말고는 잘 모릅니다. 님은 동굴 밖의 풍경을 꽤 많이 아시나 봅니다. 즐기십시오. ^^ 어쨌든, 제가 만난 예수는 그 동굴 안으로 자진해서 걸어들어왔고, 저는 그 예수와 그 동굴 안에서 엎치락뒤치락 뒹굽니다. 그 재미 괜찮습니다.^^
청: 예수님도 지상에서 수많은 병자를 치유했지만 여전히 깊은 만족을 하지 않았습니다. 도로 죽을 인생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일: 그랬나요? 그렇다 치고, 그럼 그는 왜 그 수많은 병자를 치유했나요? 도로 죽을 텐데? 님은 병에 걸려도 병원에 안 가십니까? 어차피 언젠가 죽을 몸이니? 우리 삶의 피할 수 없는 정치성을 이야기하는 이 중에, 그 정치성이 곧 삶의 모든 존재론적 문제에 대한 궁극적, 최종적 해결책이라고 말하며 거품 무는 사람 있었나요, 이 누리에?
청: 님은 강단에 서고 있지만 사람의 말에 익숙할 뿐입니다. 아직 기독교의 본질과 죄인의 속성에 대해 잘 모릅니다. 사람의 출생에 대해 신령한 시선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현실적 불의와 다투지만 아직 영혼의 싸움에 대한 실체를 모르고 있습니다. 영혼으로 거듭나는
두 번째의 출생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현실주의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요, 청교도 님, 저를 그렇게 잘 아십니까? 지금 진행되는 이 "정치성" 이야기 맥락에서 제가 하지 않은 말에 기초한 추론인가요? 그렇게 보이네요.^^ 그건 침묵에서 끌어내는 추론입니다. 소위 argumentum e silentio 입니다. 바람직하지 않고, 위험하기까지 한 추론 방법입니다. 조심하세요.^ ^
청: 님은 신앙에 대해 조소와 호기를 부리고 있지만 사람들을 무덤으로 인도하는 선봉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일: 네,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님이 즐길 사고의 자유입니다.^^
청: 저도 피켓 드는 님에 못지않았습니다. 과격하고 의기가 폭풍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냥 지나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라는 실체와 접근하고 생명의 시여자에 대한 믿음이 뒤늦게 생겼습니다. 자궁의 출생은 누구나 다 일관된 것이지만 영혼의 출생은 생명에 목마른 자들만이 얻는 천혜의 특권입니다.
일: 뭐, 나도 옛날에 다 해본 짓거리. 이런 말 흔하죠. 진부한 얘기입니다. 다 늙어서도 피켓 드는 사람 많고, 한두 번 해보고 마는 사람도 많고, 폭풍 같은 의기 꺾고 다른 길 걷는 사람, 없던 의기 생겨서 느지막하게 피켓 드는 사람, 등등, 많습니다. 그건 그렇고, 거듭남이란 실체와 접근하고 생명의 시여자에 대한 믿음이 생긴 뒤 피켓을 접으셨다니, 그 거듭남, 그 생명의 시여자 참 맘에 안 드네요.^^ 어쨌든 그 거듭남 즐기시고 그 생명의 시여자 열심히 섬기십시오. 저는 저의 거듭남, 제가 만난 생명의 시여자 즐기고, 고민하고, 그리고 섬기면서 계속 피켓 들겠습니다. 나름 생명에 목말라하면서. ^^
청: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은 비유와 추상이 아니라 이 세계의 현실입니다.
일: 아멘!
청: 님이 기고만장해도 영혼의 바닥부터 새로워지지 않으면 주변인으로 일생을 허비하게 될 것입니다.
일: 님보다 더도 덜도 기고만장하지 않다고 아뢰오! ^^ 그 뒤에 이어지는 충고는 감사히 받아들여 가슴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청: 과거 청교도들은 사람이 두 번 태어나는 것에 대한, 세계의 진리를 명확히 이해하고 기꺼이 그 연단의 용광로 속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한 번 태어나면 두 번 죽는 것이고 두 번 태어나면 한 번 죽는다는 청교도들의 암송구가 있습니다.
일: 아멘! ................. 그런데요, 청교도 님, 1600년대의 청교도 목사들 설교문 좀 읽어보셨나요? 여호수아 성경 구절 인용하면서 미주 본토인들 죽이라고 외친 그 설교문들? 모든 청교도 목사가 그렇게 설교한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네, 그렇게 설교한 그 청교도 목사들 그 암송구 죽을 때까지 외우며 살았을 겁니다.
청: This world is not my home, I'm just passing through... 이 가사를 주신다니 고맙게 받습니다.
님은 조소적이지만 제겐 실감이 납니다.
일: 님의 글이 보여주는 조소, 딱 그만큼만 조소적이었다고 아뢰오! 네, 실감날 줄 알았습니다. 즐기세요.^^
One more time,
청: 전쟁을 한번 하자는 의도인가요?
일: 씩이나.^^ 저 반전주의자입니다.^^ 더구나 청일전쟁, 그거 우리나라 말아먹은 몹쓸 전쟁이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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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bbat Shalom, my 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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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장님! 좀 기대이하이군요. 여과 없이 진중한 이야기를 해보지요. 충돌을 자처하시니 충고를 좀 하겠습니다. 전 기성교회에서 가르치는 보편적 구원의 길을 전면 신봉합니다. 영지니 예정이니 모두 비류들의 부산물로 여깁니다.
플라톤의 동굴 속 사람은 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님의 통찰은 세계의 속성을 전혀 투과하지 못한 시선입니다. 현실을 넘어서는 시선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정치도 그렇고 삶도 부패하는 것은 부정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부패와 다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항하여 사회적 제도가 개선되고 한 국가의 이념도 바뀔 수가 있습니다.
개 인의 적용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주망태, 난봉꾼, 별의별 중독자들이 세련된 신사숙녀로 말끔히 변신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인간 승리적인 현상에 대해 거듭났다고 칭송으로 일관합니다. 헤집어보면 사회의 건강한 일원으로 변신시키는 이러한 대도약도 기독종파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종교를 떠나서도 치유적인 인성교육과 자기개발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이러한 성공적 사례는 흔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밑동부리에 접근한 근본적 회복이 아닙니다. 사람의 시선으로는 대단한 쾌거일지 모르나 진정한 의미에서 문양의 변화입니다. 시쳇말로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세의 시선으로는 깔끔한 선남선녀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으로 덧없이 죽어갈 초로인생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지상에서 수많은 병자를 치유했지만 여전히 깊은 만족을 하지 않았습니다. 도로 죽을 인생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님 은 강단에 서고 있지만 사람의 말에 익숙할 뿐입니다. 아직 기독교의 본질과 죄인의 속성에 대해 잘 모릅니다. 사람의 출생에 대해 신령한 시선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현실적 불의와 다투지만 아직 영혼의 싸움에 대한 실체를 모르고 있습니다. 영혼으로 거듭나는 두 번째의 출생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현실주의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님은 신앙에 대해 조소와 호기를 부리고 있지만 사람들을 무덤으로 인도하는 선봉이 될 수가 있습니다. 저도 피켓 드는 님에 못지않았습니다. 과격하고 의기가 폭풍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냥 지나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라는 실체와 접근하고 생명의 시여자에 대한 믿음이 뒤늦게 생겼습니다. 자궁의 출생은 누구나 다 일관된 것이지만 영혼의 출생은 생명에 목마른 자들만이 얻는 천혜의 특권입니다.
니 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은 비유와 추상이 아니라 이 세계의 현실입니다. 님이 기고만장해도 영혼의 바닥부터 새로워지지 않으면 주변인으로 일생을 허비하게 될 것입니다. 과거 청교도들은 사람이 두 번 태어나는 것에 대한, 세계의 진리를 명확히 이해하고 기꺼이 그 연단의 용광로 속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한 번 태어나면 두 번 죽는 것이고 두 번 태어나면 한 번 죽는다는 청교도들의 암송구가 있습니다.
This world is not my home, I'm just passing through...
이 가사를 주신다니 고맙게 받습니다. 님은 조소적이지만 제겐 실감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