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마을에 종종 타인의 신앙에 대해 정죄하는 글이 올라온다. 그런데 그 글에 대해 다시
재정죄하는 댓글들도 올라온다. 그 댓글들 중에는 이런 글이 올라온다. 예수님도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다고. 그런데 나는 이런 댓글 올린 사람을 보면 욕을 퍼붓고 싶다.
그럼 도무지 아무 정죄도 하지 말라는 말이냐고. 예수님은 오히려 정죄를 무섭게 하시는
분이셨다. 물론, 정죄는 함부로 해서는 곤란한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정죄도 정죄 나름이
다. 정죄하는 그 내용을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도 정죄하고 판단할 권
리가 없다고 하면, 이 세상에 판사가 필요없고, 경찰이 필요없고, 선생도 필요없고..... 법
조차도 필요없다.
----------------- 서론 2 (과장법의 이야기) ---------------------
내가 올리는 글을 읽고 소설 같다고 한다면, 그래도 불만은 없겠다. 소설도 재미와 감동을
주기 위한 것이니, 나의 이야기에 재미와 감동이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나를 아는 사람
은 나의 이야기들이 조금도 꾸밈이 없는 사실임을 잘 알 것이다. 나는 그동안 게시판에 많은
글을 올려왔는데, 그 글에는 허위는 물론 없고, 과장이나 꾸밈도 거의 없다. 나는 과장법을
싫어한다. 과장법이란 방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과장법을 사용하니 그렇다. 내가
과장법을 싫어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우선, 과장법을 사용하면 사실이 비사실에 가깝게
되기 때문이고, 그 과장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어버리는 경우도 있게 될 것이다. 둘째 이유는,
그동안 나의 글에 대해 반대 의견의 글이 자주 올라오는데, 잘못된 과장법을 사용하여 내가
무척 불쾌해했던 경험을 많이 갖고 있다. 그래서 내가 과장법을 사용하면 상대방도 불쾌해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에 나는 과장법 사용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 서론 3 (내가 겪은 신앙의 이야기) -------------------
(이 글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으나, 간접적인 배경이 되는 이야기이다.)
사람마다 기구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것이지만, 나도 기구한 인생을 산 사람들의 축에 분명
속할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대학교도 중퇴한 사람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학교 선생님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학생들은 어떤 학생들인가? 말썽을 잘 피우던 학생과 성
적이 아주 우수한 학생들이다. 중간 축에 드는 학생들은 선생님들의 기억에 잘 남지 못한다.
워낙 많은 학생들을 상대하기 때문이다. 나는 중학교 시절만 해도, 반에서 1,2등을 다투는 수준
은 아니었지만, 5등 이내의 수준은 되어서 선생님들은 나의 이름을 잘 기억해주었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실업계로 진학하게 되었다. 선생님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너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 축에 속하는데, 인문계로 진학하여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사회에서 성공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렇지만, 실업계로 진학한다고 하여 대학에 진학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결국 나는 실업계 고교로 진학하였다.
그런데 실업계로 진학하고 보니,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학업에 대한 열의가 거의 없는 학
생들이 태반이었고, 비실대는 부스러기들만 모인 것만 같았다. 그래도 내신 성적이라도 좋게 나올
것이라 생각하고 그런 것은 그대로 넘길 만하였다. 문제는 담임선생이었다. 학생들의 성적이 다들
저조하니 윽박지르며 교육시키는 것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체벌이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시대여서 교실에서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건물
뒤편으로 학생들을 집합시켜 "엎드려 벋쳐!"를 시켜놓고 "줄 빳다"를 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럭저럭
참아냈지만, 살이 통통한 몇몇 애들은 엉덩이의 뜨거움을 참지 못하여 마구 나뒹굴곤 하였다. 그러
면 "이 새X, 일어나 똑바로 엎드려!" 하고는 "빳다"를 계속 가하는 것이다. 나는 그 중에 그렇게 참지
못하여 나뒹굴던 두 녀석의 이름을 지금도 기억하는데, 그 중 한 애는 전학을 가고, 다른 한 애는 (내
가 중퇴한 후에) 중퇴했다고 한다.
그리고 걸핏 하면 "이 새X들이 궁기가 빠져가지고..."라는 욕을 자주 들었는데, 알고 보니 "궁기"가
아니라, "군기"라는 말이었다. 학교가 군대도 아닌데, 그런 욕을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
지만, 장차 다들 군대에는 다녀올 터이니, 미리 맛 좀 보라는 배려의 교육으로 그러는 것인 모양이다.
하여간, 실업계 고교라는 곳이 어떤 수준의 학교인지 아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거기다가 담임선생은 이상하게도 내가 상위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편파적
이고 감정적으로 대하는 것이었다. 그런 애들은 많았지만, 성적을 좋게 유지함에도 그러함에 대해
체감적으로 더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말 잘하고 농담 잘하는 몇몇 학생들은 담임선생과
친하게 지내며 실습실에서 농담 따먹기를 하는 것을 보기도 하여, 나의 심리는 더 불안정하였다.
그렇게 해서 중학교 다닐 적만 해도 공부 잘한다고 하여 잘 대해주던 선생님들 생각이 많이 났다.
나는 이에 대해 아버지에게 고자질하여 아버지는 담임선생에게 항의하기 위하여 학교에 찾아올 정
도였다. 아버지의 항의로 그 정도는 누그러뜨려졌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런데 2학년으로 올라오니, 1학년 때의 그 담임이 다시 우리 반을 맡는 것이었다. 1학년 말부터
학교를 그만 두고 싶은 생각이 났는데, 상황이 이러니 마음은 더욱 굳어졌다. 내가 지내던 방에는
라디오가 있었는데, 내가 학교를 그만 두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그 라디오를 부수며 마구 역정을
내셨다. 그렇지만, 학교 가기 싫다는데, 억지로 끌고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아버지는 나를 그냥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2학년으로 올라오던 그 해의 봄에 학교를 때려치우고
검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우리 반에서 5명 정도가 더 중퇴했다고 하는
데, 실업계 고교로서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제 내 인생은 고교 중퇴자로 남게 될 것이고, 그래서 나의 대학 진학은 얼마나 간절하였던가?
검정고시는 기본적인 것만 묻는 수준이어서 무척 쉬웠다. 게다가 과목 합격/불합격 제도가 있어서,
전체 과목 중에서 몇몇 과목에서 점수가 미달되어 불합격하면 그 과목만 응시하여 통과하면 되는
것이니, 바보 천치가 아닌 이상, 학업에 대한 열의만 있다면 누구나 합격하도록 하는 수준이었다.
나에게는 기본 실력은 있어서 과목 불합격할 것도 없이 고졸 검정고시에는 단번에 합격하였다.
이제부터는 대학 입학 학력고사이다. 그런데 수학(미분, 적분, 행렬 등)은 참으로 해결 불가였다.
게다가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수학은 포기하고 영어에 매달렸다. 그렇지만,
영어라는 것도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고사일은 닥치고 말았다. 학력고사(지금의
수능)는 상상 외로 수준이 높았다. 시험지를 받아들고 보니 도무지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검정고시 출신자라, 교육청에 가서 성적통지서를 받아보았다. 163점이었다. 여러분은 이 성적을
이해하는가? 물론 바로 이해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시 학력고사의 만점은 340점이었다. 내 점
수는 100점 만점에 50점도 안 되는, 기가 막히는 점수였다. 그런데 나는 그 당시 입시 정보에 눈에
어두워 체력장도 빼먹었다. 체력장이라는 것은 달리기, 턱걸이, 윗몸 일으키기 등의 종목을 말
하는데, 웬만하면 20점 만점을 다 받는 것이었다. 내가 만약 체력장에도 정상으로 응시했다면,
183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도무지 나의 점수의 수준을 이해하지 못했다. 성적이 형편 없다는 것은 알지만, 어느
정도인지 몰랐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그 성적으로라도 어딘가에는 합격할 데가 있을 것이
라고 믿었다.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내가 입시 정보에 눈이 어두워 체력장도 빼먹었다고 했는
데, 그 입시 정보에 눈이 어두워, 이 성적으로라도 어딘가에는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
이다. 어딘가에 들어갈 희망은 있었지만, 그래도 낮은 성적이라는 것은 알기에, 나는 야간 학과를
지원하기로 했다. 정말로 나의 대학 진학은 얼마나 간절하였던가? 얼마나 대학 진학을 아쉬워 했기
에 야간이라도 지원하게 되었을까? 그 당시 내가 합격한 대학에는 법학과, 행정학과, 경영학과 등
4개의 야간 학과가 개설되어 있었다.
나는 "1지망--야간 법학과, 2지망--영어영문학과, 3지망--야간 행정학과"라고 적어넣었다. 여기서
내가 그 당시 왜 2지망으로 영어영문학과를 지원하게 되었는지, 지금도 불가사의한 일로 남아 있다.
a. 그동안 영어에는 많이 매달렸기에 영어 관련학과로 진학하면 다른 학생들을 따라갈 수 있으리라.
b. 그런데 이 성적으로 합격할 수 있을까.
이상하게도 a의 생각만 들었을 뿐, b의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았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고교를 중퇴하여 앞길이 막막하고 불안하면서도, 나에게는 독학으로 공부하면서부터 이상하게도 대학
에 진학하게 되리라는 희망과 믿음이 있었다. 내가 얼마나 대학 진학이 간절했으면 야간에라도 지원을
했을까? 그렇게 해서 야간 법학과에서 떨어지면 내가 좋아하고 매달리던 영어영문학과에 들어갈 것이
고, 거기라도 떨어지면 다시 야간 행정학과에라도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당시 내가 지원했던 대학의 국어국문학과와 영어영문학과에서 미달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야간에서 떨어지고 주간 영어영문학과에 당당히 붙게 되었다. 여러
분들은 이걸 소설이라고 믿을 것인가? 검정고시 출신자에게 얼마나 훌륭하고 우수한(!) 성적이 나오리
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잘 알 것이다. 그 당시 "눈치 작전" 외에도 "배짱 지원"이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나는 결코 "배짱 지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이 성적으로라도 분명 어딘가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었던 것이다. 다음은 당시 학력고사에 관한 신문 기사의 일부 내용이다.
---------------------------- 신문 기사 인용 -------------------------------------
원서접수 마지막날 무전기가 등장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온 가족이 동원돼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눈치작전'이 벌어졌다. 터무니 없이 낮은 점수의 학생이 최상위권 학과에 합
격하고,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이 떨어지는 현상이 속출했다.
-------------------------- 인용 끝 ---------------------------------------------
여러분들이 아는 사람들 중에, 내가 그렇게 홀로 힘겹게 독학으로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이 있으니, 바로 호남합회장 김X호 목사님이다. 그렇지만, 그분은 독학이라 할지라도 영어영문학과
의 커트라인에 걸맞은 성적을 턱걸이라도 해서 합격한 줄로 믿고 있다. 그렇지만, 다시 강조하지만, 검정
고시 출신자가 성적이 나오면 얼마나 나오겠는가? 163점이 어떤 수준인지 이해를 못한다면, 야간 학과에
서 떨어진 것을 이해하면 될 것이고, 야간에서 떨어지고 주간 영문학과에 붙은 것을 이해 못하면, 163점
이 어떤 수준인지 이해하면 될 것이다. 물론, 그분은 "몽둥이로 패죽이고 싶은 목사--김X호"는 아니다.
이상한 경험은 또 있었다. 당시 합격자 명단은 학교 운동장에 벽보로 붙어 있었는데, 내가 야간 법학과를
지원했으면, 그 야간 법학과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뒤져보러 가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내 발걸음은
2지망으로 지원했던 영어영문학과 합격자 명단으로 먼저 향한 일이다. 그리고 거기엔 내 이름이 똑똑히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야간 법학과나 행정학과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은 없는 것이다.
이젠 등록금의 문제이다. 당시에는 일거리가 별로 없어서, 나의 아버지는 거의 항상 무일푼으로 지내셨다.
내가 대학 1학년에 들어가던 그 때에 아버지는 등록금이라곤 한 푼도, 정말 10원 한푼도 대주지 못하셨다.
고교를 중퇴하던 때에 라디오를 부수며 화를 내신 아버지 앞에 나는 떳떳해졌지만, 아버지는 결국 등록금
을 한 푼도 대지 못하는 초라한 신세가 되신 것이다. 아버지는 이 문제로 오래도록 괴로워 하셨을 것이다.
나는 친척집을 다니며 나의 대학 합격 소식을 알렸고, 차마 돈 이야기는 못하는 상황에서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친척들도 농사일을 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터인 데다가, 자기네 자녀들의 학비와 용돈이 급
하지, 나의 사정을 알면서도 아무도 도와주지 못하였다. 나는 그 당시 교인들 중에도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
도 있었지만, 교인들에게 학비 지원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구차스러운 일이었다.
그때 나에게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아, 나에겐 일본에 고모님이 계신다. 어린 시절 고모님이 한국
방문하여 나에게 공부 잘한다고 특별한 방법으로 용돈을 주신 기억이 난 것이다. 고모님 생각이 난 나는 사
촌 누님네 집을 찾아갔다. 일본에는 바로 연락이 되어 사촌누나에게 돈이 송금되었다. 누나는 당시 등록금
결제 은행이던 농협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내가 보는 앞에서 등록금을 내고서는, 그 영수증을 나에게 주는
것이다. 참으로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으이그, 이것아. 등록금을 당해줬으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도
타 먹고 그래라." "예." 사촌누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는 필요없다. 그것은 "예"라는 말 속에 다 들어 있다.
-------------- 계속 -----------------------------
이런 시대가 도래했는데
패 죽이고 싶은 목사 라는 단어가 왜 이리도 으스스할까요?
지난 번에도 같은 글 올리더니
아직 성이 덜 풀렸나 보다
어찌하면 평안의 포구에 도달할까?
교리에 목숨 걸면
패 죽이고 싶은 목사 뿐 아니라 장로도 보이고
모두가 적으로 보이지요
난 이렇게 교회를 위해서 십자군이 되는데
너희는 뭐냐 하는 식으로요
성깔 버리세요
그러면 패 죽이고 싶은 목사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야 천국입구에 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