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디이 같은 자슥들
오늘 구상유치했던 과거사 한 토막 하려 합니다
참 대책 안서는 결단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환자들 수용소(우린 어릴 때 이렇게 불렀다)에서
한 주일을 사경집회를 했는데
내가 나름 결심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 저가요
모든 것 버리고 나환자촌에서 평생을 봉사하기로 했습니다“
그 말 듣고 계시던 부모님이
“그래 대단한 생각했다” 하실 줄 알았는데
그 날 이후 며칠 간 몽둥이찜질 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습니다
“ 야 네가 우리 집안의 6대 장손이야
그런데 뭐라고?“
어머니는 죽는다고 야단나고
그 뒷수습을 하느라고 며칠을 개고생했습니다
그 당시 나는 성 다미엔의 이야기 단행본을 읽고 있었거든요
하와이에서 환자의 피를 수혈 받고서
“내 형제여” 했다는 구절이 맘을 쏙 빼는데
그 나환자촌에는 내 눈을 확 끄는 어떤 처녀가 있었어요
그래서 내 생각에는 그 처녀와 결혼하고 나도 그 피를 받고
성 다미엔처럼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차단하기로 맘을 먹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종의 취기였지만 그 당시에는 여간 큰 맘 먹은 게 아니었거든요
그 취기 어린 생각을 접고 몇 년이 지난 후에 그곳을 갔더니
그 처녀는 그곳 총무와 결혼했는데 병이 도져서 벌에 쏘인 것처럼 되어있었습니다
다미엔의 이야기를 각색해서 박명호는 창기십자가=문둥이십자가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환자촌은 외딴 곳에 있었습니다
어릴 때 그곳에서는 보리가 익을 때쯤 아이를 잡아가서
간을 내어 먹고 병을 고친 사람이 있다고들 하는 바람에
가까이 하는 것은 사스보다 더 어려운 환자를 만나는 것이었는데
내가 그곳에서 제일 처음 한 것이 그들이 까 주는 삶은 달걀을 그들 앞에서 먹는 것이고
그들이 깎아 주는 사과를 그 앞에서 기분 좋게 먹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만나면 악수도 하고 그들과 음식을 기쁘게 먹지만
그 당시에는 크게 인심 한 번 쓰는 신앙인이라는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렇게 문둥이도 못 되고 문둥이에게 장가도 못 들고
문둥이에게 빚만 잔뜩 지면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겉으로는 말짱하지만 속으로는 문둥이보다 더 곪았고
육신이 말갛게 보이지만 속사람은 더 없이 부패하게 살았습니다
그래도 입은 살아서 잘난 척은 혼자 다 하고
작은 소리로라도 나를 깔보는 것은 못 봐주고
그게 신앙인 줄 알았던 시절이 더 많았습니다
문둥이가 되어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문둥이 마음 고친다고
문둥이 구경도 못한 사람들이 문둥이 흉내 낸다고
나는 깨끗하다고 외치고 다니는 세상에서
성경도 그 병을 천형으로 여기지만
그를 도운 사람은 창기와 세리를 친구 삼았던 분이였다는 겁니다
보리가 익을 즈음 우리들은 정말 아이들 잡아먹는지
그 움막 근처로 잠행을 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사방은 쥐 죽은 듯 조용하고
금방 옆에서 문드러진 손가락이 튀어 나올 듯 했는데
몇 달 전 그분들의 친척이 돌아가시고 공원묘지에서 만났을 때
내가 그들보다 더 속이 검댕이보다 더 타고
겉만 번지러한 인간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경상도 내가 사는 곳에서는
장난삼아 하는 말이 바로
문디이 같은 자슥이란 말입니다
그건 욕도 아닌 토속어에 불과합니다
그 문디이 같은 자슥 하나가 “카“에서 기분 상해 “민”으로 오더니
지금은 다시 “카”에서 자랑질 하고 있습니다
들판은 이제 파란 싹을 내는데
내년 봄 되어 보리가 익을 즈음이면
그 친구들 만나러 한 번 걸음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주의 섬이라던 소록도 한 바퀴 돌 생각입니다
평생 목회해도 하나도 변한 것 없다는
내년 봄에 은퇴하는 녀석 데리고 갈 생각입니다
문둥이(서정주)
해와 하늘 빛이 서러워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