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2일 / 주현절 여덟 번째 주일
죽으려고 사는 삶이 어디 있더냐!
요한 15:12-15
곽건용 목사
최근에 일어난 두 자살 사건
최근에 두 자살 사건이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어떤 목사의 자살사건입니다. 그는 얼마 전까지 이곳 LA에서 목회를 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가서 서울 강남에서 상당히 성공적인 목회를 하다가 작년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그가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알려졌는데 최근에 그가 자살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는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목사가 자살한 것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일은 이 목사가 죽은 후에도 그를 추종하는 신도 수백 명이 LA와 서울에서 그가 생전에 했던 설교 동영상을 보면서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멀쩡히 살아 있는 목사도 수백 명 신도를 끌어 모으기 힘든데 죽은 목사에게 수백 명의 추종자가 있다는 게 어디 예사로운 일입니까. 그런데 확인은 안 됐지만(앞으로도 확인되기는 어렵겠지요) 그의 사생활이 별로 단정하지 않았다는 소문이 있어서 과연 그가 우울증 때문에 자살했는지도 의문시 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자살은 오늘 주보 표지에 올라온 사진과 관련 있는 사건입니다. 서울의 한 반지하방에서 벌어진 세 모녀 자살사건이 그것입니다. 60대 어머니와 30대 두 딸인 이들은 현금 70만원이 들어 있는 봉투와 함께 “주인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메모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들이 살던 집은 2층짜리 단독주택에 딸린 반지하방이었답니다. 이들과 함께 작은 고양이 한 마리도 죽어 있었다고 하네요. 두 자살사건은 저로 하여금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에게 자살이 뭔지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자살을 돌이킬 수 없는 큰 죄로 여겨왔습니다. 그래서 자살한 사람은 교회에서 장례도 치러주지도 않았습니다. 자살한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고 가족과 친척도 교회에서 버티지 못하고 다른 교회로 옮겨가거나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요즘은 분위기가 달라져서 자살했다고 해도 장례를 치러주는 교회가 많아졌습니다. 좋은 변화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자살은 여전히 교회안팎에서 자연사나 병사, 그리고 사고사와는 달리 받아들여지는 게 현실입니다.
자살은 우울증으로 인한 병사(病死)가 아닐까?
자살한 목사의 경우는 그가 목사라는 점 때문에 더 큰 문제가 됐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어떻게 자살을 하느냐는 겁니다. 하나님 일을 하는 목사가 자살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죠. 아무리 그가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고 해도, 설사 그게 사실이라 해도 그쯤은 신앙으로 이겨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가 봅니다. 저는 며칠 전에 이 사건을 염두에 두고 페이스북이 이렇게 썼습니다.
자살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자살은 꼭 살인만큼 나쁜 거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살인은 남을 죽이는 것이고 자살은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살인도 다 같은 게 아니지 않나. 이른바 살인을 저지른 사정과 정황이란 게 있다. 전쟁에서 살인하는 경우도 있고 정당방위로 살인할 수도 있다. 돈 때문에 살인하기도 하고 자기 범죄를 감추려고 살인하기도 한다. 흉기를 써서 직접 살인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긴 손 하나 까딱 하지 않고 남을, 그것도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경우도 있다. 모두 살인이지만 똑같이 취급하지 않는다.
그럼 자살의 경우는 어떨까? 자살은 일단 살인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남이 아니라 살인자 자신이란 점에서 독특한 형태의 살인이다. 그 이유가 뭐가 됐든 남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 물론 가까운 사람들이 입는 정신적 및 기타 피해는 논외로 한다. 이는 다른 모든 살인에도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자살의 경우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일하다.
다음으로 동기를 따져보자. 사람이 왜 자살을 하는지는 자살자마다 다 다르겠다. 요즘은 대체로 '우울증'을 자살의 원인으로 꼽던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거다. 그게 우울증 때문이든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든 자살은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싸이코패스처럼 이유 없이, 그냥 심심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는 없을 게다. 누가 자기 목숨을 그렇게 끊겠는가. 돈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적어도 돈을 가지려고 남을 죽인 건 아니다. 돈이 없어서, 살아남을 방도를 찾지 못해서 스스로 죽은 거다. 파업하다가 회사가 그 피해를 파업한 노동자에게 물리는 바람에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을 자살했다고 봐야 할까, 타살 당했다고 봐야 할까? 우울증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을 자살로 보던데 혹시 병이 그를 죽인 걸로 봐야 하는 건 아닐까? 암이나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처럼 말이다. 암으로 죽은 사람은 병사로 보고 우울증으로 죽은 사람은 자살로 보는 게 과연 타당한가? 자살을 스스로의 의지가 작용해서 죽은 걸로 봐야 할까, 아니면 암이나 뇌출혈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은 걸로 봐야 할까? 암이나 뇌출혈에 걸리고 싶어 걸리는 사람 없듯이 우울증 역시 걸리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 나는 자살에 대해서 가치판단을 내릴 수 없다. 경우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자살이 바람직하지 않다고는 생각하지만 과연 그게 정죄할 대상인가 싶다.
우울증을 신앙으로 이겼어야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으로, 기도로 암처럼 고치기 어려운 병이 낫는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저도 신앙으로 병마를 물리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하지만 기도한다고 해서 늘 병이 낫지는 않습니다. 낫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병이 낫지 않는다고 해서 믿음이 없다거나 기도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울증도 질병입니다. 우울증도 치료를 필요로 하는 질병입니다. 우울증을 치료하는 약도 있고 전문의사도 있습니다. 물론 기도로, 믿음으로 우울증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질병의 하나니 말입니다. 하지만 암이나 뇌경색이 기도로 낫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우울증도 낫지 않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병이기 때문에 나을 수도 있지만 낫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부족해서, 기도가 모자라서 우울증을 고치지 못하고 자살했다고 정죄하는 건 옳지 않다는 겁니다.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 타살인 경우도 있다
세 모녀는 12년 전에 아버지를 방광암으로 잃고 2005년에 그 반지하방으로 이사 왔는데 큰딸은 당뇨와 고혈압에 시달렸고 작은딸은 편의점 알바 등을 했지만 두 사람 모두 신용불량자라서 제대로 취직할 수 없었답니다. 어머니는 한 식당에서 120만 원 정도 받으며 일했는데 1달쯤 전에 넘어져 팔을 다치면서 일을 하지 못하게 됐답니다. 그래서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렸다는 것이죠. 제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 대목은 두 딸이 바깥출입하는 걸 동네사람들이 본 적이 없고 집주인은 9년 동안 누가 이들을 찾아오는 걸 본 적이 없다고 말한 대목이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것은 ‘단절’이고 ‘고립’입니다. 바깥세상과 단절하고 살았던 세 모녀, 9년 동안 찾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모녀. 이들을 위해서는 빈소도 차려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화장된 이들의 마지막을 취재한 신문은 그래도 나은 신문인 한겨레신문이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죄송합니다......”라고 쓴 메모는 조사를 위해 경찰이 가져갔고 이분들이 남긴 70만원은 집주인에게 넘겨졌으며 나머지 짐은 폐기물 업체가 와서 싣고 갔다고 합니다. 그 중 쓸 만한 물건은 고물상에 넘기고 나머지는 폐기될 거랍니다. 이들의 사연도 그렇게 속절없이 폐기된 물건들처럼 머지않아 잊히고 말 겁니다.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유명한 사람이 자살하면 그를 흠모하고 추종하는 사람들이 그를 모방해서 따라서 자살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저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과연 이게 맞는 얘기인가 말입니다. 아무리 흠모하고 동경하고 추종해도 그렇지 과연 자기가 흠모하는 사람이 자살했다고 해서 따라서 자살한다는 게 말이 되나 말입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하나밖에 없는 자기 목숨을 그렇게 생각 없이 버리겠는가 말입니다.
베르테르 효과의 진위는 미심쩍지만 자살이 사회적 현상이라는 데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게 순전히 개인적인 일은 아니라는 겁니다.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 타살인 경우가 많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2003년이니까 지금부터 11년 전에 두산중공업의 해고노동자 배달호라는 분이 공장 한 구석에서 차가운 기름을 자기 몸에 붓고 불을 댕겼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두산중공업 노동조합이 파업을 벌였습니다. 파업은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파업이 불법이라는 이유로 당국은 개입했고 합법적으로 파업하기가 심히 어려운 법률을 들어 조합의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했고 법원은 노동자들에게 65억 원이라는 막대한 액수의 손해배상을 판결했습니다. 배달호 씨를 비롯한 노동자들은 월급을 차압당했습니다. 65억 원이란 돈은 그가 평생 벌어도 모을 수 없는 큰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던 겁니다. 이게 자살입니까? 정녕 이게 자살입니까? 한진중공업 노동자 김주익 씨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그는 회사 측이 조합에 손해배상이라면서 청구한 4억 원과 가압류 7억 4천만 원을 내지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우리는 이걸 자살이라고 불러야 옳을까요? 정녕 그렇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 타살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긴 했지만 사실은 누군가가 죽인 거란 말입니다.
사랑과 자선도 전염된다
저는 왜 교회에서 자살이 정죄의 대상이 됐을까 하는 점을 생각해봤습니다. 왜 교회에서는 유독 자살을 정죄할까요? 아마 유다 때문일 겁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먹은 그 유다 말입니다. 그런데 복음서가 전하는 유다에 대한 얘기를 잘 읽어보면 그를 무조건 정죄하는 게 옳을까 싶은 의문이 듭니다. 물론 그가 한 짓은 나쁘지만 말입니다. 그는 유대교 권력자들에게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하지만 곧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받은 돈을 돌려주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자기가 한 짓을 후회했던 겁니다. 자살은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에 대한 형벌이라기보다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 저지른 후회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예수님을 배신한 그가 자살했다는 이유로 자살 그 자체를 무조건 정죄하는 게 옳은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물론 유다가 한 짓이 잘 한 짓이란 말은 아닙니다. 초대교회에는 영지주의 일파가 그런 주장을 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다만 유다가 자살했다고 해서 전후사정을 살피지 않고 무조건 나쁘게만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다시 말씀하지만 저는 베르테르 효과에 대해서는 별로 공감하지 않지만 자살이 사회적 현상이라는 데는 공감합니다. 자살도 어느 정도는 사회적으로 확산된다고 생각합니다. 전염성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자살만 전염성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랑과 자선도 사회적 전염성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노란봉투 캠페인’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이것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게 떨어진 47억 원의 10분의 1인 4억 7천만 원을 갚기 위해서 1만 명이 4만 7천 원씩 모금하는 캠페인입니다.
이 캠페인은 가수 이효리 씨가 손으로 직접 쓴 편지와 함께 4만 7천 원을 보냄으로써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효리 씨가 그런 편지와 돈을 보내게 된 것은 한 주간지에 실린 세 아이의 어머니 배춘환 씨 얘기를 읽었기 때문이랍니다. 배춘환 씨는 해고노동자의 아픔을 나누려고 작은 돈이지만 자녀들의 학원비를 아껴서 모금액의 1만분의 1인 4만 7천원을 보냈던 겁니다. 더도 덜도 아닌 4만 7천 원을 말입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캠페인에 참여해서 4억 7천만 원이 넘는 돈이 모였다고 합니다. 사랑과 자선에도 전염성이 있음에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다고 하지만 자기 의지로 그런다면 그것도 자살 아닙니까? 원인이나 이유를 따지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모든 행위를 자살이라고 부른다면 이 경우도 자살이라고 해야겠지요. 하지만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걸 누가 자살이라고 부르겠습니까. 이 경우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수님 아니던가요? 친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분, 우리는 그 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그분은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죽음을 미화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을 함부로 정죄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세상에 죽기 위해 사는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도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게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한 삶을 살다 보니 그 결말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이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예수님에게 있어서 삶의 목적이 아니라 삶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사랑으로 점철된 예수님의 삶 말입니다.
저는 자살한 목사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해서 그의 삶 전체가 비판받거나 지워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함부로 그를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한편 생활고를 못 견디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세 모녀는 실제로는 사회가 그들을 그리로 몰고 갔음을 잊지 말고 이런 사람들이 더 나오지 않도록 사랑이라는 ‘착한 병’을 전염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친구에게 주어진 은총이고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
살인범은 이 사회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그 3모녀 살인의 공범입니다.
거기에 더해 구원마저 없다고 부관참시, 두 번 죽이는 짓을 하는 그리스도인은 없기를 바라며,
또 다른 ‘연쇄 살인’이 ‘자살’이란 이름으로 강요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