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성경절은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예수님께서 성경과 자신의 관계를 말하는 내용이다. 이 속에 우리의 눈과 마음이 뒤집혀야할 심오한 내용이 들어있다. 우리는 늘 신학과 신앙을 혼돈하고 살아가는 존재인가보다. 사진을 보면서 그림같다고 하고 그림을 보면서 마치 사진과 같다는 말을 하는 그런 이율배반의 존재라는 말이다. 신학은 하나님의 어떤 부분을 알기위한 지식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어떤 부분에 참여하는 의식이다. 이 두개의 독특한 영역을 혼동하면 안되는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 (구약을 가리키는 용어)는 요한까지니" 라는 예수님의 의도는 요한은 즉 구약이라는 이야기를 하신 의미이고 위에서 그 구약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 (빛이 아닌)이며 육적 이스라엘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었다는 말씀으로 자신의 의도를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는 너희들 (육적 이스라엘)이 그 등불에 즐거이 있기를 원했던 이유는 그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했기 때문이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큰 과오를 말씀하시고 그 등불에 대한 배경 (사람의 증언) 에 대한 자신의 빛의 배경 (아버지 하나님의 증언)을 설명하시고 요한의 등불 (성경) 보다 더큰 하나님의 역사 (십자가)를 대조 시키신다. 침례 요한의 증언 (구약)은 신학의 핵심이다. 구약은 신학의 핵심이다.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것" 이 듯이 이 성경은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말하는 신학이다.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말하는것이다라고 설명하시는 명쾌한 신학이다. 그러나 구약(신학)속에는 영생이 발아하는 씨앗의 눈 (핵)이 없다. 구약의 가르침은 앞으로 영생의 나무가 죽은 나무-저주의 나무(첫째 아담의 육체)로 동산에 설것이고 그 나무에서 첫 믿음의 열매가 달릴것이며 많은이 들이 그 열매를 믿음으로 먹고 영생에 들어가는 믿음의 기이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신학으로 주어졌다. 율법도 그것을 위해 주어진 몽학 선생이고 동시에 신학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신학을 잘못 이해햇다. 신학을 바로 세우라고 택한 그 나라가 신학에 실패했다. 다시 말해서 초림을 준비하라는 신학의 골짜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신학을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초림을 망가뜨린 민족이 되고 말았다. 그 신학의 기능은 손가락질이다. 내가 메시야가 아니고 저분이 메시야라는 손가락질 말이다. 요한은 그 손가락질을 마침내 초연히 잘 수행했다. 그는 (영생)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신학) 쇠하여야 하겠다는 역할을 잘 수행했다. 이스라엘의 모든이들이 잘못 이해한 신학을 그가 바로 세우는 (길을 평탄케하는) 역할을 잘 해냈다. 세상죄를 질수도 없고 지지도 못한 그 구약 (신학)의 한계를 인정하며 이제 그 짐을 질 하나님의 어린양이 저기 있다라는 손가락질에 그는 실패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 이라 함은 신학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고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로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 라고 하신는 말씀에서 예수 (영생의 본질)께로 나아가는 행동은 신앙이다. 너희가 신앙에 실패하고 있다는 질책이다. 신학이 똑바로 섰더라면 신앙에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신앙에 머무르기 보다는 신학에 머무르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손가락질 (신학)이 바로되어야 올바른 신앙이 생길 수가 있다. 신학의 한계는 인간(죄인)으로 하여금 지킬수도 없는 하나님의 영역의 것들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은혜의 영역은 결코 지킬 수도 없고 감히 따라할 수도 없는것들을 다만 믿으라고 하는것이다. 신학에 실패한자들 (구약을 잘못 이해한 유대인들)이 가는길은 영생의 주인을 못박는 길이고 그 십자가 아래서 잘못된 신학에 찌들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모여서 그 못박힌 자국에서 흐르는 보혈을 마시는 진정한 신앙의 행위를 보여주는 일을 우리는 쉽게 보지 말아야 한다,. 신학을 신앙으로 오해한 무리들이 유대인들이다. 신학의 배경도 없지만 예수의 살과 피에 참예하게된 무리들이 이방인들이다. 초림에 대한 신학이 구약이고 그 초림을 준비하라고 세운 백성들이 그 초림을 망가뜨렸다. 재림에 대한 신학이 신약이고 그 재림을 준비하라고 세운 영적 이스라엘 (라오디게아)이 다시재림을 망가뜨리고 있다.재림의 핵심인 예수는 문밖에 세워두고 불로 연단한 금도 없고 흰옷도 입지 않고 안약도 바르지 않은 상태다. 순식간에 신학과 신앙이 짬뽕이 되는 우리의 처지 말이다. 신학이 신앙위에 군림하는 그 꼴볼견은 또 어찌하고... 그들의 신학은 이런 상태일것이라고 예언된것이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작금의 글들에서 우리는 땅을치고 통탄해야할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잘못된 신학의 홍수가 이교회를 덮으려 하고있다. 신학의 한 줄기 (안식일)를 옹호하기 위하여 신앙의 본질인 예수는 그 안식일을 지키려 온듯한 신학의 증언과 도구로 쓰여지고 신학은 다시 지켜야할 저주의 단계로 돌아가고 있다. 율법이 복음을 옹호하는것이 아니라 복음이 율법을 옹호하는 형태로 변질되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재림교회의 신학을 신학과 신앙이 짬뽕이된 영역으로 끌어가고 있음을 개탄하는 사람이다. 마치 와 같은 상태로 말이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받아들인 상태가 곧바로 영생의 상태인것처럼 착각한대로 우리도 착각하고 있다. 성경은 신학이고 예수 (메시야)는 신앙이다. 몸이 건강해야 마음 (생각) 이 건전한 것처럼 신학이 건전해야 신앙이 건전할 것이다만 신학의 근거도 없던 이방인들이 신앙을 잘 받아들이고 신앙속에 잘 적응했던 초기의 교회처럼 나는 신앙에 집중하기를 희망하며 사는 사람이고 그러할찐대 굳이 내가 태어난 이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야할 필요가 없는것이다. 만약에 진실로 신학이 영생을 베푸는 능력의 일부라도 된다면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 교회를 떠났을것이다. 우리의 신학이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초림을 준비하도록 부탁했던 구 이스라엘이 초림을 망가뜨린 그 일이 혹시 재림을 준비하라고 부탁한 교회도 그럴것이라는 표상적 의미는 아닌것인지 나는 재림 신학에 관한한 언제나 심정이 초조하다. 신학에 실패할 수는 있어도 신앙에 실패하면 안된다. 신학에 실패한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신앙에 실패한 자들은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재림을 준비하는 과정은 신학적이거나 예언적 수순이 아니다. 오른쪽과 왼쪽으로 편 가르는 영생의 마지막 갈림길은 신학의 결론이 아니다. 누가 나에게 물 한잔을 주고 밥한 그릇을 주고 또 옥에 갇혔을 때 찾아 왔느냐의 신앙적 수순만 물을 것이다. 그렇다 율법은 구약 (신학)의 등불같은 진리였다. 그러나 복음은 신약이면서 동시에 (신앙)의 빛이요 길이요 생명이요 또 핵심 진리이다 어쩌다 아빕월 무교절 신학에 온 영혼이 팔린 김 씨도 돌아오라. 십자가로 돌아오라. 성경의 모든 각을 세워 천주교 사냥에 힘을 빼는 재림교회 사냥개들아 돌아오라. 신학에 머무르기를 즐겨하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돌아오라 신앙으로 제발 돌아오라 또 다시 신학을 마치 신앙인 것처럼 끌고가는 염소들아 돌아오라. 우리함께 신앙에 굳게서서 주의 재림을 준비하며 살아보자. 재림교회는 신학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된다. 신앙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아무리 높은 신학의 울타리 위에서도 또렷이 보이는 저 십자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본질이요 중심인 십자가로 돌아오라. 신앙만이 살길이다. 그 신앙안에서는 울타리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은 오늘도 성령과 함께 우리가 신학에 머물기 보다는 신앙에 머물기를 바라신다. 갈라디아서 3:1 |
2014.03.24 03:24
이 교회를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않는 분명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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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 게시판 자료 바로위에 십자가에서 가시관 쓰시고 고통하는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계신다.
우리가 다른데로 자꾸가면 그 고통이 어떠하랴?
신학에도 실패하고 신앙에도 실패한 무리가 유대인 하나면 족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