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L 집사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텅 빈 채로 말이나 생각이
일어나기보다 아쉬움에서 안타까움으로 바뀐다.
이러다 집사님에 대한 기억마저 사라질 것 같아
주섬주섬 더 늦기 전에 그의 자취를 조금이나마 남겨보려 한다.
그분은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가족으로는 3년 전 먼저 돌아가신 어머니뿐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마지막을 보냈던 몇 년이 가장 좋았다고 들었다.
어머니와 함께 지내던 집에서 혼자 지내기가 너무 외로웠는지
다른 주에 살던 거동이 불편한 먼 친척 사촌 누나를
모시고 살며 안식일 함께 교회로 왔다.
그러다 L 집사님이 뇌와 폐에 암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지난해 초였는데 암이 얼마나 신속히 그의 몸에 퍼졌는지
바로 수개월 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April 6, 1947 - April 28, 2013)
나는 그분을 교회에서만 보았다.
마지막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서 또 그분의 집에서 한 번 뵈었을 뿐
그분에 대해서는 잘 몰랐는데 그의 장례 예배에서 그분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교인들보다 이웃들이 더 많이 참석했고
사셨던 커뮤니티 (시 보다는 작은 단위)의 장과 관리인들이 참석하여 그를 추모하였다.
그의 장지는 친구 중의 한 사람이 기증하여
더 필요한 것 없이 장례식을 잘 치르기도 했다.
그리고 살던 커뮤니티 입구에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기를 며칠간 달았다는 것이다.
그가 얼마나 이웃들과 지역 사회를 위했는지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아파 누웠다는 소리를 듣고 전화로 드시고 싶은 것이 없는지 물어보니
이웃들이 음식을 많이 해주어 먹고 싶은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약값이었다.
무슨 약인지 2,000불이 넘는다고 했다.
그것을 감당하기 힘들어 그는 두 군데의 암 중에서
뇌만 방사선으로 치료받고 폐는 약을 먹다가 안 먹다가 했었다.
평소 그는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핼러윈 날에는 아이들이 사탕을 얻으려고 그의 집을 방문하면
선거에 누가 당선 될 것인지 아이들에게 물어보고 또 그 이유를 묻고
집 앞에 만든 투표함에 아이들이 던진 표를
지역 신문에 게재하기도 했었다.
그는 모든 전쟁을 반대하고 녹색당을 지지했다.
그는 녹색 글자가 쓰인 셔츠를 입고 교인들과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지지가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관심은 환경에 있었다.
그의 전공은 컴퓨터였고 그는 주립 대학교의 전산실에서
자료에 관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정부의 예산 축소로
그의 부서가 사라지게 되어 일자리를 잃었다.
그러자 그는 전공을 환경으로 바꾸고 과목들을 이수하고
논문 심사에서 어려움을 겪다 결국 최종 학위를
받지 못한 채 마지막 몇 년을 힘들게 보내다 쓰러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웹 사이트를 만들어 마지막까지 관리하였다.
마지막 병상에서 그는 비밀번호를 기억하지 못하여
자신의 이메일 계정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몹시 안타까워했다.
그의 곁에는 그의 마지막을 아는지 가족과 같던
개가 그의 품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함께 있었다.
그의 웹 사이트에서 나는 그의 학력과 경력들을 보았다.
그는 Bell과 NASA에서 일하였다.
그가 우리 교회로 개종한 뒤로 개척대에서 오랫동안
아이들을 데리고 야외에서 활동을 많이 했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교단이 아니지만, 안식일을 지키는
작은 분파의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그 교회 음악들을 모으기도 했다.
평소 안식일 학교에서 의문나는 자연과학에 관한 질문들을
그는 거침없이 짧게 늘 익살스럽게 답해 모두를 즐겁게 했다.
그리고 그는 동굴에 관한 책들을 몇 가지 써내기도 했고
여름에는 동굴들을 찾아다녔다.
또 지역의 천체 관측 동호회를 몇 년 동안 이끌었고 다른 커뮤니티 봉사 활동도 많이 했었다.
그의 사이트에서 그가 지은 시들과 수필, 유머도 보았다.
한 가지 기억이 나는 것은 그의 어머니 추모예배였다.
추모 예배는 그가 주관했는데
처음에 교회에서 장소를 빌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어머니가 젊었을 때 세상의 서커스 공연단에서 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목사님과 직원들을 설득하고 기다리며
허락을 받아내고 늦게 추모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예배의 순서에 교인들과 이웃들을 골고루 넣어
거의 한 집에 한 사람씩 순서에 넣고 직접 원고를 구해 주기도 했었다.
그리고 순서에 참여한 사람들 이름 옆에 시간을 1분 혹은 30초 많으면 2분
정확히 순서지 옆에 기록하고 마치는 시간까지 기록해 놓았는데 매우 정확했다.
그 후 그는 어머니의 글들과 그림들과 유품들을 모아
작품집을 발간해 나누어 주었는데
그 속에는 어머니의 이야기들 가족들 친척들 그리고 여러 가지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
이제 그의 집에는 사촌 누나와 또 그가 전에 집이 없어
갈 데가 없던 이웃에게 방을 내어 주었던 그 사람이 살고 있다.
그가 지금은 집사님을 대신해서 사촌 누나를 병원으로 모시고 가고 있다.
그리고 주인을 잃은 개가 함께 살고 있다.
집사님이 마지막까지 기다리고 바라던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끝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던 모습,
평소 늘 이웃과 자연을 사랑하던 모습이 생각이 나기에 그렇다.
많지 않은 그의 친척들
그의 어머니와 어릴 적 아버지에 관한 사진과 기록들을
컴퓨터에 넣어두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소개하는 것을 즐겼다.
텃밭에 채소를 직접 심고 거두어 나누어 주며
교회와 주위의 대소사에 늘 참석하면서 어울리던 분이었다.
찬미가 226장 "너는 너무 큰 일만을 생각하면서 먼데 비출
생각만 말라 너의 곁에 언제든지 할 일 있으니 너 있는 데서 비추라." 를
실천하신 집사님이었다.
너무 쉽게 아쉽게 곁을 훌쩍 떠난 L 집사님의 유산은 크다.
어떤 이웃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다.
이런 분을 보는 것이 드물고 나 자신 따라 하기 힘들다.
L 집사님, 생전에 좀 더 가까이 지내지 못해 아쉽습니다.
산 사람은 그렇게 속히 떠나는 것을 몰라 그렇습니다.
차가운 이 땅의 밤이 속히 지나고
따듯한 봄 그리던 어머니 품에서 깨어
우리 곁에 다시 당신의 웃음을 두게 하소서.
우리 삶에도 예수님의 흔적이
발견되는 삶이기를..
늦었지만,
고인되신 L집사님
예수님 오실때까지
편히 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