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30일 / 사순절 넷째 주일
사순절에 기억해야 할 사람들 3
말라기 3:5 마태 20:1-16
곽건용 목사
똥물을 뒤집어쓴 사람과 백혈병 걸린 사람
요즘 미국 동부에 사시는 어떤 분이 문동환 목사님 자서전 <떠돌이 목자의 노래>를 보내주셔서 읽고 있습니다. 한 5분의 3 정도를 읽었는데 내용이 여간 흥미롭지 않습니다. 문익환, 문동환 목사님 형제는 한국교회가 낳은 보물 같은 분들입니다. 문익환 목사님은 한 20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문동환 목사님은 현재 92세이신데 지금도 한국에서 비교적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얼마 전에 듣기론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성경공부를 진행하고 계신답니다. 자서전에는 제가 아는 분들도 많이 나오고 제가 아는 사건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적혀 있어서 더욱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거기 나오는 얘기 한 토막을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1978년에 있었던 ‘동일방직 사건’이 그것입니다.
젊은 세대는 잘 모르는 사건이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도 지금은 거의 잊어버린 사건이지만 당시에는 큰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동일방직 사건입니다. 긴 얘기를 다 할 수는 없고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동일방직은 꽤 오래 된 회사인데 1970년대 들어와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노동조합이 생겼답니다. 하지만 회사와 정부는 이 노조를 가만히 두지 않았지요. 그들은 대의원대회 자리에 투표하러 온 노조원들에게 회사의 사주를 받은 남자노동자들인지 용역인지를 시켜서 양동이에 담아온 똥을 퍼부었습니다. 느닷없이 똥 세례를 받은 여성노동자들은 “우리가 아무리 가난해도 똥을 먹으면서 살지는 않는다!”고 울부짖으며 저항했지만 출동한 경찰은 말리기는커녕 똥을 뒤집어쓴 여성 노동자들을 조롱하고 욕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자서전에는 여자노동자들이 똥을 뒤집어쓴 사진이 실려 있는데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지경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습니다. 1978년 2월이면 제가 대학에 붙었다고 신나서 돌아다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사회 한쪽에서는 이런 처절한 사건이 벌어졌던 겁니다. 자책감이나 죄책감 같은 걸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이란 말이 실감납니다. 지금 2-30대 젊은이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그들은 이해하지도 믿지도 않을 겁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이런 걸 보면 세상이 달라지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세상은 정말 그렇게 달라졌습니까? 1978년과 2014년이니 36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세상은 정말 그렇게 달라졌는가 말입니다.
저도 아직 보지 못했는데 <또 하나의 약속>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모두가 부러워하는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삼성’이란 회사 말입니다. 삼성은 모두들 부러워하는 회사입니다. 그래서 방진복 입고 독한 화학약품에 노출되고 악취와 분진 가루 속에서 숨 쉬며 점심을 김밥으로 때우면서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일해도 힘든 줄 몰랐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백혈병에 걸렸고 같이 일하던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은 뇌종양으로 눈물을 흘리지도 걷지도 못하게 됐고 유방암에 걸려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영 작별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절박한 심정으로 근로복지공단과 회사를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방문은 늘 입구에서부터 가로막혔고 아무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병과 죽음은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했고 심지어 사과하라는 절규조차 회사와 정부는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다수가 행복하다고 해서 행복한 사회가 아니다!
이런 일이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비록 힘들지만 비교적 건강한 몸으로 가족들을 부양하면서 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산업재해를 당한 사람들, 회사와 정부 측에 의해 눈이 띠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노동자의 숫자는 그렇지 않은 노동자의 숫자보다 적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이 특수한 일이 누군가에게 벌어졌다는 사실이고 그래서 이 특별한 경우가 그 사람에겐 피할 수 없는 현실이란 점입니다.
세상은 다수의 사람들이 행복하면 그 사회는 행복하다고 말들 합니다. 이른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말입니다. 하지만 성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랍비 아브라함 헤셀은 구약성서의 예언자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예언자는 가난한 과부나 고아, 나그네 한 사람이 고통당하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 우왕좌왕 하신다고 믿는 사람이다.” 헤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보잘것없는 사람이지만 저도 헤셀처럼 그렇게 믿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은 하늘에서 어떻게 하고 계실까요? 대한민국의 여자노동자들이 똥물을 뒤집어쓸 때, 백혈병이나 뇌종양으로 죽어갈 때, 하지만 아무도 그들의 절규를 들어주지 않을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어떻게 하고 계실까요?
2014년 사순절에 기억해야 할 두 번째 사람들은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어려운 상황 속에서고 굽히지 않고 저항하는 노동자들입니다. 요즘은 어느 분야에서나 ‘원칙’이란 것이 무시되고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원칙을 말하는 게 부질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한번은 노동에 대한 성서의 원칙을 살펴야겠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노동은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노동은 선하고 거룩하고 즐겁고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노동은 하나님의 창조와 함께 시작됐습니다. 성서는 하나님도 노동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실 때도 일하셨고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예수님도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한 5:17)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람에게 관리하라고 위탁하셨는데 노동을 통해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관리하는 일은 노동을 통해서, 오로지 노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사람은 노동하시는 하나님을 따라서 노동을 하는 게 마땅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은 노동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노동’이라고 말입니다.
노동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창조계획 안에 들어 있습니다. 노동은 하나님의 명령이자 동시에 축복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노동하게 됐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성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걸 ‘타락’이라고 보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노동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로 발생했다는 오해입니다. 그게 아니라 노동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창조계획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사람이 노동에서 소외되기 시작했지만 노동 그 자체는 거룩한 하나님의 창조계획에 속해 있습니다. 노동은 창조이고 나눔이며 섬김과 봉사의 기초입니다. 노동하지 않으면 나눌 수도 섬길 수도 봉사할 수도 없습니다. 노동이 없는 나눔과 섬김을 진실한 의미에서 나눔과 섬김이라 할 수 없습니다.
노동의 소외를 막기 위한 성서의 장치들
구약성서에는 사람의 노동을 보호하고 거기서 소외되는 걸 막기 위한 장치들이 상당히 많이 들어있습니다. 그 중 두 가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첫째로 품꾼의 품삯에 관한 계명입니다.
같은 겨레 가운데서나 당신들 땅 성문 안에 사는 외국사람 가운데서 가난하여 품팔이하는 사람을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날 품삯은 그 날로 주되 해가 지기 전에 주어야 합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날 품삯을 그 날 받아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가 그 날 품삯을 못 받아 당신들을 원망하면서 주님께 호소하면 당신들에게 죄가 돌아갈 것입니다(신명기 24:14-15).
품삯에 관한 규정은 내국인과 외국인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걸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품꾼을 부렸으면 그 삯을 반드시 그 날 주라는 겁니다. 이 규정을 잘 읽어보면 구약성서에서 품삯은 단순히 일을 시키고 일꾼에게 지불하는 돈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가 아니란 얘기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규정은 하나님을 품삯을 못 받은 노동자를 대신해서 품삯을 받아주시는 분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만 더 들어보겠습니다. 옛날엔 대부분의 경제활동이 땅을 근거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땅은 생존의 근거였습니다. 땅은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든 가난해져서 갖고 있던 땅을 남에게 넘겨줘야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런 경우에 성서는 다음과 같이 하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네 친척 가운데 누가 가난하여 그가 가진 유산으로 받은 땅의 얼마를 팔면 가까운 친척이 그 판 것을 무를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그것을 무를 친척이 없으면 형편이 좋아져서 판 것을 되돌려 살 힘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판 땅을 되돌려 살 때에는 그 땅을 산 사람이 그 땅을 이용한 햇수를 계산하여 거기에 해당하는 값을 빼고 그 나머지를 산 사람에게 치르면 된다. 그렇게 하고 나면 땅을 판 그 사람이 자기가 유산으로 받은 그 땅을 다시 차지한다. 그러나 그가 그 땅을 되돌려 살 힘이 없을 때에는 그 땅은 산 사람이 희년이 될 때까지 소유한다. 희년이 되면 땅은 본래의 임자에게 되돌아간다. 땅을 판 사람은 그 때에 가서야 유산 곧 분배받은 그 땅을 다시 차지할 수 있다(레위기 25:25-28).
우리 속담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는데 구약성서에는 이것과 달라도 많이 다른 얘기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땅을 빚 때문에 남에게 넘겨줬을 때에는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를 대신해서 땅을 되찾아줘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친척의 의무였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런 친척이 없으면 본래 주인이 열심히 돈을 벌어서 땅을 되찾아야 하는데 그럴 때는 땅을 산 사람이 햇수를 계산해서 그동안 벌어들인 걸 땅값에서 제하고 돌려주라는 겁니다. 땅값이 오르기를 바라고 땅을 사고파는 현대인에겐 상당히 낯선 규정이지만 빛 때문에 땅을 넘겨줘야 했던 사람에게는 얼마나 큰 도움이 됐겠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앞에서 말한 모든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희년이 되면 무조건 원래 주인에게 땅을 돌려줘야 했습니다. 희년은 7년 만에 돌아오는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다음해로서 희년이 되면 모든 빚은 소멸되고 빚 때문에 남의 종이 된 사람들도 모두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이 밖에도 구약성서에는 노동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다양한 계명들이 있습니다. 그 중 어떤 것은 오늘날의 법률보다 더 선진적인 것도 적이 않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하러 나서기 전까지는 노동자였습니다. 제자들 역시 대부분이 노동자이기도 했고요. 그럼 예수님은 노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하는 점이 궁금합니다. 안타깝게도 예수님이 노동에 대해 직접 하신 말씀은 전해지지 않지만 비유들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노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는지를 어느 정도는 추측해볼 수는 있습니다. 이를 살펴볼 가장 좋은 비유는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의 비유입니다. 이것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노동을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노동의 의미와 목적과 가치를 어떻게 보셨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모두 한 데나리온 씩 주는 게 내 뜻이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는 말씀으로 말문을 여셨습니다. 하늘나라 또는 하나님나라를 포도원 주인과 비교하신 겁니다. 주후 1세기 유대에도 오늘날 노동시장 같은 곳이 있었나 봅니다. 누가 불러서 써주길 기다리고 있는 일용직 노동자들의 시장 말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그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오전 아홉 시쯤에 나가보니 아직도 장터에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닙니까. 주인은 그들에게 ‘적당한 품삯’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그들도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주인이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 심지어는 하루 일과가 거의 끝나가는 오후 다섯 시에 나가보니 여전히 일자리를 구하는 노동자들이 있어서 모두 고용했다는 겁니다. ‘완전고용’이 이루어졌습니다. 주인의 의지가 작용해서 그렇게 됐습니다.
하루 일과가 끝나자 주인은 관리인을 불러 “일꾼들을 불러서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맨 먼저 온 사람들까지 품삯을 치르라.”고 했습니다. 맨 처음에 오후 다섯 시에 온 일꾼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게 아닙니까! 그들도 깜짝 놀랐을 겁니다. 겨우 한 시간 일하고 하루 품삯 전부를 받았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되리라곤 기대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오전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들이 그보다 더 받으려니 하고 생각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비록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약속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한 데나리온만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투덜거리며 말했습니다.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했습니다.” 맞는 말이죠? 고작 한 시간만 일한 사람과 열두 시간 이상 일한 사람을 똑같이 대우하는 건 부당합니다. 여러분이 이 사람들 처지였다고 해도 똑같이 불평할 터이고 이는 어느 나라, 어떤 사회에서든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러나 이들의 불평에 대해 주인은 “여보시오, 내가 당신을 부당하게 대우했소?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시오. 당신에게 주는 것과 똑같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이오. 내 돈을 내 맘대로 쓰지 못한단 말이오? 내가 후한 게 당신 눈엔 거슬리오?”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주인의 처사는 과연 정당합니까? 여러분은 그걸 정당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을 겁니다. 주인의 처사를 정당하다고 여길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무리 자리 돈이니 자기 맘대로 쓴다 해도 이건 정당한 처사가 아니지요. 고작 한 시간 일한 사람과 열두 시간 이상 일한 사람을 똑같은 품삯으로 대우하는 걸 어떻게 정당하다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비유의 핵심은 ‘일한 만큼 받는다.’거나 ‘일하지 싫으면 먹지도 말라.’와 같은 교훈에 있지 않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노동이 무엇이냐, 노동하는 사람의 권리가 무엇이냐를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이런 얘기입니다. 일한 만큼 받는다는 것이 노동의 원칙인 것은 맞습니다. 사람은 노동한 만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노동에는 이보다 더 근본적인 원칙이 있는데 노동하는 사람에게는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대가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비유에서 모두에게 주어진 액수가 한 데나리온이라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성인 노동자 하루 일당입니다. 하루에 그 정도가 있어야 생존이 가능한 액수인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나라는 모든 노동자에게 한 데나리온 씩 준 포도원 주인과 같다고 했으니 하나님나라에선 모두가 다 배터지게 먹을 수는 없어도 아무도 굶지는 않는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성과급이나 ‘일한 만큼 받는다.’는 원칙은 보다 근본적인 이 원칙 위에 서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 교우들을 생각했습니다. 교우들 중에는 종업원 품삯을 주는 분은 별로 없네요. 그러니 이 비유가 우리 교우들이 꼭 들어야 하는 비유는 아닐지 모릅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지요. 여러분 중에 사업이 잘 되어서 많건 적건 종업원들을 고용해서 일하는 분들도 생기겠지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그때가 되면 오늘 제가 한 설교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고용한 종업원의 삶을 좌우하게 될 텐데 그때 오늘 비유를 잊지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성서는 품삯을 받지 못한 품꾼이 하나님께 호소하면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고용주와 종업원의 관계를 둘만의 관계가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하나님이 개입되어 있음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적어도 하루 한 데나리온은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일한 만큼 번다든가, 성과급, 이익배당 같은 것은 보다 더 근본적인 이 원칙 위에 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울러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 대해서도 잠시 얘기하겠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 드립니다. 뭘 더 달라고 바라고 드리는 게 아닙니다. 이미 주신 은총과 베풀어주신 사랑에 감사해서 하나님께 헌금과 시간과 땀을 바치는 겁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종업원의 품삯 줄 돈과 하나님께 바칠 헌금이 넉넉하지 않아 둘 중 하나를 뒤로 미뤄야 할 경우가 생기면 헌금을 미루는 게 맞습니다.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포기하는 게 맞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드리는 헌금이 없어도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종업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호소할 것이고 하나님은 그 호소를 들으시고 “내게 바칠 헌금을 종업원에게 주라!”고 말씀하실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렇게 해도 하나님은 조금도 섭섭해 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2014년 사순절은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는 전 세계의 노동자들을 기억하며 지냅시다. ♣
노란 배경색상은 퍼온이의 것.

그런대 목사님 굶어 돌아가시는것 걱정 안되는데
위로부터 알게 모르게 불이익 당할까봐 염려 되네요.
우리교단 그런데 아니니까 공연한 기우 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