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의 창조는 보이지 않는 물질인 빛이라는 것이 볼수 없는 상태인 어두움에 임하면서 어두움 (볼 수 없는것)이 빛에 반응하는 과정이다.
그 어두움의 것들이 빛에 의해서 갈라지고 (혼돈으로 부터) 채워지고 (공허로부터) 밝아져서 (어두움으로 부터) 마침내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시간에 이르는것이 완전한 상태 (심히 좋은) 이며 시간인 것이다.그것이 성경상 최초로 소개하는 일곱의 의미이다.
요한복음의 구속 또한 보이지 아니하는 말씀 (읽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생명 그리고 또 보이지 않는 빛이라는 것이 어두움에 임하면서
어두움이 생명의 근원에 반응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읽어야 하는 말씀 (율법-의문)에서 읽지 아니하고 믿어야 하는 말씀 (성육신)이 나타나고 아담안에서 이미 죽어있는 생명에서 다시 살리는 생명이 나타나고 육신을 비추었던 그 창세기의 빛에서 다시 영을 비추이는 새로운 빛이 등장한다.
첫째날의 일이다.
그리고
그 이튿날
또
그 이튿날
그리고 사흘후 (육일째)에 가나의 혼인잔치가 벌어지고
거기서 더 좋은 포도주 (십자가)가 소개되고
그 포도주를 마신자들이 맞이 할 제 칠일의 안식 (영생)을 소개하고 있다.
창세기의 핵심은 여섯날의 창조가 아니고 첫째날의 빛 (물리적) 이거니와
요한복음의 핵심도 여섯날의 과정이 아니고 첫째날의 그 빛 (영적인)이다.
빛이 비추인 부분에만 메어달리는 무리가 바리새인들이다.
그러나 빛 (핵심)에 메어달리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읽을 수 있는것
볼수 있는것 (계시와 예언)에만 메달리는 무리가 xxx인들이다.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율법은 육신의 행위를 통해 지키려 하는 것이요
복음은 영의 눈을 통해서 육신으로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는 것이다.
마태복음 12:3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표징 밖에는, 이 세대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읽고 보고 듣는것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 (육체)가 원하지만 그 육신으로는 복음을 깨닫지 못하리라는 결론이다.
빛이 비추인것은 그 빛을 알게 하고자 함이나 그 비추인것에 머무러기를 즐겨하는 자들이 되기가 쉽상이다.
그런자들이 하는말이 바로
성소 진리
안식일 진리
그리고 성경도 진리라고 우겨댄다.
진리는 보이지 않는것이고 읽혀지지 않는다는 것을 언제 우리가 알게될까.
보이는것 그리고 읽혀지는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언제쯤 우리가 알게될까.
요나의 표징 십자가의 그리스도 (빛이시요 생명이신) 만이 진리라고 언제쯤 우리는 통일된 생각을 가져 볼까?
이 진리 (빛이요 생명이신)를 영의 눈으로 바라보는자들은 틀림없이 살게 될 것이다.
이것 때문에 신학 (보이는것의 범주)이 신앙 (믿음-보지 못하는것의 실상과 증거)보다 위에 있지않음을 안다면 우린
이미 행복한 사람들이다.
아빕월 십오일의 전사여!
또 하나의 전사 왈수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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