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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강형준 문화평론가 |
세월호 참사의 여파가 지속되고 있다. 크나큰 사건이니만큼 갖가지 반응이 미디어를 통해 급속히 전파되어 즉각적인 반향을 일으키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중 하나가 유명인들의 눈물이다. 최근 손석희, 박원순, 정몽준, 박근혜 등의 눈물이 뉴스가 되었던 일은 대표적이다.
웃음과 달리 눈물은 ‘감정이 격해져야만’(感激) 발생한다. 슬픔과 분노, 기쁨과 환희처럼 반대되는 감정이라도 그것이 격해질 때는 눈물로 귀결된다. 격한 감정의 표출은 그래서 차분한 이성의 반대편, 곧 ‘비이성’의 영역에 놓인다. 하지만 비이성은 달리 말해 합리적 이성의 저편, 곧 ‘계산 없는 상태’와 연관되어 있다. 눈물이 ‘진정성’을 표상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게다가 눈물은 영혼을 상징하는 ‘눈’에서 나온다.)
진정성에 대한 애착이 심한 한국 문화에서 눈물은 대개 한 인물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문화적 기호로 통용된다. 눈물 흘리는 인간은 바로 그 순간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들키고야 마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성의 기호로서 눈물은 역설적으로 가장 진부한 ‘연극성’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진정성과 연극성을 감별하는 기준은 모호하고 주관적이어서, 유명인의 눈물은 언제나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손석희와 박원순의 눈물이 진짜고, 정몽준과 박근혜의 눈물이 가짜라는 것을 ‘증명’하기란 쉽지 않으며, 따라서 눈물은 많은 경우 자기편을 확인하는 데 활용되기 일쑤다.
그런데 과연 눈물이 ‘감정’의 표상이기만 할까? 감정은 그저 ‘비이성’의 영역이기만 할까? 그렇지 않다. 눈물을 비롯한 여러 감정은 지각 혹은 인식을 전제하는 기호다. 법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시적 정의>라는 책의 3장에서 감정이 법적 판단과 분리될 수 없음을 논증하고 있기도 하다. 감정은 대상에 대한 인식 속에서만 발생하며, 그 인식은 대상에 대한 주체의 가치판단을 전제한다. 세월호 소식을 접하며 흐르는 내 눈물은 세월호에서 죽은 이들이 무고하다는 인식, 그들의 죽음이 이윤을 생명 위에 놓는 자본주의와 국민의 안전을 도외시하는 국가로 인해 발생했다는 지각, 나와 내 가족도 언제든 그런 사고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을 전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눈물은 진정성의 차원으로만 한정될 수 없으며, 눈물 뒤에 놓인 인식과 가치판단에 대한 ‘이성적’ 점검과 연결될 때 그 진면모가 드러난다. 눈물 흘리는 이와 그의 행적을 연결시키는 것이 한 방법이다. 가령, 손석희의 눈물은 변질된 지상파에 비해 훨씬 더 꼼꼼하고 공정한 뉴스를 만들어낸 그의 언론행위가 있었기에 감동을 줄 수 있었다. 반면, 막내아들의 발언을 사과하는 정몽준의 눈물은 무고하게 죽은 단원고 학생들과 달리 최상의 환경에서 자라난 그의 “철없는 막내아들”이라는 존재, 현대중공업 공장에서 죽어나가는 노동자들이라는 현실 앞에서 실체를 드러낸다. 박근혜의 눈물은 어떤가. 안전을 강조하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사실, 여러 규제를 ‘암덩어리’이자 ‘원수’로 부르며 풀었던 사실, 희생자 가족을 사찰하고 시위자를 연행하는 경찰의 존재, 분향 장면을 연출했던 전력, 한반도 전체를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는 원자력 사고에 대한 무지, 대국민 담화 당일 아랍에미리트로 출국해 원자로 건설을 응원하는 행위 등은 그의 눈물 뒤에 놓인 처참한 인식 상태를 ‘증명’해준다. 나훈아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 했지만, 사실 눈물은 인식의 씨앗이다. 나라를 책임진 대통령의 눈물 앞에서 감동 대신 끔찍함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출처: 한겨레신문 논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