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와는 다른 성격의 레임덕을 선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종전에는 주로 정국 주도권을 잃는다는 관점에서 레임덕을 논했습니다. 정부 관료들과 소속 정당들의 정치인들을 포함한 국회 여야와의 관계에서 영(令)이 서지 않는 것을 레임덕이라고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아예 사회와 시민들과의 관계에서 그러합니다. 설사 성공한 대통령과 정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실패는 하지 않은, 설사 실패했다 해도 온 나라가 공감할 수 있는 목표를 진정으로 추진했다는 일말의 '인정'이나마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 목표가 경제민주화였든 경제성장이였든 안보강화였든 뭐였든지 간에 말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재임 당시 보수는 물론, 진보진영으로부터도 거센 비판을 받았지만, 그래도 낡은 정치 혁파의 기치 아래 반권위주의적이었고, 서민적이었다는 진정성만큼은 인정받았습니다. 퇴임 이후 고향에 내려가 보여준 일상적 삶의 모습에 대한 국민적 찬사, 서거 때의 추도 행렬과 이후 국민들이 보여준 우호적 평가의 확산은 진정성에 대한 인정에 바탕한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마저 누르고 호감 가는 대통령 1위의 자리에 오른 것이나, '유러피안 드림'으로 대표되는 경제민주화와 복지강화의 노선을 따라야 했다는 퇴임 직전의 고백과 자책이 '노무현 정신'으로 이어져, 범진보의 노선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런 이유입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시도가 17대 총선에서 오히려 심판받았던 것도 그런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분명 노무현 대통령에 비해 탄탄한 고정지지층을 갖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유지될는지, 저는 그 기반이 점차 허물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보수층 유권자라고 불리는 분들이 박 대통령에게 보인 높은 충성도는 무조건적인 것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보수층은 결코 맹목적인 분들이 아닙니다. 이념적으로 매우 경직된 분들이기는 합니다. 반공주의-반북주의가 그 이념의 핵심 내용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단과 전쟁이라는 역사적 경험에 바탕한 것입니다. 자신과 가족의 생명과 안정과 재산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던 비극적 역사 말입니다. 인민재판과 교차살인과 집단학살 같은 비인간적이고 비이성적인 폭력과 광기가 지배했던 시대 말입니다. 독재 권력마저 감수하면서 경제성장을 최우선 가치로 받아들였던 것, 그리고 구복 신앙의 성격을 띤 종교에 의존해 삶의 고충을 위로받고자 했던 것도 다 그러한 역사를 헤쳐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분들은 자신들의 삶의 기반을 지켜주지 못하는 정치질서와 지도자에 대해서 대단히 비판적인 분들입니다. 진보에 대한 무의식적 공포의식(레드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늘 보수를 선택한다 해도 무능과 유능을, 죽을 길과 살 길을 구분할 줄 아는 분들입니다.
보수층 대부분은 지배 엘리트가 아닙니다. 하지만 누가 자신들을 지켜줄 지배 엘리트인지는 잘 아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은 왜 이완용 같은 통치 엘리트들이 이 나라를 일본 제국주의에 내주었는지 잘 아는 분들입니다. 민중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빼앗기는 것보다, 나라를 내주더라도 자신이 가진 것을 지켜줄 외세를 선택했던 것이 이 땅의 지배계급들이었다는 것을 잘 아는 분들입니다. 미국인인 브루스 커밍스조차도 <한국 현대정치사>를 통해 알고 있음을 보여주었듯이, 실제로 일제는 양반계급은 손대지 않았습니다. 보수층의 대부분은 이 땅의 지배 엘리트라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버릴 수도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민주주의에 반하는 심각한 폐해를 내장하고 있는 국가주의, 애국주의, 민족주의 중시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반공주의와 반북주의, 성장주의와 함께, 국가주의, 애국주의, 민족주의를 그리도 강조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제일 큰 이유는 일제 부역 경험과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정당성이 취약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충성도 높은 보수적 지지층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사익 추구의 DNA를 갖고 있는 보수층 내부의 지배 엘리트들과 무(無)국적성을 본성으로 하는 자본가 계급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서민적 풍모를 내세웠던 것 역시도 그러한 이유입니다. 만약 옛날의 양반 계급들처럼 자신들을 버릴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이 득실대는 정권이라면 지지를 유보하고 철회할 수도 있는 분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 박근혜 대통령이 중앙아시아 3개국(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을 무대로 한복 외교를 펼치는 동안, 국내는 '문창극 사태'로 몸살을 앓았다. 박 대통령은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안 재가를 귀국 후인 21일로 미뤘다. ⓒ연합뉴스
세월호 참사 이후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연이은 인사 파동으로 출범 이후 처음으로 부정적 평가가 50%대를 넘어서게 된 것에는 보수층의 숙고가 시작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지금 당장은 박 대통령을 버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적폐 척결을 이야기하면서도, 적폐에 사로잡힌 모습을 반복해서 보이게 되면 사정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에 비견할 어떠한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계속 악수만 두는 정치를 반복하면서 (저 역시 참으로 거북하고 싫은 표현입니다만) 국가 개조라는 분명한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정치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고립될 가능성이 점점 커질 것입니다. 이른바 박근혜식 레임덕에 빠질 가능성 말입니다. 이제 대통령의 눈물도, 집권 여당의 사과도 효과가 사라진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자신이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낙인 찍었던 노무현 대통령을 따라, 재신임을 묻겠다며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는 도/박을 걸어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냥 '이 사람 믿어주세요'라고 하며, 스스로 표방했던 보통 사람들의 시대에 역행했던 노태우 대통령의 전철을 따라 하느냐는 냉소에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요사이 정치를 보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통치 행태를 보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또 다른 고백이 떠오릅니다. "새 시대 첫차인 줄 알았는데, 구시대 막차였다"는 자조 섞인 고백 말입니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 시기엔 구시대 막차도 아니라, 구시대 첫차에 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구시대를 다루는 드라마의 세트장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현실감을 느끼기 힘든 가상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 말입니다. 과거로 시간여행을 왔나 싶을 정도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진도(珍島)에만 갈 것이 아니라, 진도(進度)를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말대로 적폐를 척결하고 나라의 기본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까지와는 달라야 합니다. 귀국 후에 총리 후보 하나 날리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진용을 완전히 새롭게 짜야 합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려고 하는 정치를 해서는 안 됩니다. 새누리당 계열의 두 선배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이라도 뛰어넘어야 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임기 중반기를 거치며 '역사 바로 세우기'를 내세우고서도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내는 것에서 그쳤던 것, 이명박 대통령이 임기 중반기에 들어 '공정 사회'를 표방하기만 했던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박 대통령이 존경한다는, 롤모델로 삼고 있다는 대처를 넘어서서, 대처의 한참 선배이자 보수주의 원조인 에드먼드 버크나 보수당의 이념 토리즘의 창시자인 디즈레일리가 선보인 보수정치를 시도해야 합니다.
5년간 무대 패션만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