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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7.08 18:27수정 : 2014.07.08 22:34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한국 진보정치는 기반을 잃어가는 느낌이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기초의회 의원 당선자 수를 합산하면 137명이나 됐다. 그때는 집권여당인 한나라당 기초의회 의원 수의 약 10% 정도 돼 그나마 ‘가시적 소수’ 역할이라도 했다. 그러나 지난 지방선거에선 통합진보당과 정의당, 노동당의 기초자치의원 당선자 수를 합해 불과 51명, 새누리당에 비해 3% 정도 될까 말까 한다. 노동당 당원인 나로서도 늘 위기감을 느끼지만, 가면 갈수록 노동당뿐만 아니라 모든 진보정당들의 존재감이 없어진다.

진보정치의 위기는 하도 복잡한 현상인지라 제대로 설명하자면 단행본 한권쯤 써야 한다. 당연히 진보의 지리멸렬해짐을 전부 진보주의자 자신들의 탓으로 다 돌릴 수도 없다. 노동자로서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노동계급을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갈수록 지배자들이 조종하는 노동자들의 분열이 심화된다. 단순한 노동자란 이제 없다. 정규직이 있는가 하면 무기계약직, 기간제 계약직, 촉탁직, 파견직, 임시직, 알바 등등이 있을 뿐이다. 새로운 신분제로서의 신자유주의적 고용체제는 이제 그 복잡한 서열로 조선시대 신분제를 능가할 정도다. 고용의 범주들을 넘어서는 연대가 어려워지는 만큼 그런 연대를 기반으로 하는 계급정치도 어려워진다. 지배자들에 의한 끝 모를 비정규직의 양산과 함께 정규직의 노조들이 탄압받고 위축된다. 예컨대 지금 각급 학교 교직원의 42%나 이미 비정규직이고 그 비중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동시에 이번 정권의 탄압을 집중적으로 받는 전교조 조합원의 수는 장기적으로 감소 추세다. 2003년에 9만명이 넘었지만 지금 6만명 정도다. 관리자들이 조장하는 노동자층 분열, 노조 탄압, 그리고 노동운동의 위축 속에서 계급정치의 기반이 파괴돼간다. 거기에다가 ‘억울하면 성공하라’는 식의 교육이나, ‘경쟁의 승자’를 모범으로 내세우는 언론의 역할까지 생각하면 한국에서의 산자유주의 내면화의 과정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체제가 만들어내는 ‘환경’의 문제도 엄연히 존재하지만 우리 자신들의 오류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과연 진보라는 우리들의 이데올로기는 무엇이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사회의 상은 어떤 것인가? 이러한 차원에서는 집권여당과 주류 야당 사이에 사실 그다지 차이가 없다. 인권 보호나 사회서비스, 대북정책 등의 차원에서는 차별성이 있다 하더라도 사회경제적으로는 양쪽에서 오늘날 신자유주의 모델을 기본적으로 뜯어고칠 생각 없이 그 모델을 어느 정도 보완할 ‘복지’를 이야기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여야 양당에는 지역기반이라는 게 있는 이상 굳이 이데올로기가 체계화되지 않아도 그다지 상관없을 것이다. ‘지역개발 예산’과 땅값 상승을 기대하는 유권자들의 표는 어차피 몰리기 때문이다. 비주류 중에서도 한참 비주류인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매력 포인트’는 없다. 그렇기에 이데올로기나 미래 비전에 더욱 신경쓸 수밖에 없다.

한국 진보의 역사적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한국전쟁 이후 진보의 기원이 진보당이라면 조봉암이 영국 노동당을 벤치마킹해 이데올로기적 체제를 잡았으며, 또 거기에다가 평화통일 등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1950년대 이후부터 한국에서 진보는 사민주의와 통일, 반전, 평화, 반제국주의 지향의 조합을 일컬었다. 그러나 이처럼 비교적 온건한 혁신계 이데올로기라 해도 이승만·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살인적 탄압을 받았으며, 결국 그 과정에서 일부분이 급진화의 길을 걸어 1976~79년의 남민전 등 일부 조직들이 궁극적 사회주의국가 건설 계획을 들고나왔다. 광주항쟁 이후 급진화 경향은 한층 강화돼 1980년대의 진보는 철저히 반자본주의적이었다. 단 그 일부는 동구식 ‘현실 사회주의’를 모델로 삼았는가 하면, 또 한 경향은 동구 사회의 유교적, 총동원형 버전인 북한을 다소 이상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다가 동구의 몰락과 북한의 급격한 약화는 한국 진보의 미래 비전을 망가뜨리고 말았다.

동구도 북한도 빛을 잃은 대신 부상한 것은 -1950~60년대의 혁신 정당들이 이미 지향한 바 있었던- 사민주의였다. 물론 1980년대 운동의 여열이 남아 있는 만큼 한국 진보의 ‘사민화’ 과정은 전혀 단순하지 않았다. 예컨대 2000년 1월30일에 창당한 민주노동당의 강령은 본래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사회주의에 대한 긍정적 언급을 담고 있는 등 일반 사민주의 정당보다는 적어도 강령상으로는 급진적이었다. 단, 실제 정책 개발의 중심에는 강령상 명기된 ‘재벌 해체’는 아니고 대표적인 사민주의적 의제, 즉 무상 교육·의료와 부유세 등이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분열 과정에서는 강령마저도 후퇴해 그 후속 정당의 강령에서는 대개 ‘사회주의’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생산수단 사회화 등에 대한 언급도 없어지거나 완화됐다. 결국 핵심으로 남은 것은 재분배, 즉 복지에 대한 약속들인데, 보수정당들마저도 -기만적이긴 하지만- 이제 복지 의제를 전유해버린 상황에서 진보정당의 차별성은 약해졌다. 너나 나나 ‘핀란드식 교육’이니 ‘네덜란드식 노사관계 모델’이니 들먹이고 있는 판에 도대체 진보만의 독특한 정체성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부터 떠오르게 됐다.


1990년대 이후의 진보는 1970~80년대의 급진적 경향들을 뒤로한 채 사민주의로 회귀해버렸지만, 이미 자본주의 체제도 사민주의 진영의 구체적 모습도 완전하게 달라졌다. 아직도 제조업의 이윤율이 높았던 1950년대 같으면 자본가들도 운수수단이나 전기 등의 안정적 운영·공급이란 차원에서 발전소나 철도 등 사회의 기본시설에 대한 국유화 정책에 그다지 반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윤율이 높은 제조업의 정규직 고용이 계속 늘어날 수 있었던 만큼 그 이윤의 일부분이 세금으로 납부돼 노동자들이 공공 부문에서 의료·자녀교육서비스 등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자본으로서 꼭 반대할 일도 아니었다. 그만큼 기업은 회사 복지에 돈을 들일 필요가 없어 부담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1950년대와 같은 분위기에서 조봉암과 그 동지들이 현실적 강령으로서 그 당시의 제3세계 사민주의자들의 모토인 ‘생산에 대한 합리적 통제’나 ‘민족자본 육성’, ‘계획경제’, ‘교육에 대한 국가보장제’ 등을 들고나올 수 있었다. 실은 아시아의 대표적 사민주의자라고 할 인도의 네루 수상은 그 재임 기간 (1947~64년)에는 대체로 그런 정책으로 일관했다. 사민주의가 한국으로서도 현실적 대안이었기에 1956년의 대선에서 조봉암은 유효표의 30%나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과연 지금은 어떤가? 제조업 이윤율이 계속 떨어지는 상황에서, 자본가로서는 이제 사회기반시설은 물론 교육이나 의료 분야에까지 손을 뻗쳐 민유화하는 것은 거의 사활의 문제다. 공공 부문을 계속 식민화하지 않고서 저들의 이윤율 유지가 힘들기 때문이다. 자본 이동이 자율화돼, 늘 저세율 지대로 빠질 수 있는 자본에 고세율을 강요하는 것도 힘들어졌다. 공장 해외 이전이나 노동력 수입이 가능한 글로벌 신자유주의 시대에 노동자 의료·자녀교육에 대한 관심은 자본가에겐 전무하다. 노동력이 그저 일회용 부품이 돼버린 이 시절에, 과연 사민주의적 계급대타협 같은 것은 현실적이기나 한가? 최근 사민주의자들이 조봉암 시절의 ‘계획경제’를 삭제한 채 ‘재분배’만 이야기하지만 자본의 저항이 완강한 만큼 이것마저도 타협이 아닌 매우 급진적인 투쟁만으로 쟁취될 수 있을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신자유주의 시대의 진보로서는 이미 깨져버린 사민주의 꿈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자본에 대한 공세를 기축으로 하여 이 사회의 모든 약자들을 총집결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우리는 우리 생존권을 위해 자본가로부터 비정규직을 고용할 자유나 공장 해외 이전을 할 자유, 공공 부문을 민영화할 자유를 빼앗으려고 한다고 선언하고 계급투쟁의 전선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 투쟁의 끝에 자본주의를 넘어선 미래의 자세한 비전을 명확하게 보여야 한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출처: 한겨레신문 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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