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안에서 자라남
바로 우리 교리 28번째로 지정된 것이고
지난 안식일에 안교시간의 교과 제목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자라남”
어떻게 자라나야 하는가?
무엇을 먹으며 자라나는 원료를 삼아야 하는가? 등 여러 가지 지엽적인 문제가
우리를 어지럽힌다
자라난다고?
정말인가?
지난 주 도봉산 등산 중 심마니따라 버섯을 캤는데
이틀 뒤에 갔더니 모두가 말라서 넉아웃 되어 있었다
나도 준 심마니 흉내 낸다고 갔다가 이틀만에 시들어 말라버린 시체만 봤다
다음 비가 내리면 그 장소와 내가 봐 둔 장소에서 자연산 느타리를 캘 거라는 기대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비가 오듯이 고통의 세월에는 자라다가
햇살이 나고 새로운 세계가 시작한다 싶으면 말라버리는 신앙인들 아닌가?
요즘은 재림의 확고한 신념도 별로 없고 먹고 살기 미래의 밥그릇 걱정에
자녀들 교육 때문에 걱정으로 날 밤새우고
군대에 아들 보낸 부모들은 아이들 걱정에 잠도 잘 안 올 건데
그런 세월에 우리는 평생 믿어도 맨날 맨땅에 해딩하면서?
교회 안에서 변하는 것 별로 본 적 없는데?
내게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이려는 눈치만 보여도 언제 봤냐는 듯이
생까 버리는 세대에
내가 자라나는 것을 우리는 무슨 재주로 보는가?
여기서도 저기서도 자기 성깔 못 이겨서 된통 쌈박질만 해 대면서?
우리는 자라난다는 말만 들으면
그 열매를 보고 안다는 구절을 떠 올린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원죄적인 생각이 있는데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면서 우리들 속에는 내재한 행함의 교리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행함은 탈무드보다 더 강하게 작용하고 오경보다 더 험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자라나면 보인 것이 있어야 하나?
그렇다 성질도 변하고 생각도 변하고 이웃에게 대하는 태도도 변해야 한다
그게 자라남이지 지 어미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 아님은 말하지 않더냐?
매일을 죽어야 살아날 건데 우리는 죽지도 않으면서 내일 다시 살 것만 기대하지 않는가?
매일을 변해야 자라남인데 변하려면 표범의 얼룩진 반점도 벗어야 할 건데
그건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이라 했으니 움켜쥐고 있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사실 나도 그렇게 위안 받으면서 살았다 그래서 어제 하던 일 오늘 계속하면서
자라남의 원어적 의미만 새기면 살고 있었다
내가 변하지 않으니 너도 변하지 않고 교회도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의 자라남이란 바로 내가 먼저 변하는 것이다
그 변함이라는 것이 어떤 행위를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 이전의 내 생활을 내 속의 인간을 다스리는 것을 말함이 아닐까?
자라난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한다?
그렇다
외적 행위가 아닌 내 자신의 생각이 달라야 한다
포용력이 넓어야 할 것이다
나를 죽이는 법이 남 달라야 할 것이다
죽은 자가 먼저 일어나는 기적의 날은
주께서 변화시킨 사람들이 그날 먼저 일어난다는 말일 것이다
그 후 살아남아 변화하기를 거부하던 남은 자를 변화 시켜야 하늘은 진정한 하늘이 될 것이다
그래서 살아생전에는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괜히 좋은 시간 죽이면서 헛소리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