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3일 / 성령강림절 아홉 번째 주일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 1
누가 11:14-23
곽건용 목사
위인과 영웅
영화를 보면 경찰이 범죄자를 잡을 때 물불 가리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드는 모습을 봅니다. 그야말로 몸을 던져서 범인을 붙잡습니다. 전쟁터의 군인은 또 어떻습니까. 전쟁 영화는 총알이 빗발치는데도 불구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싸우는 군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게 모두 사실과는 제법 거리가 있는 장면이랍니다. 영화이기에 실제보다 과장되고 극적으로 표현한다는 겁니다. 나성에서 셰리프로 일하는 초등학교 동창이 있습니다. 언젠가 그 친구에게 셰리프 일이 위험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그는 웃으면서 “위험하면 내가 이걸 하겠니?”라고 하더군요. 물론 그 일이 조금도 위험하지 않다면 그것 역시 사실이 아니겠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하진 않다는 겁니다. 실제는 영화와 다르다는 것이죠.
미국에 와서 20여 년 살면서 미국은 영웅을 만들어내는 사회임을 알게 됐습니다.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드는 사회가 미국사회라는 거죠.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어느 사회에나 있지만 미국사회는 유독 그런 사람을 영웅으로 만듭니다. 저는 이게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9.11 사태 때 소방관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분들이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건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겁니다. 무너지는 건물에 들어갔다가 자기도 죽을 수 있음을 잘 알면서 인명을 구하러 건물로 들어간 사람들이니 대단한 사람들임에 분명합니다. ‘영웅’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더욱이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 한국 해경이 한 짓을 보니 그들이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 새삼 깨닫습니다.
어렸을 때 위인전을 많이 읽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랬을 겁니다. 대개의 부모가 자녀에게 위인전을 많이 읽히니 말입니다. 저도 이순신, 세종대왕, 강감찬, 을지문덕, 안중근, 윤봉길 등등의 위인전을 읽었고 외국인 위인전도 많이 읽었습니다. 거기서 많이 느끼고 배운 것도 사실이고요.
그런데 과연 위인전에 나오는 얘기가 전부 사실일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워싱턴 전기를 보면 그가 아버지가 사준 도끼로 집에 있는 체리나무를 잘랐다지요. 그리고 그가 그 사실을 아버지에게 정직하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이 얘기는 정직의 미덕을 가르치는 데 사용되는 유명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워싱턴의 집에는 체리나무가 아예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워싱턴이 체리나무를 잘랐고 그것 아버지에게 정직하게 알렸다는 것은 만들어낸 얘기라는 거지요. 그뿐 아닙니다. 정말 강감찬 장군은 소가죽으로 강물을 막아 거란족을 익사시켰을까요? 소가죽으로 강물을 막을 수 있을까요? 얼마나 많은 소가죽이 필요했을까요? 이순신 장군은 명량대첩에서 울돌목에 쇠사슬을 연결하여 일본 배들이 뒤집히게 했다는데 과연 그게 가능했을까요? 이제 와서 확인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얘기가 과연 사실일까 하는 의문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위인전’이을 다음과 같이 해학적으로 정의했는데 웃고 넘어갈 수만은 없네요. 위인전이란 ‘한 사람에게 신(神)의 탈을 씌워놓고 누구나 저렇게 될 수 있다고 사탕발림해서 그걸 빨아먹게 만들고 그 다음에 나는 죽어도 저렇게 될 수 없다고 생각하도록 해 놓고, 여기에는 배울 점이 있으니 무조건 따르라면서 보통 사람을 기죽게 만드는 책’이라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그럴듯합니까? 미국사회는 영웅 만드는 데 익숙한 사회지만 저는 거기 익숙해지지 않네요.
성서시대의 신화적 세계관
해마다 5월이 되면 고국 곳곳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란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올해도 광주에서 열린 5.18 기념식을 둘로 갈라놓은 것이 이 노래를 합창으로 부르느냐 여부였습니다. 이 노래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라는 노랫말로 시작됩니다. 어떻습니까? 이 노랫말은 의도적으로 영웅을 만들어내는 미국사회와는 분위기가 다르지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살아가겠다는 것과 웬만한 일로도 영웅을 만들어내는 것은 분명 달라 보입니다. 역사를 진보하게 만드는 힘은 어디서 올까요? 영웅이나 위인입니까? 위대한 지도자가 역사를 진보하게 만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역사를 바꾸는 힘은 이름도 명예도 남기지 않고 이 땅 한 구석에서 조용히 자기가 할 일을 하며 자신을 희생한 민초들에게서 비롯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첫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가진 것 없는 민초였습니다. 가난한 밑바닥 사람들이었던 겁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비롯한 열두 제자에게 이른바 ‘사도’의 권위를 부여한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교회였습니다. 예수님 생전에는 그런 권위나 위계질서 같은 게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고상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가난하고 못 배운 밑바닥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미신적인 구석이 많았던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들은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았고, 성찰적이기보다는 즉각적이었고 감정적이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을 때 베드로가 칼로 한 군인의 귀를 잘랐던 것도 그가 즉각적이고 감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앞뒤 재가면서 행동하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갖고 있던 세계관은 ‘신화적’ 세계관이었습니다. 신화적 세계관이란 선한 신과 악한 신이 등장해서 서로 싸우고 그들 지배하에 천사와 악마가 투쟁한다고 해서 그렇게 불립니다. 신화적 세계관에 따르면 지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신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의 복사판입니다. 이것이 신화적 세계관입니다. 이 세계관에서 세상은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싸우는 전쟁터입니다. 선한 신과 악한 신의 대리자인 천사와 악마가 전쟁을 벌이고 있는 곳이 이 세상입니다. 이것이 예수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던 세계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신인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그분의 뜻을 이 세상에서 대신 행하시는 분으로 어겨졌습니다. 그런 분을 유대인들은 ‘메시야’라고 불렀던 겁니다.
이런 사정을 이해해야 오늘의 본문인 누가복음 11장 얘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귀신 하나를 어떤 사람에게서 쫓으셨습니다. 이때 쫓겨난 귀신이 ‘벙어리 귀신’이었다는 겁니다. 사람을 벙어리로 만드는 귀신이었던 겁니다. 곧 한 사람이 벙어리가 되는 까닭은 벙어리 귀신에 들렸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그 귀신을 예수께서 내쫓았기 때문에 그가 나아서 말을 하게 됐습니다. 귀신이 쫓겨나서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된 사건은 당시 사람들 눈에는 매우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무슨 능력으로 그런 일을 하느냐를 두고 무리들 가운데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힘이 어디서 왔냐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귀신 두목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내쫓는다고 했고 다른 사람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다는 표징(sign)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어느 나라든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하고 가정도 서로 싸우면 무너지고 마는 법인데 사탄의 나라인들 다르겠느냐?”고 하시고 당신이 어떻게 마귀 두목을 힘을 빌려 마귀를 내쫓겠느냐고, 그렇다면 마귀들이 자중지란을 일으켰다는 얘기냐며 그들 주장을 반박한 다음에 “그러나 내가 (바알세불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들을 내쫓으면 하나님나라가 너희에게 이미 온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만 갖고 보면 하나님나라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으면 오는 나라’가 되겠습니다.
정말 천사와 악마가 있을까?
여러분은 이 얘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 이런 귀신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정말 귀신 때문에 사람이 벙어리가 됩니까? 이 세상은 천사와 귀신이 전쟁을 벌이는 전쟁터입니까? 선한 신과 악한 신을 대신해서 천사와 악마가 싸우고 있습니까?
정직하게 말하면 저는 오랫동안 이걸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신화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었기에 이런 얘기를 하지, 지금같이 과학적 세계관을 가졌다면 다른 방식으로 썼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는 당연히 그렇게 믿었습니다. 신약성서가 어떤 개인이 귀신들렸다고 할 때 그건 일종의 정신질환을 앓는 것으로 생각했고, 예수님은 그의 불안증이나 강박증을 심리 치료해주셔서 나은 걸로 이해했습니다. 또한 사탄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도 그것은 일종의 구조적인 악이나 불의한 제도, 사악한 체제 같은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무척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입장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정말 그럴까, 그게 옳은 생각일까, 나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생각이 과연 옳은 걸까, 그게 전부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성서를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관련주제의 책들을 찾아 읽게 됐습니다. 그 결과, 지금도 저는 성서시대 사람들이 가졌던 신화적 세계관이 지금은 옳지 않다고 여전히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몽주의시대 이후의 이성적, 합리적 세계관이 절대적으로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게 됐습니다. 이걸 무슨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서 오늘 교의 제목을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라고 붙여봤습니다.
제가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좀 이상하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도 이해하고 들어주십시오. 요즘 한국에서는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당일 첫 보고를 받은 후 대책회의가 열리기까지 7시간 동안 대통령이 뭘 하고 있었는지가 화제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하는데도 불구하고, 온갖 이상한 소문이 나도는데도 불구하고 청와대는 꿈쩍도 안 합니다. 이 와중에 대통령 비서실장이 국회에 나와서 그 시간에 대통령이 어디 있었는지 자기도 모른다고 증언했습니다.
저는 우연히 한 식당에서 이 뉴스를 TV로 봤습니다. 그걸 보는 순간 누가 제 머리를 망치로 때리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말 그대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겁니다. 비서실장은 잠시라도 대통령이 어디서 뭘 하는지 몰라서는 안 되는 직책입니다. 그런데 그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은 그 시간에 대통령이 어디 있었는지, 물리적인 위치를 모른다는 뜻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제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비서실장이 몰랐던 것은 단순히 그녀의 위치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뭔가 강한 힘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현 정권은 이전 정권을 이어받았습니다. 저는 전 정권의 수장은 그저 돈밖에 모르는 똑똑하지 않은 사람 정도로 생각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번 정권의 수장은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그녀는 돈이나 밝히는 욕심쟁이가 아니란 느낌이 듭니다. 그보다는 훨씬 어둡고 악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겁니다.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는 걸 느낍니다. 제가 신약성서의 악마와 귀신 얘기를 다시금 생각하고 새롭게 읽게 된 것도 이 일과 전혀 무관하지 않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할 ‘그 이상의 무언가’에 대한 시리즈 설교의 실마리로 얘기 하나를 하겠습니다. 어떤 목사가 미국 시골 동네의 두 교회를 맡아 목회하게 됐습니다. 두 교회는 같은 마을은 아니지만 멀리 떨어지지 않았기에 서로 왕래가 잦았습니다. 많은 시골교회가 그렇듯이 교인 숫자가 많지 않고 재정도 넉넉하지 않아 각각 따로 목사를 청할 수가 없었기에 두 교회가 함께 한 목사를 청했던 겁니다. 부임한 목사는 여자 목사였는데 이상하게 한 교회는 잘 되고 교인들도 행복해 하는데 다른 교회는 잘 되지 않았습니다. 목사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똑같은 정성을 들여 목회하는데, 교인들도 다른 점이 별로 없이 비슷한데 왜 결과는 이렇게 다른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겁니다. 왜 그럴까? 더 상세하게 얘기할 시간이 없어서 여기서 중단할 수밖에 없지만 이 목사는 비슷한 두 교회를 목회하면서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합니다. 이 ‘그 이상의 무엇’에 대해서는 다음 주일에 얘기해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