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할 때 방점을 어디에 찍느냐가 문제이다.
아버지는 당연히 "나의" 에 방점을 찍을 것이다.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는 말은 나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한 아들이 된 것은 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기로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다른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기로 했으면 다른 아버지와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한 아버지와 "그의 계명"을 따르기로 함으로
그 아버지와 부자 관계가 성립됐다는 말이다.
그후 계명을 잘 지키느냐 잘 못 지키느냐는 차후의 문제인 것이다.
"지키리라"는 말에 우리는 반드시 꼭 지켜야 한다는 말로 해석을 하는 데,
잘 지키지 못하는 것도 지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법의 테두리 안에 있다는 말이다.
그 법 테두리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잘 지킨다 못 지킨다 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둘 사이의 관계를 맺은 법을 없애 버린다는 것은
잘 지킨다 못 지킨다의 이슈가 아니고,
관계를 없이한다는 말이다.
문제점;
1) "아들이 된 후로는 둘 사이의 계명이 필요없다."
위의 전제가 얼마나 당치도 않다는 것이 충분히 설명이 됐으리라 본다.
2) "아들은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아들이다.
그래서 법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위에 설명한 대로 못 지키는 것도 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법을 대하는 태도로 결정할 문제이다.
법을 법으로 honor 하느냐? 하지 않느냐?
다시 말하면 아버지와의 관계를 honor 하느냐? 하지 않느냐? 에 달린 문제이지,
잘 지키느냐 뭇 지키느냐가 이슈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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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곳에서 토론을 하면서 놀란 것은
한결같은 "국화빵" 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일반 개신교 신학자들이 만들어 논 신학에
설득이 되어 똑같이 되풀이들을 하고 있는지 참으로 놀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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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장 하고 싶은 것은 이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만 구원을 얻는다.(Period)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믿음을 갈급하게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갈급함이 클 수록 은혜의 기쁨도 그 것에 비례한다.
매 순간 은혜의 기쁨을 누리고 싶은가?
매 순간 율법을 묵상하라! (시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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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앞에 겸손함만이 은혜의 창고를 열 수 있다.
율법만이 인간을 저주하게 만들며,
저주받은 자신을 볼 수 있는 자 만이 겸허하게 될 수 있다.
이 빛이 민초 형제들의 마음에 비추어
참으로 기쁨의 형제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래본다.